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1월과 2월에 전세계인의 눈과 귀는 베트남에 쏠려 있었다. 당시 베트남은 여느 동아시아 문화권 국가처럼 구정 연휴 기간 중이었는데 베트콩 측이 소위 ‘구정 공세’를 통해 남베트남 일대에서 대규모 공격에 들어갔던 것이었다. 베트콩들은 공세 준비를 위해 은밀히 병력을 침투 시켰고 무기를 반입했다. 그리고 드디어 1월 30일이 되자 구정 때 실시하는 폭죽놀이를 신호로 일제 공격이 시작 되었다. 수도인 사이공 (현 호치민시)을 비롯 후에, 다낭, 나트랑 등 남베트남 전역에 걸쳐 치열한 교전이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졌다. 당시의 이러한 상황은 TV 카메라를 통해 미국을 비롯한 전세계 사람들에게 생중계 되었는데 특히, 난공불락이라 믿었던 사이공의 미국 대사관조차 베트콩에 공격을 당하고 사람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며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이때 전세계 사람들에게 진정한 충격을 준 사건은 따로 있었다. 바로 ‘사이공식 즉결 처형’이라는 제목의 사진으로 잘 알려진 한 장의 보도 사진으로서 한 남베트남군 장교가 민간인 복장의 남성을 권총으로 살해하는 장면이 포착된 사진이었다.
해당 사진은 미국의 AP 통신 소속 사진기자인 에디 애덤스가 촬영한 것으로 38구경 리볼버 권총을 휘두르는 잔인한 살인자는 남베트남군 정보국장이자 경찰청장인 ‘응우옌 응옥 루안’ 장군이었다. 이 사진은 언론에 공개되는 즉시 전세계적인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특히, 반전 시위가 격화 되고 있던 미국에서 그 파급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사람들 눈에는 잔인하고 피에 굶주린 남베트남의 장교가 무고한 민간인을 아무런 설명이나 재판도 없이 막무가내로 죽이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이 사진은 미국의 반전 시위대에게 ‘인기 없는 전쟁’에 대한 반대를 가속화 할 수 있는 최고의 명분을 주었다. 미국 내 반전 여론이 급격히 증가하기 시작했고 징병 거부 및 “베트남에서 발을 빼라”는 공화당 (야당)을 비롯한 정치권의 요구도 거세졌다. 이러한 반전 목소리는 구정 공세 시 미국 및 연합국 병사들이 4천명 이상 사망하자 더욱 더 높아지고 있었다. 한편 사진 기자인 에디 애덤스는 이 사진으로 그 해 퓰리처상 보도사진 부문을 수상하는 영광을 얻게 되고 세계적인 유명인사가 된다. 반면 잔인한 살인자였던 ‘응우엔 응옥 루안’은 전세계적인 비난을 받고 이후 베트콩의 테러에 의해 다리가 절단 당하는 부상을 입는다.
1975년 4월 베트남 패망 시 그는 극적으로 탈출하여 미국에 망명하게 되는데 과거의 잔인한 사진에 대한 잔상이 강했던 탓인지 미국 대중으로부터 조차도 숨어 지내야 했다. 베트콩은 구정 공세에서 4만 5천명 이상의 전사자를 내며 전술적으로 괴멸적 타격을 있었는데 이 사진 한 장으로 그들이 추구하는 전략적 목표 이상을 얻었다.
하지만 이 사진에는 상당한 반전이 있었다. 처형 당한 민간인 복장의 ‘응우엔 반 렘’은 사실 베트콩이었다. 그는 응옥 루안에게 처형 당하기 전에 사이공 일대에서 강간 및 살인을 일삼던 인물이었다. 특히 구정 공세 당시 남베트남군 장교를 살해하고 그의 부인, 다섯 아이들과 팔십 노모까지 일가족을 잔인하게 죽였다. 그 가족 중 9살 아이 한 명만 겨우 살아 남았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간 그 아이가 최초의 베트남계 미 해군 제독이 된 후안 응우옌이다.) 이러한 극악무도한 살상을 민간인 복장으로 신분을 위장한 체 행한 것에 대해 응옥 루안은 상당한 분노를 느꼈다고 한다. 그는 이러한 살인마는 존중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고 즉시 반 렘을 처형 하게 된 것이었다. 사진을 찍은 에디 애덤스도 현장에서 시민들이 죽은 반 렘을 살인자로 욕하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하지만 이러한 이면의 배경은 대중에게 충분히 설명되지 않았고 응옥 루안은 잔인한 살인마의 멍에를 지고 살아가게 되었다.
1978년 미국 하원에서는 베트남 망명객 중 전쟁 범죄자들을 확인하여 미국에서 추방 하려는 조사를 진행했다. 응옥 루안도 이러한 명단에 포함 되었고 조사관들은 에디 애덤스에게 이에 대한 증언을 해줄 것을 요청한다. 하지만 응옥 루안에 대해 마음의 빚을 지고 있던 애덤스는 그에 대한 반대 증언을 거부하고 오히려 그를 두둔하는 발언을 하게 된다. 이를 통해 응옥 루안은 미국에 계속 머물 수 있게 되었고 워싱턴 D.C 외곽에서 작은 피자가게를 운영하며 삶을 영위해 간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주위 사람들이 그를 손가락질했고 ‘살인자 경찰 (Killer cop)’로 매도했다. 그는 1998년 7월에 많은 회한을 남긴 채 암으로 사망한다.
그의 죽음에 부쳐 애디 애덤스는 ‘타임지’에 조사를 기고하게 되는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장군 (응옥 루안)은 그 베트콩을 죽였고 나는 카메라로 그를 죽였다. 카메라는 최고의 무기이지만 때로는 조작 없이도 거짓말을 할 때도 있다.” 이 조사야 말로 그가 찍은 사진에 대한 가장 적절한 설명이 아닐 수 없다. 정적인 사진은 움직이는 영상보다 더욱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고 때로는 진실을 왜곡하고 기도 한다. 이러한 일들은 5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벌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