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봄이 왔다. 옷깃이 여며지는 2월이지만 자연은 벌써 꽃을 피우고 새싹을 틔웠다. 그러나 체감은 아직 겨울이다. 봄과 겨울을 동시에 느끼고 있는 2월 어느 날, 주문하지도 않은 택배가 하나 도착했다. 부피가 상당했다. 감이 온다. 며칠 전 시어머니께서 “내가 조만간 제주 가서 장 담가줄게" 했던 말이 생각났다. 메주가 도착한 모양이로구나. 메주가 도착했다는 즉은, 곧 시어머님이 오신다는 말이다.
9년 전, 출산을 하고 두 달 동안 친정엄마가 몸조리를 해 주시고 가셨다. 친정엄마가 가시자마자 시어머니는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우리 집으로 오셨다. 이때까지만 해도 시어머니와 한 집에 산다는 의미를 난 잘 몰랐다. 이렇게 오신 후 나는 일 년 반 동안을 시어머님과 한 부엌, 한 거실 그리고 두 남자(시어머님의 아들과 손자)를 공유했다. 시어머님은 분명 우리 집에 온 것인데, 어려운 것이 없었다. 부엌 살림살이며 마당에 놓이고 심어진 것들 모두 당신 방식으로 사용하셨다. 심지어 육아도 당신 방식으로 낚아채셨다. 그래 맞다. 낚아채셨다는 말이 맞다. 밤에 아이가 울면 정말 1초도 안되어 우리 방으로 건너오셔서 나에게 일언반구도 없이, 아이를 이불에 싸서 데려가셨다. '아이 우니까 내가 달래서 재워 보낼 테니 너는 좀 쉬어라'는 말만 해 주셨다면 고마움에 어쩔 줄 몰랐을 것이다. 정말 낚아채 듯 아이를 데려갔다.
나도 아침밥을 꼬박 먹고 다녔던 터라, 남편 아침을 항상 차려줬다. 하루는 마음이 너무 힘들어서 반은 일부러, 반은 힘들어서 남편 아침을 차리지 않았다. 부엌을 스스럼없이 드나드시니 '오늘 하루쯤 내가 안 하면 시어머님께서 하시겠지' 생각했다. 결국 남편은 아침을 먹지 않고 갔고, 남편 간 뒤에 시어머님께서 "남편 밥 굶기지 마래이" 하셨다. 습관적으로 며느리가 아침을 차지리 않는 다면 지켜봤다가 한마디 할 수 있다. 그런데 딱 하루, 그날 딱 하루 안 했다고 바로 남편 밥 굶기지 말라고 하시는 소리에...
아이를 놓고 도망가는 엄마들이 이해 갔다. 이때는 나도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드디어!!!!! 엊그제 시어머님께서 오셨다. 시어머님이 오신다고 하면 오시기도 전부터 마음에 쇳덩어리가 들어앉은 듯 무거워진다. 그러나 나도 이제 50이 넘었고, 시어머님도 팔순이 넘으셨는데 부드러운 마음으로 맞이해야지 하는 생각을 했다. 지금은 함께 살지 않은데, 고작 며칠 혹은 몇 주 함께 못 있으랴.(돌아가는 비행기 표 없이 항상 편도로 오시는 어머님)
그런데 어제, 내가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나를 부르신다. 뒤 돌아보니 손 수 뜨신 수세미 두 개를 내미시며, "그때 수세미 버린 거 미안하데이. 내가 열아홉에 시집와서 시어머니 구박받고 살면서 느이 시아버지는 항상 어머니편만 드는데 내가 마음 둘 데가 어디 있었겠나. 항상 남들한테 공격만 받고 살다 보이 남 헤아릴 줄 모르고 살아왔다." 그러시는 거다.
9년 전, 어머님과 함께 살았을 때 수세미 사건 보다 더 한 것들이 많아서 사실 수세미 사건은 잊고 있었다. 내가 수세미로 기름이 묻은 프라이팬을 닦았었다. 그랬더니 시어머니께서 수세미로 기름 묻은 걸 닦으면 어떡하냐며, 어제 꺼내 쓴 새 수세미를 내가 보는 앞에서 쓰레기통에 힘껏 내던지셨다. 그래 맞다 이런 일도 있었다. 그래도 사과해 주시니 고마웠다. 하지만 9년 전, 일 년 반 동안의 동거는 나의 트라우마가 되었다.
나의 시어머님은 서른아홉에 혼자되셨다. 사고로 남편을 잃고 삼 남매를 혼자 키우시며 어렵게 사셨으리라. 올해 여든 하나이신 어머님은 나보다 키가 크시고 몸무게도 더 나가신다. 이번 제주 방문은 장 담그는 미션뿐만 아니라 한라산도 올라가신단다. 함께 가자시지만 난,...
자신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