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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집고치는 달팽이 Mar 24. 2023

좋아하는 일을 매일 하면 생기는 변화

그림을 매일 그리며 깨달은 것

 지난주부터 다시 상담을 시작했다. 1년간 휴직하셨던 상담 선생님이 돌아오셨고 나도 아직 취직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1년 만에 보는 선생님은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으셨다. 언제나처럼 반갑게 웃으시며 내 이름을 부르셨다. 긴장감은 사라지고 오랜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갑고 익숙했다.


 2018년 처음 상담을 시작할 때처럼 나는 진로 문제를 다루고 싶다고 말했다. 첫 상담 이후 나는 두 번의 취직을 했고 2년 7개월이나 한 회사에 몸담았지만, 여전히 취업이 무섭기는 마찬가지다. 오히려 두 번 힘들었으니 불행은 구체적으로 그려지지만 나은 미래는 떠오르지 않는다.


 그런데도 내가 선생님께 처음으로 꺼낸 말은 자랑하고 싶다는 거였다. 나는 작년 한 해 내가 하고 싶었던 두 가지를 마음껏 했다. 글쓰기와 그림 그리기. 웹소설 강의를 듣고 난생처음 10만 자를 써보았으며, 웹소설 카페에 가입해서 글을 공유하고 피드백을 받았다. 그림 스터디도 신청해서 그림을 그리고 2주에 한 번씩 모여 선생님께 피드백을 받고 있다.


 함께 하는 사람들에게 많이 늘었다는 피드백을 받았고 언제나 자신에게 인색한 나도 인정할 만큼 성장이 눈에 보였다. 나의 성장을 응원하는 선생님께 그동안의 노력과 성과를 보여드리고 싶었다. 코로나 때문에 우리 사이에는 유리 벽이 있었지만, 선생님은 개의치 않고 내 쪽으로 오셔서 그림에 집중하시며 감탄을 연발하셨다.


그림 스터디 첫 과제와 최근 과제


 선생님께서는 내가 글쓰기를 좋아하는 건 알았지만 그림에 이렇게 관심이 있는지는 몰랐다고 말씀하셨다. 정확히 말하면 사진과 같은 정교한 그림. 상담 시간에 글과 그림을 보여드리긴 했지만, 그때의 그림들은 아이디어에 초점이 맞춰진 아이 같은 그림이었기 때문이다.


 사실은 나도 사실적인 그림 그리는 건 나와 맞지 않다고 생각했었다. 미술학원에서 데생을 그리는 게 지겨워 학원을 그만뒀었고, 세밀한 그림을 그리는 동생을 보면서 ‘똑같이 따라 그리는 게 무슨 재미가 있지? 쟤는 어떻게 저렇게 작은 거 하나하나 다 그리지? 귀찮게.’라고 생각한 게 나였다. 그런데 회사에 취직하고 나서는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미술 해부학’, ‘인물화’, ‘크로키(빠르게 인체를 그리는 것)’ 등등 그림 강의를 사고 있었다. 지금까지 그림 강의에 쓴 돈만 100만 원이 넘는다.




 작년에 퇴사 후 쉬는 기간이 6개월 이상 되며 조급해진 나는 섣부르게 취직했다. 들어간 회사는 ‘상담쌤이 보고 싶은 날이다.’라는 글에 썼듯 '전체 회식 때 노래방을 가고, 모두 건배사를 해야 하고, 모두가 건배사를 끝내기 전까진 화장실도 못 가며, 건배사 할 때는 원샷을 해야 하고, 술을 안 마시려면 자리를 잘 잡아야 하고, 사장이 한 명씩 돌면서 설교를 하는, 의무 연차 사용이 있고 워크숍을 1년에 세 번 가는' 그런 회사였다.


 그만둔 이후로 나는 도망칠 곳이 필요했다. 엄마는 동네방네 다 얘기했는데 창피하게 왜 그러냐며 화를 냈다. 그런데 엄마가 아니라 내 무의식 속에도 그런 마음이 있었다. 자괴감으로부터, 나를 비난하는 나 자신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마침 그때 그림 스터디를 하고 있었고, 인물 사진을 보고 똑같이 그려보는 게 과제였다. 글을 쓰려면 나 자신을 돌아봐야 하는데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내 마음을, 깊숙한 곳에 숨겨둔 어두운 감정들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매일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사물을 종이에 정확히 그려내는 데는 생각보다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두 시간씩 대상을 관찰하다 보면 제대로 보고 있는 것이 맞는지 혼란이 온다. 평소에 이렇게 사물을 대충 보고 넘겼다니 놀라게 된다. 서 있는 사람의 신발 앞부분을 둥그렇게 그렸을 때 선생님은 다시 한번 자세히 보라고 하셨다. 사람들은 신발이니까 둥그렇게 그려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보면 평평하다고 했을 때의 충격이란.


 제대로 관찰하기만도 어렵지만 그게 끝이 아니다. 그다음에는 그것을 종이에 어떻게 옮길지 고민해야 한다. 사람의 몸에 붙어있는 섬세한 근육의 굴곡, 재질마다 다른 선을 보여주는 옷 주름 등. 굵은 선으로 그릴지 얇은 선으로 그릴지, 곡선으로 그릴지 직선으로 그릴지, 명암을 어떻게 표현할지 머리가 쉼 없이 굴러간다. 오롯이 대상과 나만 존재하는 시간이다. 다른 잡념은 끼어들 틈이 없다.


 그림을 그리기 전엔 또 2시간을 그렇게 집중해야 한다는 게 겁이 난다. 매우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서도 내가 원하는 만큼 그려지지 않으면 괴롭다. 잘 그리는 사람들을 보면 ‘그들은 얼마나 연습했길래 저렇게 잘 그릴 수 있을까? 과연 내가 그 정도의 노력을 할 수 있을까?’하고 아득해진다. 날마다 좌절의 연속이다. 잘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든 행위에는 고통이 수반된다. 내가 이런 얘기들을 하지 않았음에도 상담 선생님은 그림을 다 보시곤 물어보셨다.


 “분명 부정적 감정들도 올라왔을 텐데 어떻게 계속할 수 있었나요?”


 어떻게 지속할 수 있었는지 나도 의문이었지만, 답은 의외로 쉽게 나왔다.


 “제가 그림을 그만큼 좋아하나 봐요.”




 사실 그림은 잘하고 싶었지만 이루지 못한 오랜 염원이었다. 어릴 때부터 학습지를 그림으로 가득 채웠고, 엄마에게 미술학원을 보내달라고 부탁했으며, 만화를 그려 사촌들에게 보여줬다. 문화센터에서 하는 캐릭터 그리기 수업을 신청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 마음은 중1 때 동급생이 그린 만화를 보고 깨져버렸다. 너무 잘 그린 그림 앞에서 나는 포기해 버렸다. 나는 미술학원에서 한 번도 잘 그린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언제나 마음 한구석엔 그림을 잘 그리고 싶다는 바람이 있었다. 성인이 된 이후로 가끔 원데이 클래스 그림 수업을 듣고, 미술학원을 다녀보기도 하고, 혼자 그림을 따라 그리기도 했다. 오래가지는 못했다. 나에게는 해야 할 일들이 있었으니까. 과제, 취업 준비, 일. 또, 잘 늘지 않으니 쉽게 포기했던 것 같다.


‘난 못 하니까. 해봤자 안돼.’

‘난 자세히 그리는 거랑은 안 맞아. 성격상.’


 그러나 막상 똑같이 그리라는 과제를 받고 나자 열심히 하는 내가 있었다. 더 잘하고 싶었다. 안 맞는 게 아니라 한 번도 제대로 해 본 적이 없는 거였다. 재능이 없어서 못 하는 게 아니라 내가 원하는 걸 제대로 된 방법으로 꾸준히 해보질 않은 거였다.


 하고 싶었던 일을 하면 마음이 조금씩 채워진다. 조금씩 나아지는 자신을 보면 자괴감이라는 상처 위에 새살이 돋는다. 그리고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나는 상담 선생님에게 내 포부를 말했다. 그림을 그리지 않았더라면 몰랐을 일이었다.


 “저는 저를 표현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이제는 하고 싶은 일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 계속 진로에 대해 고민하고 어떨 때는 타협을 해야겠지만, 이 마음은 꼭 간직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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