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2년 3월 초 윈게이트는 대령으로 승진하고 버마에 도착했는데 하필 이때는 영국군이 일본군에 끝없이 밀리며 속절없이 패퇴하던 시기였다. 그는 버마에 도착해서 인도까지 철수하는 동안 현지의 정글 지형과 일본군의 침투 전술을 면밀히 연구했다. 이후 윈게이트는 정글 상황과 자신의 경험을 결합하여 하나의 작전을 구상하게 되는데 바로 소수정예의 특수부대를 구성하여 버마의 적 후방을 교란하는 개념이었다. 이러한 작전을 추진하면서 윈게이트는 과거 고원 지대인 에티오피아에서 활약했던 ‘기드온 특공대’를 주요 벤치마킹 대상으로 삼았고 이것을 버마의 현실에 맞도록 변형하고자 했다. 우선 부대의 이름은 버마어로 사자를 뜻하는 친테(Chinthe: 버마 사원에 조각된 사자 모양의 수호신이다)에서 따왔는데 윈게이트가 발음을 잘못 알아듣고 친디트(Chindits)로 명명되었다. 첫 번째 친디트 부대는 77인도보병여단이었는데 1942년 여름에 인도 중북부 잔시(Jhansi)에서 창설되었다. 부대원들의 절반 정도가 영국인이었고 나머지는 인도인, 버마인 및 용맹함으로 유명한 구르카 용병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부대원들이 침투하여 싸울 곳인 버마의 정글은 수많은 해충과 동물, 썩은 늪지대 및 식수 부족으로 인간이 살기에 너무나도 어려운 곳이었다. 윈게이트는 부대원들을 버마와 유사한 인도의 정글로 보내 야영 및 훈련을 진행시켰는데 무려 참가자의 70% 이상이 이질, 말라리아 등 각종 질병에 시달렸다. 새로 부대원들을 보충받은 후 체력 훈련과 정글 적응 훈련을 병행하며 서서히 전투력을 높이고 있었다. 부대는 일반 보병은 물론, 빅커스(Vickers) 중기관총이나 소구경 박격포 및 대공포가 포함된 중화기 중대, 통신대 및 의무대 등이 포함되었고 영국 공군의 지원을 원활히 하기 위해 일부 공군 인원들이 배속되었다. 이들은 은밀히 적 후방에 침투하여 일본군의 통신 및 보급선을 공격하고 게릴라전을 수행할 예정이었다. 적진 한가운데인지라 포병의 역할은 영국 공군이 맡으며 지원 사격을 할 것이었다. 개인별 짐은 리엔필드 소총(또는 스텐건) 및 야전삽, 침구류 등 기본 무기/장구류 외에 탄약 및 휴대용 식량 등을 적재하면 거의 30kg 이상이었다. 무거운 짐 수송을 위해서는 노새를 동원했는데 노새는 수송은 물론 비상시 병사들의 식량으로서 중요한 단백질 공급원이 될 수도 있었다. 더불어 구르카 용병들은 적에게는 악몽과 같았던 고유의 쿠크리(Kukri) 단검을 휴대했고 일본군의 목을 베기를 고대했다. 드디어 해가 바뀌면서 출정의 날이 정해졌는데 1943년 2월 8일이었다.
원래 친디트 부대원들은 북부 버마의 다른 작전에 투입되어 보병 부대원들과 함께 전선에 배치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작전이 취소되었고 이후 윈게이트가 적극적으로 웨이벨 장군에게 이들을 활용할 특별한 방법을 어필하여 결국 창설 의도대로 적진 한가운데 투입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윈게이트를 포함한 3천 명의 친디트 부대원들은 7개의 부대로 나뉘어서 버마-인도 국경 바로 동쪽에 있는 친드윈(Chindwin) 강을 은밀히 도강했다. 드디어 본격적으로 일본군 점령 지역으로 침투하는 롱클로스 작전(Operation Longcloth)이 개시된 것이었다. 7개의 부대는 두 개의 그룹으로 나뉘었는데 북부에 주력인 5개 부대(2000명의 병사와 850마리의 노새)와 남부에 다른 2개 부대(1000명의 병사와 250 마리의 노새)를 배치했다. 각 그룹의 부대는 독립적인 이동과 행동의 재량권을 부여받았는데 일본군이 그들을 찾기 어렵게 하기 위한 방안이었다. 남부에 배치된 2개 부대는 자신들이 주력이라고 일본군을 속이기 위해 일부러 대낮에 공수 보급을 실시했다. 일본군은 처음에 이들이 단순한 소규모 정찰대 수준의 병력일 것으로 판단했다. 하지만 이들이 여러 차례 교전을 거친 후에 철로 및 교량을 연쇄적으로 파괴하는 것을 본 후 여단 규모 이상임을 알아차렸고 즉시 3개 연대를 동원하여 친디트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북쪽으로 간 주력 5개 부대는 수백 개의 철로를 파괴했는데 사실 일본군은 부서진 철로를 일주일 이내에 신속히 복구했고 이들의 활약은 전반적인 철도 운행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디트는 점점 더 동쪽으로 이동하며 버마를 휘저었고 파괴 활동을 지속했다. 이것은 일본군에게 상당한 스트레스로 작용했는데 자신들이 더 이상 ‘버마 정글의 지배자’가 아님을 깨닫게 해 주었다.
출발 한 달 반이 지난 3월 24일에 윈게이트는 부대들의 귀환 명령을 내린다. 동쪽으로 갈수록 병사들이 지쳐갔고 보급에 한계가 왔기 때문이다. 각 부대의 위치에 따라 500~800km를 행군해야 했는데 문제는 귀환길에 강을 두 개나 건너야 했으며 독기 어린 일본군이 이를 숨어서 지켜보고 있었다. 귀환길은 최초에 왔을 때보다 훨씬 더 힘들었다. 어떤 부대는 북쪽의 중국으로 들어갔고 긴급한 공수 및 부상자 수송을 위해 정글에 임시로 비행장을 만든 부대도 있었다(윈게이트는 부상자는 인근 버마인 마을에 두고 간다는 냉혹한 명령을 내렸지만 당연히 잘 지켜지지 않았다). 엉성하고 울퉁불퉁한 비행장에 허드슨 수송기가 착륙하여 부상 정도가 심한 병력들을 후송하기도 했다. 종국에는 많은 짐들을 유기하고 노새도 버리며 최소한의 무기와 식량만 휴대하며 이동했다. 이렇게 험난한 상황에서 이동했지만 4월 말에는 윈게이트를 포함한 대부분의 친디트 부대들이 친드윈 강을 넘어 인도로 복귀했다. 최초에 출발한 3천 명의 병력 가운데 정확히 2182명이 귀환했는데 818명은 정글에서 전사하거나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다. 또한 의무대의 분석에 따르면 귀환병 중 다시 전투 투입이 가능한 인원은 600명에 불과했다. 무려 삼분의 일이 희생된 엄청난 피해를 입었지만 윈게이트는 나름 자신에 차 있었다. 우선 적진에 들어가 3개월 이상을 공수보급을 통해 활동하며 전투와 파괴 작전을 수행한다는 ‘장거리 침투 이론’이 증명되었던 것이다. 사실 가장 큰 소득은 병사들에게 일본군이 더 이상 무적이 아니며 얼마든지 싸울만한 상대라는 자신감을 준 것이었다. 더불어 정글에서의 전투와 생존 경험을 얻었다는 것 또한 큰 소득이었다. 인도의 영국군은 이를 적극적으로 선전하여 전반적인 아군의 사기를 올리고자 했다. 자신감을 얻은 윈게이트는 이후 더욱 큰 규모로 다시 침투하려는 계획을 세우게 된다. 한편 영국군의 불의의 기습을 당한 일본군은 근심의 싹을 잘라내기 위해 인도를 직접 공격할 계획을 세우게 된다.
다시 정글로!
인도 랄라갓(Lalaghat)에서 ‘목요일 작전(Operation Thursday)’을 위해 출격 대기중인 친디트 부대원들
인도로 돌아온 윙게이트의 활약에 가장 감명을 받은 사람은 다름 아닌 처칠 수상이었다. 그 자신이 보어 전쟁 당시 종군기자로 참여했다가 포로로 잡힌 후 탈출한 이력이 있던 처칠은 윈게이트의 모험담에 열광했다. 처칠은 8월에 윈게이트를 다우닝가의 수상 관저로 불러 식사를 같이했는데 그는 수상에게 자신의 장거리 침투 계획을 신나게 설명할 수 있었다. 이후 윈게이트는 캐나다 퀘벡에서 열린 연합군 수뇌부 회의에도 처칠과 동행했고 자신의 향후 계획을 공론화했다. 더불어 소장 계급장을 달면서 전공을 인정받게 되었다. 윈게이트가 이렇게 대외적으로 영웅이 되어 있는 동안 인도에 있던 웨이벨 장군은 또 하나의 친디트 부대를 만들 계획을 세웠고 곧 111인도보병여단을 창설한다. 그는 두 개의 친디트 부대를 적진에 투입하여 번갈아 가며 원정을 보낼 구상을 하고 있었다. 이 부대의 지휘관은 웨이벨이 좋아했던 거구의 월터 랜테인(Walter ‘Joe’ Lentaigne)이었는데 1942년 초의 버마 후퇴 당시 일본군과 직접 백병전을 벌이며 싸운 것으로 유명한 장교였다. 1943년 9월 퀘벡에서 돌아온 윈게이트는 처칠의 적극적인 지지 속에 친디트를 전적으로 지원하는 미 공군 코만도 부대의 항공기도 약속받았다.
신설된 친디트 부대는 인도 북부 괄리오르(Gwalior)에서 훈련을 받으며 정글에서의 야영, 이동 및 폭파 등을 집중적으로 교육받았다. 훈련 중에는 정글 속에서 최소한의 식수로 취식하고 생활하는 것과 화장실 배변을 처리하고 공중 투하된 보급품을 신속히 내리는 방법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처음에 도시에서 자란 이들이 많은 영국인들은 이러한 훈련에 힘들어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원시인들처럼 사는데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병력 중에는 서아프리카의 영국 식민지에서 온 나이지리아인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정글의 가혹한 환경에 신속히 적응하여 전투력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러는 동안 2차 친디트 부대는 6개 여단 규모로 확장되었고 규모가 커질수록 계획은 수립과 수정을 반복했다. 작전의 큰 목표는 버마-중국 국경의 미군 조지프 스틸웰(Joseph Stilwell) 장군 부대와 대치하던 일본군의 통신과 보급을 차단하여 손과 발을 묶는 것이었다. 이를 수행하기 위한 작전 내용은 1차 원정과 비교하여 많은 변화가 있었는데 우선 적진 한가운데의 개활지에 병사들이 수송기나 글라이더로 투입된다는 점이었다. 이후 개활지를 활주로를 확장하고 이 주변을 요새화된 진지로 만든다는 획기적인 아이디어가 작전으로 수립되었다. 영국군은 세 개의 요새 진지를 만들 계획이었고 각자 피카딜리(Piccadilly), 브로드웨이(Broadway), 초우링히(Chowringhee)라는 암호명을 붙였다(암호명은 런던, 뉴욕, 캘커타의 번화가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친디트의 신속한 행동과 공군의 지원을 통한 지속적인 항공보급에 달려 있었다.
1944년 2월 5일 선발대인 버나드 퍼거슨(Bernard Fergusson) 준장의 16 여단이 출발했다. 이들은 선발대로서 적들이 오지 않을 가장 험한 육로로 은밀히 침투하여 북부 버마의 인다우(Indaw)를 향해 전진했다. 선발대가 악전고투를 겪으며 경사진 산등성이를 오르고 있는 동안 하늘을 통해 공수될 나머지 주력 부대들의 준비도 마무리되어가고 있었다. 드디어 3월 5일 저녁 C-47 수송기와 하드리안 글라이더의 대부대가 인도 북부 랄라갓 비행장에서 하나, 둘 출발하기 시작했다. 작전 개시 전에 영국군은 피카딜리 일대에 버마 농부들이 널어놓은 티크 목재 더미가 있는 것을 발견했고 브로드웨이 쪽으로 전력을 집중하기로 했다. 브로드웨이로 날아가는 수송기는 각자 두 대의 글라이더를 긴 줄과 짧은 줄로 견인하며 가고 있었는데 긴 줄의 글라이더가 흔들리며 비행기가 추락할 위험에 처하기도 했다(통상 수송기는 글라이더 한 대만 견인하는데 빠른 진지 구축을 위해 두 대를 견인한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저녁부터 브로드웨이 지역에 77 여단의 글라이더들이 순차적으로 착륙했는데 야간인 데다 울퉁불퉁한 지형 및 숨겨진 목재더미들로 인해 글라이더끼리 서로 충돌하는 아수라장이 펼쳐졌다. 이 과정에서 영국군 30명이 사망하게 된다. 하지만 정신을 차린 병사들은 신속히 움직이며 잔해를 치우며 후속 글라이더들이 착륙할 수 있게 최선을 다했다. 다음날 아침이 되었는데 다행히도 일본군은 보이지 않았다. 병사들은 글라이더에서 각종 장비를 꺼내며 요새를 구축하기 시작했는데 제일 앞에는 이중 철조망을 쳤고 이후 참호 및 기관총좌와 벙커까지 갖추며 점차 완벽한 요새의 모양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공병들과 함께 수송된 미니 불도저는 잔해를 치우거나 활주로를 확장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3월 6일에도 초우링히에도 병사들이 공수되어 거점이 마련되었다. 이 모든 과정에서 수송기들이 총 600회의 출동을 통해 9000명의 병사들을 적지로 투입했다. 3월 12일에는 선발대인 16 여단도 애버딘(Aberdeen)이라는 신규 거점을 만들라는 지시를 받아 즉시 진지 구축에 착수하게 된다. 정글에 세워진 영국군의 트로이 목마는 그리스 군의 그것과는 달리 하나만이 아니었고 점점 커져만 갔다. 당시 일본군은 인도의 임팔(Imphal)과 코히마(Kohima) 쪽으로 진격하며 영국군을 압박했는데 후방에 다시 나타난 친디트를 통해 전방의 전투 수행에 상당한 지장을 받았다.
정글 요새 구축 후 계획대로 주변 일본군을 공격하고 이들의 통신과 보급을 차단하는 작전이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 이 와중에 윈게이트는 공군과 공중 보급에 대한 협의를 위해 임팔로 날아갔는데 돌아오는 길인 3월 24일에 그가 탑승했던 B-25 폭격기가 정글에 추락하게 된다. 탑승객 전원이 사망하게 되었는데 작전이 한참 진행되는 과정인지라 후임자에 대한 빠른 의사결정이 필요했다. 윈게이트의 상관이었던 14군 사령관 슬림 중장은 111여단장인 렌테인 준장을 윈게이트의 후임으로 임명하고 작전을 이어 나간다. 이 즈음 인도의 임팔 쪽 전황이 긴박하게 되어 친디트 23여단도 이곳으로 급파되었다. 23 여단은 게릴라 전술을 통해 일본군을 괴롭히면서 보급선을 타격했고 이들을 거의 아사 직전의 상태로 몰게 되었다. 일본군은 무려 5만 5천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사실상 이때 버마 전선의 운명이 결정되었다. 한편 버마에 남겨진 친디트 부대들은 5월 중순부터 미군인 조지프 스틸웰 중장의 휘하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스틸웰은 친디트에 대해 그다지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친디트가 요새에서 이동하여 일본군 진지를 점령하도록 지시했다. 하지만 전차도 포병지원도 없는 친디트는 비록 적을 제압하기는 했지만 많은 사상자를 내게 된다. 친디트 부대를 단순한 보병으로 보았던 스틸웰은 부대의 활용방법에 대해 윈게이트와는 상당히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한편이라와디 강의 동쪽에서는 친디트 111 여단이 바모(Bhamo)와 미치나(Myitkyina) 주변에서 일본군을 괴롭혔다. 버마에서 친디트는 끊임없이 사람을 공격하며 성가시게 구는 모기때와 같았다. 6월에 친디트 77 여단은 스틸웰로부터 북부 버마의 일본군 거점인 모가웅(Mogaung)을 점령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3주 이상의 혈투 끝에 이를 점령한다. 이것이 버마에서 벌어진 친디트의 사실상 마지막 주요 전투였다.
전설에서 부활하다
영국 런던에 있는 친디트 기념비
1944년 8월에 친디트는 버마를 떠나 인도로 완전히 돌아오게 된다. 2차 원정 기간 동안 1396명이 전사하고 2434명이 부상했는데 근 원정군 병력의 40% 가까이 되는 엄청난 수치였는데 이전 해의 1차 원정보다 사상자 비율이 높았다. 돌아온 이후 너무 지친 나머지 다시 임무로 복귀할 수 없게 된 사람도 많이 있었다. 영국군 내에서 부대의 효용에 대한 논란이 일게 되었는데 슬림 중장을 비롯한 고위 장교들도 똑같은 의문을 품게 된다. 당시 영국군은 4년 이상 해외에 근무한 군인을 본국으로 돌려보내야 하는 규정이 있었고 이를 빌미로 친디트 소속 영국인들을 속속 귀국시킨다. 더불어 잔존 부대원들은 인도의 다른 사단으로 전출되었고 1945년 초에 친디트는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고인이 된 윈게이트가 보았다면 상당히 통탄하게 여겼을 일이었다.
45년 후인 1990년 10월 런던의 영국 국방부 청사 옆에 한 기념비 제막식이 열리게 된다. 행사는 당시 여왕의 부군이었던 필립 공이 직접 참석할 정도로 의미 있게 다루어졌는데 기념비는 친디트 부대와 이를 창설한 오드 윈게이트 장군의 공적을 기리는 것이었다. 이후 30년이 더 흐른 2015년에 77 여단 친디트 부대가 영국군에 다시 부활하게 된다. 이들에 대한 평가는 사람마다 달라지기는 한다. 다만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영국이 아시아에서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친디트의 예상치 못한 적 후방 침투가 일본군의 전략에 영향을 끼쳤다는 점이다. 일본군은 자신들 후방에서 활동하는 친디트 부대에 강하게 자극받았는데 이들의 위협을 근본적으로 제거하기 위해 감행한 무모한 인도 공격에서 무참히 패배했고 이후 버마에서 전쟁의 주도권을 내주었다.
친디트는 인간의 역사가 “도전에 대한 응전”이라는 토인비의 말을 다시 한번 상기하게 해 주며 오늘날 우리에게 혁신과 창의성에 대한 많은 영감을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