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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희 May 13. 2024

느린 여행

한산도 섬 여행

꿈꿔왔던 아침을 맞다


아침 햇살이 방까지 밀고 들어오고서야 눈을 떴다. 침대에 누운 채 팔다리를 제멋대로 스트레칭하다 일어나 시폰 커튼을 젖히고 창문을 열었다. 부드러운 바람과 함께 탁 뜨인 바다 전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늘 꿈꿔왔던 아침의 모습, 여기가 파라다이스다. 밤새 누군가 물감을 풀어놓은 것처럼 파란 바다가 햇살을 받아 반짝인다.


펜션 주인이 정갈한 놋그릇에 수제 요구르트와 토스트를 문 앞까지 챙겨다 줬다. 프랑스 자수로 수놓은 천이 고와 사진 몇 장을 찍어 두었다. 밥 안 해 먹는 것이 여행의 큰 즐거움인데 베란다 테이블에 앉아 간단하게 아침을 먹고 있으니 백만장자 부럽지 않다.



전날 어두워질 무렵 숙소로 들어와 밖을 제대로 못 본 탓에 아침 풍경이 새롭고 주인의 따듯한 배려가 감사하다.



이순신 장군을 기리다


오늘은 배 타고 통영에서 가장 큰 섬인 한산도를 여행하려고 한다. 통영여객터미널로 가는 길에 중앙시장에 들러 충무김밥과 커피를 사서 배를 탔다. 통영은 삼면이 바다로 사량도, 욕지도, 매물도 등 150여 개의 섬이 있다. 통영에서 한산도는 25분밖에 안 걸려 여행하기 좋은 장소다.

배 안에서 커피 한잔 하며 창문 밖으로 펼쳐지는 바다를 보고 있는데 딸이 손짓해 3층으로 따라 올라갔다. 바람이 불어 비릿한 바다내음이 코를 자극한다. 잔잔한 바다를 가르며 크고 작은 섬들이 시야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모습을 한참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거북 등대가 보이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산도에 도착했다. 

선착장에는 오륙십여 명의 초등학생들이 현장학습을 왔는지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린다. 아이들의 목소리는 상기되어 에너지가 발산되고 있었다. 우리는 아이들이 지나가고 나서 제승당 쪽으로 걸어갔다.

제승당으로 가는 길은 우거진 숲과 오래된 적송, 푸른 하늘과 바다를 보며 걸을 수 있어 좋다. 한산도는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의 삼도수군통제영이 최초로 자리 잡은 곳이다. 제승당은 이순신 장군의 집무실이자 사령부 역할을 했던 곳이다. 안쪽으로 이순신 장군의 영정을 모신 충무사가 보이고 담장 사이 일각문으로 들어가면 한산정이 보이는데 이곳은 장군이 활쏘기를 연마했던 곳이다.



버스를 타고 섬을 돌다


제승당을 나와 선착장에 도착하니 버스가 정차해 있었다. 통영에서 배를 타고 내린 주민들이 이용하는 버스로 배 시간에 맞춰 운행한다. 버스 안에는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 짐을 한 아름씩 가지고 앉아 있었다. 관광객들도 버스를 타길래 우리도 무작정 올랐다. 통영시장에서 산 옷을 느닷없이 꺼내 이 옷 어때? 울 며느리 오면 주려 샀는데 괜찮아? 얼굴이 까맣게 그을린 아줌마가 크게 웃으며 이야기한다. 또 다른 할머니는 영감 생일상 차려주려 시장에 갔는데 물건이 비싸 소고기만 겨우 사 왔다며 구시렁거린다. 버스 안은 웅성웅성 시끄러웠지만 서로 아는 사람들인지 경계심이 없어 보인다. 마치 오래된 흑백 티브이 속 전원일기를 보는 양 웃음이 난다. 마음 좋은 기사분은 마을주민들이 버스에서 내릴 때마다 운전석에서 일어나 짐을 내려준다.


우리는 한산면사무소에서 내려 마을에 부착된 커다란 지도를 보면서 긴 다리로 이어진 추봉도를 여행하기로 했다. 다리를 건널 때 바람이 세게 불어 몇 번이나 모자가 날아갈 번해 한 손으로 모자를 부여잡고 걸었다.

2007년 추봉대교가 개통되면서 한산도에서 쉽게 추봉도로 오갈 수 있게 되어 하나의 생활권이 되었다. 한산도의 4분의 1 크기로 봉암, 추원, 예곡, 곡룡포 등 네 개 마을이 이웃하고 있어 생각보다는 꽤 큰 섬이었다.


푸른색 지붕과 하얀 담장 앞에 키 작은 나무가 나란히 줄지어 서있다. 이곳저곳을 걷다 바다가 보이는 벤치에 앉아 충무김밥을 꺼냈다. 어른 엄지손가락 크기의 김밥과 오징어초무침, 깍두기가 입맛을 돋운다. 충무김밥은 고기잡이를 나가는 남편을 위해 아내가 정성을 다해 만들어준 김밥에서 유래가 되었다. 밥이 쉬지 않도록 김밥과 속을 따로 쌓아 준 속 깊은 아내의 정성이 느껴진다. 맛있게 김밥을 먹고 마을 안을 구경하다 카페가 보여 들어갔다. 카페는 살짝 마을회관 같은 분위기였지만 어디에 앉아도 바다가 보인다. 섬을 여행하다 보면 모든 게 정지된 그림 같다는 느낌이 든다. 딸과 친구처럼 수다를 떨고 커피를 마시며 느리게 시간을 보내고 있다. 쫓기지 않고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가는 게 우리의 여행이다.


카페에서 나왔더니 지나가던 빈 버스가 갑자기 멈춰 우릴 기다린다. 기사님이 섬을 한 바퀴 돌고 이곳에 다시 내려줄 테니 타라고 한다. 이번에는 손님이 우리 셋밖에 없다. 2번 버스를 타고 오전에 돌지 못한 반대편 방향의 한산도를 눈에 담았다. 기사님은 마을의 유래를 하나하나 설명하는데 사투리가 심해 절반은 알아듣고 절반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우리는 연신 웃어가며 고개를 끄덕였고 그는 더 열심히 이것저것 안내해 준다. 구불구불 가파른 길을 오를 때면 버스가 덜컹덜컹 흔들려 놀이기구를 타고 있는 것처럼 어지럽다. 어느 부지런한 어부가 손질해 널어놓은 물고기가 담장에서 윤기가 날 정도로 꼬들꼬들 잘 마르고 있다. 나무숲 길을 돌아 외갓집처럼 생긴 집들이 보인다. 어릴 적 시골 버스를 타고 할머니랑 장에 가서 새 운동화를 샀던 일이 어제 일처럼 떠오른다. 세월이 흘러 우리 딸도 엄마 아빠와 같이 탄 이 시골 버스를 기억하겠지. 다시 면사무소에서 내려 1번 버스를 타고 선착장으로 갔다. 섬 안을 돌고 났더니 배가 출출해 아이스크림 하나씩 사서 입에 물고 돌아갈 배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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