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널 현상
"이봐 OOO야. 내 돈 내놓으라고. 난 더 이상 잃을 게 없는 사람이야. 당신들이 안 준 돈 때문에 지금 우리 회사 직원들 다 굶게 생겼어... 난 앞도 뒤도 없어... 당장 돈 내놓지 않으면 소송으로 갈 테니까 그렇게 알아두세요"
아침 5시 30분에 협력사 대표에게서 온 카톡이었다. 전에는 자정에도 돈 달라고 메시지를 보내더니, 이제는 욕설과 협박으로 넘어갔다. 돈을 안 주면 우리 집에 와서 위협이라도 할 기세였다. 다행히, 내가 이 파트를 담당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다른 담당자가 있다는 점이었다. 이 메시지를 받은 것도 그분이었다. 지금 팀으로 내가 오기 전에 이 이슈를 처리하셨던 분이 계속해서 리딩하는 게 맞다는 게 임원들의 생각이었다.
옆에서 카톡을 보여주는데, 마치 드라마에서나 나올 것 같은 사건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었다. 아니,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한 실제 상황이었다. 드라마에서는 욕설이 검열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사건의 전말은 다음과 같다.
약 10년 전에 이 협력사와 계약을 맺으며 관계가 시작됐다. 차량용 용품 계약으로 매년 약 15억 원의 매출이 발생했고, 이는 지금까지 꾸준히 이어져 왔다. 영세한 업체였기에 이 정도 매출이 그 회사 수익에 크게 기여했을 것이라 추측된다. 그런데 몇몇 품목에 재고가 쌓이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더 이상 해당 품목의 수요가 없어 재고를 소진할 방법이 없었다. 그 재고 금액은 대략 3억 원 정도였다. 그 후, 협력사 대표는 본사에 와서 소리치기 시작했다.
"여기 사장 나와! 내 돈 내놓으라고!"
이 사건은 단순한 실무자 이슈를 넘어, CEO까지 보고해야 하는 상황으로 확대되었다. 업무상 누락된 부분들도 발견되었고, 협력사와 협의하기 위해 여러 차례 미팅을 진행했지만, 극단적인 메시지를 보낸 사장은 물러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미팅 자리에서도 협박성 발언과 함께 조폭 같은 태도를 보였다. 그는 재고 비용을 조금이라도 줄여서 받을 수 없다는 강경한 입장을 고수했다. 양측 모두 물러설 수 없는 입장이 되어 최종적으로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결정해야 했다. 이 문제를 끝까지 풀어보려고 노력할 것인지, 아니면 단칼에 해결할 것인지.
여기서 '터널 현상'을 생각하게 된다. 어떤 문제에 너무 몰입하다 보면 마치 터널 안에서 출구만 보이는 것처럼 시야가 좁아지고, 다른 길을 찾는 것이 어려워진다. 이 상태에서는 새로운 해결책을 찾기 어렵다. 혼자서 계속 파고들면 더 깊은 수렁에 빠질 위험이 있다. 이때 필요한 것은 내가 터널 속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주변의 의견을 듣는 것이다.
같은 상황도 사람마다 보는 관점에 따라 선과 악이 나뉜다. 누군가에게는 선한 일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악한 일이 되는 경우가 많다. 이분법적으로 판단하기 어려운 상황들을 자주 만난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바로 소통이다.
정말 놓치고 싶지 않은 것들이 있다. 일에서도, 삶에서도. 하지만 그것을 붙잡으려다 모든 것을 잃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어리석은 선택일 것이다. 상황을 차분히 정리하고, 주변의 조언을 들으면서 가장 적절한 판단을 내리는 것이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