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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정 당신은 잘 있나요?

가을 춘천에서 만난 문학과 사랑의 얼굴

by 이소희


춘천 하면 첫사랑이 생각난다. 고등학교 때 춘천에서 전학 온 친구 오빠를 혼자 좋아했으니, 짝사랑이란 말이 더 정확하겠지만 내게 춘천은 여전히 설레는 도시다. 그리고 이 도시는 또 한 사람의 서툰 사랑으로 기억된다. 김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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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춘천 실레마을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형제들과 흩어져 살아야 했던 사람. 연희전문학교에 다니다 병약한 몸이 따라주지 않아 자퇴했다. 젊은 김유정의 사랑은 아름답지만은 않았다. 휘문고 시절 명기 박록주를 처음 본 순간, 그는 한눈에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돌아온 건 짧고 냉랭한 답장뿐이었다. 학생은 학생답게 공부나 하라는 말. 그 단호한 거절에 애증의 불길은 걷잡을 수 없이 타올랐고, 그는 맹목적인 집착과 발작적인 분노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녀에게, 자신뿐 아니라 상대의 죽음까지 암시하는 편지를 보냈으니 상상만 해도 섬뜩하다. 우리는 흔히 그를 ‘순박한 시골 청년의 대명사’로 기억하지만, 그의 안에는 불안과 격정이 함께 타고 있었다. 사랑과 세상 모두에게 서툴렀던 그는, 결국 그 불안과 격정을 글로 흘려보내며 스스로를 버텼을 것이다.


가을은 떠나기에 좋은 계절이다. 수원에서 용산, 다시 ITX-청춘 열차를 타고 춘천으로 향했다. 나와 같은 일을 하는 친구이자 동료 작가와 함께였다. 차창 밖으로는 강물이 햇살을 머금고 반짝였고, 그 위로 억새가 바람에 눕고 일어나길 반복하고 있다. 멀리서 철교가 스쳐 지나갈 때마다 유리창이 잠깐 어두워졌다가 다시 환해졌다. 열차는 강을 따라 유유히 달렸고, 햇빛은 제멋대로 객실을 돌아다니며 좌석과 얼굴을 번갈아 비췄다. 풍경은 그 자체로 완전한 문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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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정역에서 기차는 느리게 숨을 고르며 멈췄다. 문이 열리자 차가운 공기와 함께 흙먼지 섞인 냄새가 났다. 햇살은 오래된 엽서처럼 바스러질 듯 부드러웠다. 정면에는 검은 기와지붕의 역사가 단정히 서 있었다. 파란 하늘 아래 노란 단청이 햇빛을 받아 반짝였고, 마치 시간이 멈춘 듯 고요했다. 역을 나와 길을 건너니 ‘설레마을’이 보였다. 이름이 너무 예뻐서일까, 쓸쓸하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는 김유정 생가로 향했다. 낮은 담장 안에는 볕을 잔뜩 머금은 초가 한 채가 있었다. 부엌엔 흙 벽 냄새가, 방에는 낮은 서까래 밑으로 전구 불빛이 희미하게 빛났다. 나는 툇마루에 앉아서 햇살을 쬐고 있었다. 몸의 긴장이 하나씩 풀리더니, 마치 햇살 아래서 게으르게 몸을 늘어뜨린 고양이처럼 나른한 졸음이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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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 오늘은 우물이나 좀 파보세. 다 하면 장가보내주지!” 그 대사가 바람결에 섞여 오는 듯했다.


〈봄봄〉의 장면들이 떠올랐다. 장인의 농간에 속아 장가를 못 가고 머슴살이만 하는 주인공. “빙장님, 고맙습니다”라며 웃던 그의 순박한 얼굴. 어리석음으로 포장된 복종은 생존을 위한 순응이기도 했다. 김유정은 그걸 알고 있었다.


생가를 나와 문학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마당엔 키 작은 은행나무 몇 그루가 서 있었다. 노란 잎이 수북이 내려앉아 땅을 덮고 있었고, 그 위로 햇살이 고요히 번졌다. 같이 온 작가는 나무 아래서 걸음을 멈췄다. 그녀는 허리를 숙여 노란 은행잎 하나를 집어 들고, 잠시 빛에 비춰 보았다. 잎맥마다 얇은 금빛이 아름다웠다. 사진 한 장을 찍고, 가방에서 시집 한 권을 꺼내 책장 사이에 넣었다. 그녀의 눈빛에는 알 수 없는 그리움이 스치는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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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 안은 3~4명의 사람들만이 관람을 하고 있었다. 유리 진열장 속에는 닳은 만년필과 원고지, 잉크 얼룩이 남아 있었다. 그 흔적들은 작가보다 오래 살아남아 우리와 마주하고 있다. 원고의 글씨에 숨이 가빴던 흔적, 문장마다 기침의 여운이 묻어 있는 것 같았다. 병고 속에서도 글을 쓰고 있는 김유정의 모습이 그려졌다.


봄이 오면 마을 골짜기마다 노란 꽃이 피어난다. 김유정은 그 한가운데서 시골 청년과 점순이를 만나게 했다. 둘은 매일 다투고 티격태격하지만, 그건 미움이 아니라 사랑의 전조였다. 점순이는 장독대 뒤에 숨어 주인공을 놀리고, 감자 세 알을 들고 와 “너희 집엔 이런 것도 없지?” 하며 생색을 부린다. 그 말에 청년은 속으로 끓는다. 억울함, 수치심, 그리고 이름 모를 설렘이 한꺼번에 밀려온다. 참다못한 그는 점순이네 수탉을 잡아다 때려죽인다. 그건 복수였을까, 아니면 서툰 고백이었을까.


이야기는 결국 노란 꽃밭으로 이어진다. 화가 풀린 점순이가 다가와 그의 어깨를 툭 건드리고, 그들은 장난처럼 밀치다 함께 넘어지며 노란 동백꽃 속에 파묻힌다. 햇살과 흙냄새, 그리고 묘한 숨소리. 김유정은 그 순간을 오래 붙잡지 않는다. 웃음 한 줄로 끝낸다. 하지만 그 짧은 웃음 속에는 모든 게 들어 있다. 서툰 욕망, 설레는 사랑, 그리고 가난한 젊은 날의 서러움까지. 김유정의 세계는 그렇게 끝나지 않는 농담처럼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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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으로 돌아오는 길. 늦가을의 햇살이 길 위로 부드럽게 퍼졌다. 나와 친구의 그림자가 그 위를 나란히 걸었다. 발끝이 움직일 때마다 그림자는 길게 늘어졌다가 천천히 겹쳐졌다. 저녁엔 춘천의 단골 닭갈비집으로 향했다. 매콤한 냄새와 철판 소리가 추억을 자극했다. 볶음밥을 비비며 생각했다. 삶은 때때로 비틀리고, 사랑은 자주 실패한다. 하지만 그 잔해로도 작가들은 글을 쓰고, 살아간다.


춘천의 밤공기엔 김유정의 문장이 섞여 있었다. 해학과 슬픔, 순정과 왜곡, 사랑과 집착이 한 줄 안에서 엉켜 있던 문장들. 웃는 얼굴의 슬픔 — 그게 김유정이 남긴 가장 솔직한 초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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