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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호 May 01. 2024

1. 추운 나라에서 싸웠던 남국의 사나이들(下)

친독 스페인 지원병, 블루 디비전 (1941-1945)

진격 중인 블루 디비전 병사들

악전고투의 연속

스페인 병사들은 독일군 제38군단 소속으로 노브고르드를 중심으로 볼코프강 안부터  일멘강 우측까지 약 50km 섹터를 담당했다. 드디어 10월 14일에 첫 번째 전투가 벌어졌는데 소련군은 몇 개월 전의 무기력한 모습에서 서서히 강력해지고 있었다. 최초의 각종 교전에서 스페인 병사들은 나름 소련군의 맹공을 막아내며 전장에 적응하는 중이었다. 10월 18일에 블루 디비전 269 연대가 주축이 되어 볼코프강 동안으로 기습 도하를 하였고 소련군의 포병 관측소를 점령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교두보를 확보한 269 연대는 계속 공격하여 인근의 여러 마을도 추가 점령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후 소련군이 재차 반격을 하는 가운데에 양측의 사상자도 증가했는데 소련군은 특히 맹렬한 포병 화력을 사용하여 스페인 병사들의 희생을 강요했다. 더불어 11월 초가 되자 소련군보다 더 무서운 적이 다가오고 있었다. 130년 전 나폴레옹을 괴롭혔던 바로 그 러시아의 동장군이 예년보다 빠르게 찾아온 것이었다. 아직 하계 군복만으로 버티고 있던 스페인 병사들에게 동상 환자가 속출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다른 독일군들처럼 살기 위해 소련 민가에서 빼앗은 테이블보와 천 쪼가리 등을 닥치는 대로 옷 안에 끼워 입으며 버텼다. 영하 30도의 극도로 추운 날씨 속에 보급도 충분치 않은 가운데 소련군의 본격적인 반격을 통해 스페인 병사들은 물론 독일군도 극도로 피폐해져 갔다. 1941년 말까지 스페인 병사들의 피해는 블루 디비전 사단 전병력의 30%에 달하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해가 바뀌어 1942년이 되었지만 상황은 호전되지 않았고 1월 7일 이후 소련군은 공세의 수위를 더욱 강화했다. 소련군의 목표는 사방에서의 압박을 통해 포위된 레닌그라드로 가는 길을 뚫는 것이었다. 전투가 가열되는 가운데 서쪽의 일멘 호수 일대에 독일군 500명 이상이 소련군에 포위되는 상황이 발생했다. 스페인 병사들은 신속히 이동하여 이들을 구출하라는 명령을 받았는데 스키부대까지 동원하여 얼어붙은 일멘 호수를 돌파하고자 했다. 전투는 극히 고통스러웠는데 이때의 날씨는 무려 영하 50도까지 떨어졌다. 스푼을 입에 대면 바로 얼어붙어서 떼어내고자 하면 살점이 뜯기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소련군과 전투하는 가운데 부상자 외에 100여 명 이상의 동상 환자들이 발생했고 양쪽 다리를 잘라야 하는 사람들도 수십 명에 달했다. 하지만 11일간의 사투를 거치면서 스페인 병사들은 한걸음, 한걸음 전진하며 마침내 포위된 독일군과 연결되었고 이들을 구원해 냈다. 이러한 일련의 전투를 통해 스페인 병사들을 ‘열등한 라틴계 집시’ 정도로 치부했던 독일군의 평가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32명의 블루 디비전 병사들이 철십자훈장을 수여받았는데 이는 북부집단군 소속 부대들 중 최고의 비율이었다.


1941년과 42년 사이의 겨울 전투가 끝나고 양 측 모두 전열을 재정비하기 시작했다. 다시 한번 하계 공략을 통해 최종적 승리를 이루고 싶었던 히틀러는 이 해의 커다란 전략적 목표를 ‘남부 코카서스의 유전 지대’로 정했다. 더불어 스페인 병사들이 배치되어 있던 레닌그라드 일대의 포위도 끝내고 싶어 했다. 이들은 8월 초 주둔지인 노보그라드에서 공격 준비를 위해 열차를 타고 북쪽으로 이동하게 된다. 스페인 병사들이 담당하게 될 섹터는 레닌그라드와 모스크바를 연결하는 철도가 지나가는 푸시킨 (Pushkin), 파블롭스크 (Pavlovsk) 및 크라스니-보르 (Krasny-Bor) 등의 30km에 달하는 지역이었다. 하지만 8월 27일에 소련군이 역으로 레닌그라드를 해방하기 위해 도시의 남쪽인 므가 (Mga)에서 공격을 개시했고 독일군 병사들은 이들을 결사적으로 막아냈다. 독일군은 공격을 준비하다가 오히려 역습을 당한 상황이었다. 비록 소련군은 막아 냈지만 이 과정에서 독일군은 3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북부집단군에는 더 이상 레닌그라드로 진격할 여력이 사라졌다. 그렇게 양 측은 난타전을 펼친 권투선수들처럼 숨을 거칠게 쉬며 서로 노려보고 대치 중이었다. 스페인 병사들도 이 과정에서 참호에 틀어박힌 체 방어 태세를 취했는데 연일 계속되는 소련군의 포격으로 사상자가 점점 늘어가기 시작했다. 양측의 불안한 교착 상태가 1942년 말까지 이어졌다.

이러한 와중에 프랑코는 능력은 뛰어나지만 지나치게 친독적이라고 평가받았던 무뇨스 그란데스 사단장을 12월에 스페인으로 귀환 조치했다. 총통인 프랑코는 군인인 동시에 무엇보다도 정치가였다. 비록 그가 심정적으로는 독일 편이었지만 대외적으로는 여전히 중립국이었던 스페인의 지도자로서 1942년 말 독일의 패배는 향후의 전략적 방향을 다시 가늠하게 만드는 나침반이었다. 이러한 시기에 지나치게 친독일적인 무뇨스 그란데스의 성향은 스페인에 부담이 되었던 것이다. 그의 후임으로 프랑코의 톨레도/사라고사 사관학교 친구이자 내전 시대의 용장인 ‘에밀리오 에스테반 인판테스 (Emilio Esteban Infantes, 훗날 그는 스페인 육군참모총장이 된다.)’가 임명되었다. 비록 그가 스페인 내전에서 명성을 떨치기는 했지만 러시아의 전장은 훨씬 더 규모가 컸고 가혹했다. 독일군이 에스테반 인판테스의 충성심과 지휘 능력에 대해 반신반의하는 가운데 그는 재빨리 전장 상황을 파악해야 했고 자신의 전략적인 역량을 보여줘야 했다. 그리고 그 시기가 찾아오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크라스니-보르 전투의 한 장면

전설의 탄생: 크라스니-보르 전투

1942년 11월 19일 남쪽의 스탈린그라드에서 엄청난 포성이 울리며 소련군의 전면적인 반격이 개시되었다. 소련군은 ‘천왕성 작전 (Operation Uranus)’을 통해 스탈린그라드의 독일 제6군을 역포위 하였고 전세를 일거에 뒤집으려 하였다. 스탈린그라드의 포위가 점차 소련군의 승리로 굳어가고 있을 때 이들은 북쪽에서도 맹공을 가하기 시작했다. 바로 레닌그라드 일대에서 도시를 구하기 위한 일련의 작전을 개시한 것이다. 소련군은 1943년 1월 12일 ‘불꽃 작전 (Operation Iskra)’을 통해 스페인 병사들이 있던 18군 지역을 난타하기 시작했다. 볼코프 전선군과 레닌그라드 전선군이 동원되어 보름 이상 계속된 전투에서 소련군은 가까스로 라도가 호수 남쪽의 독일군을 몰아내며 레닌그라드로 향하는 좁은 통로를 만들어 냈다. 1년 4개월 만에 레닌그라드가 외부와 연결된 것이었다! 소련군으로서는 대단히 자랑스러운 업적이었지만 (주코프는 이 공로로 소련방 원수로 승진했다.) 문제는 통로의 폭이 10km 정도로 좁았고 남쪽 언덕의 독일군 포대에 정면으로 노출되어 극도로 위험했다는 점이었다. 소련군은 레닌그라드의 완전한 해방을 위한 방법을 모색했고 그 결과 2월 초에 ‘북극성 작전 (Operation Polyarnaya Zvezda)’이라는 대규모 공세를 다시 한번 준비하게 된다. 스페인 병사들이 전설을 쓰게 된 전투가 이제 막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2월 10일 정확히 새벽 6시 45분에 레닌그라드 남쪽 독일군 진지 쪽으로 엄청난 소련군의 포격이 가해졌다. 포격과 함께 진행된 카츄샤 로켓 발사기의 찢어질듯한 굉음이 스페인 병사들이 있던 최전방 일대를 뒤흔들었다. 포격은 점점 더 후방까지 떨어지면서 블루 디비전이 위치했던 ‘크라스니-보르’ 일대를 초토화시켰다. 두 시간 반 정도 이어진 포격이 멈추자 전차를 앞세운 소련군 55군 소속 3개 사단이 공격을 개시했다. 소련군 55군의 목표는 남동쪽으로 진격하여 반대쪽에서 공격하는 자국 54군과 모스크바로 향하는 도로상에 위치한 또스노 (Tosno)에서 합류하여 독일군을 포위, 섬멸하는 것이었다. 맹렬한 붉은 군대의 공격에 여러 스페인 병사들의 진지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많은 경우에 있어 스페인 병사들은 도망가지 않았고 진지와 벙커에서 적을 막다가 최후를 맞이했다. 이들은 특유의 전기톱 소리를 내는 MG-42 기관총을 쏘아대며 적을 막았지만 대전차 화기가 충분치 않았던 탓에 전진하는 T-34/76 전차에 그대로 유린당했다. 한 전투중대는 시내의 ‘10월 철도역’을 방어 중이었는데 중대원이 40명 이하로 줄어들 정도로 극심한 피해를 입으면서도 후퇴하지 않았다. 결국 3시간 정도 이어진 전투에서 스페인 병사들은 철도역을 내주었고 시 전역을 둘러싼 소련군에 포위되었다. 정오 경 소련군은 상부에 크라스니-보르를 점령했다고 보고했다. 스페인 병사들의 운명은 끝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소련군의 보고는 다소 성급했는데 스페인 병사들은 여전히 도시의 남쪽과 서쪽의 이조라 강 일대에서 저항 중이었다. 이들은 전차에 맞서 ‘몰로토프 칵테일 (핀란드인들이 겨울전쟁 중 전차 공격용 화염병을 당시 소련 외상 몰로토프의 이름에 빗대어 부른 것에서 유래함)’을 던지며 분전하고 있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전투의지가 강해졌다. 이 와중에 독일 공군의 폭격기들이 지원 출격을 가하기도 했고 18군 예하 다른 부대들이 스페인 병사들을 돕기 위해 투입되었다. 소련군도 사력을 다해 재차 공격을 하였으나 착검 상태에서 죽음을 각오하고 달려드는 스페인 병사들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2월 13일이 되자 소련군의 전력은 거의 40% 이상이 피해를 입게 되었고 보유한 모든 전차를 상실하여 더 이상의 공격을 감행할 상황이 아니었다. 이후 가까스로 독일군 212 사단과 연결된 블루 디비전은 마침내 구출될 수 있었다. 총 5,900명의 스페인 병사들이 전투에 참여했는데 최종 70% 이상이 전사, 부상 및 실종될 정도로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스페인 병사들은 병력 비 7대 1의 압도적인 열세 속에서도 위치를 사수했고 결과적으로 레닌그라드의 완전한 해방을 1년 로 미루게 했다. 이들은 독일에게는 가장 든든한 동맹군이었고 소련으로서는 지독히도 저주스러운 존재였다.


마침내 조국에 돌아온 블루 디비전 병사들 (1954)

오디세우스의 길었던 여정

크라스니-보르에서 격전을 치른 스페인 병사들은 부대를 재편했고 보충병을 받으면서 다시 레닌그라드를 포위하는 전선을 유지하고 있었다. 1943년의 하계 공세는 남부의 ‘쿠르스크 돌출부’에 집중되어 있었고 북부집단군 지역은 상대적으로 소강상태였다. 비록 소강상태라고는 하지만 양 측은 수시로 정찰과 포격을 감행하며 상대방의 희생을 야기했다. 8월 말에 쿠르스크 전투가 독일군의 패배로 끝난 이후 많은 사람들이 독일이 전쟁에서 패전할 것으로 예측했다. 실제로 독일군은 이후 전쟁의 주도권을 상실했고 끝없는 후퇴의 길에 오르게 된다. 이러한 상황을 우려와 함께 냉정한 눈으로 쳐다보는 외부인들이 있었는데 스페인의 프랑코도 그중의 한 명이었다. 프랑코는 독일이 전쟁에서 질 것으로 보았고 동시에 연합군 측으로부터 블루 디비전을 철수시키라는 노골적인 압박을 받기도 했다. 결국 1943년 10월 12일에 본국으로 귀환하라는 프랑코의 공식적인 명령이 병사들에게 하달된다. 더불어 이날 프랑코는 친독파 외무장관이던 처남 수녜르를 경질했다. 후임에는 보다 연합국에 가까운 성향의 프란시스코 조르다나 (Francisco Gómez-Jordana Sousa)가 임명되었다.


블루 디비전은 귀환 후 공식적으로 해체되었지만 소련 전선에는 여전히 귀환을 거부하는 2천여 명의 스페인 병사들이 있었다. 이들은 강성 반공주의자들이었고 끝까지 소련군과 싸우기를 원했다. 프랑코에게 이들의 존재는 블루 디비전의 철수로 화가 난 히틀러를 미약하나마 달래주는 구실이 되었다. 남게 된 병사들은 레닌그라드 인근의 독일군 121 사단 소속으로 계속 전투에 참여했는데 블루 레지온 (Legion Azul)으로 불리었다. 1944년 1월에 소련군은 레닌그라드를 해방하게 되는데 스페인 병사들은 많은 사상자를 낸 끝에 발트해 연안으로 후퇴하게 된다. 이 와중에 연합군 측은 스페인 정부에 남아있는 모든 스페인 병사들의 귀환을 요구한다. 더 이상 연합국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었던 프랑코는 1944년 3월에 남아있는 모든 스페인 병사들의 귀국을 명령한다. 하지만 이러한 명령에도 현지에 남아서 전투를 이어간 삼백 명의 병사들이 있었다. 이들은 벨기에의 왈롱인으로 이루어진 무장친위대 28사단에 배속되었고 동부 독일과 베를린에서의 공방전에도 참여하면서 제3 제국과 운명을 함께했다. 이들 대부분은 전투 후 소련군의 포로가 되었고 그렇게 스페인 병사들은 세상으로부터 잊히게 되었다.


1954년 3월 26일 소련의 오데사 항구에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고대 여왕의 이름을 딴 그리스 여객선 세미라미스호 (Semiramis)에 승선했다. 승선객 들은 한눈에 보아도 지치고 힘들어 보이는 286명의 스페인인들이었는데 여러 이유로 소련에 의해 억류되고 있던 중 고국으로 귀환하게 된 사람들이었다. 이들 중에는 스페인 내전 시 공화파에 의해 소련에 보내졌던 사람들이나 피난민도 있었는데 대다수인 229명은 블루 디비전과 블루 레지온 소속으로 소련군에 포로가 되었던 스페인 병사들이었다. 사실 소련은 그때까지 스페인 출신 포로의 숫자나 존재에 대해 외부에 알리지도 않았다. 소련군은 극도의 반공주의 성향을 보였던 스페인 병사들을 증오했고 끝까지 석방하지 않았는데 1953년 3월에 스탈린이 죽고 나서야 병사들의 송환 얘기가 오고 갈 수 있었다. 당시 스페인은 소련과 외교 관계가 없었기에 제3 국인 프랑스 적십자사가 개입하여 이들의 석방을 이끌어 낼 수 있었다. 무려 전쟁이 끝난 지 9년 만의 일이었다. 세미라미스호는 오데사를 떠나 스페인의 바르셀로나로 향하는 여정을 시작했는데 다음 날인 27일에 지중해로 가는 통로인 터키 이스탄불에 기항했다. 이곳에는 이들을 취재하려는 스페인과 전 유럽에서 온 취재진으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어리둥절한 스페인 병사들은 열띤 취재 및 인터뷰 분위기에 당황하기도 했지만 이내 담담히 자신들의 소회를 피력했다. 사실 이들은 항공편으로 더 빨리 스페인에 올 수도 있었다. 하지만 ‘노련한 여우’인 프랑코는 이 사건을 공산주의에 대한 스페인과 자신의 승리로 대외에 홍보하고자 했고 최대한의 시간을 끌었다. 그렇게 병사들은 이스탄불에서 인터뷰를 했고 이들의 극적인 사연이 전유럽에 타전되며 엄청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물론 가장 큰 반응은 이들 대부분의 소식을 듣지 못한 채 사망한 줄만 알고 있었던 조국 스페인에서 나왔다. 라디오를 통해 10년 동안 소식이 끊겼던 아버지와 자식의 이름을 듣게 된 가족과 친지들은 기쁨과 감격의 환호성을 질렀다.


병사들을 태운 배는 지중해를 가로질러 스페인의 바르셀로나로 향했고 마침내 4월 2일 오후 5시가 조금 넘어서 바르셀로나에 도착했다. 프랑코는 이 날을 위해 회사 및 관공서에 임시공휴일을 선포했고 병사들을 맞을 준비를 했다. 프랑코 정권은 정부 매체를 통해 이들을 공산주의의 압박 속에서도 신념을 버리지 않고 귀환한 영웅이자 순교자로 묘사했던 것이다. 바르셀로나 항구에는 병사들이 출발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군악대의 연주 속에 수 천명의 군중들이 모여 있었고 분위기는 점점 고조되었다. 마침내 조국 땅을 다시 보게 된 병사들은 웃는 가운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병사들이 하선하자 여기저기서 키스와 환호와 포옹이 이어졌고 예외 없이 모든 사람들이 울고 있었다. 항구에는 공식 환영식을 위한 단상이 있었는데 이곳에 병사들에게 낮 익은 한 얼굴이 보였다. 바로 그들과 생사 고락을 함께 했던 무뇨스 그란데스 장군이었다. 이제는 육군 장관이 된 그 역시 천신만고 끝에 귀환한 옛 전우들을 보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모든 행사가 끝나고 병사들은 스페인 각지의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렇게 해서 총 참전인원 4만 5천 명에 달했던 스페인판 오디세우스들의 13년에 걸쳤던 기나긴 여정이 끝을 맺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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