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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호 May 07. 2024

3. 불운했던 바르샤바의 투사들(上)

폴란드 국내군 (1939-1945)

특유의 마름모꼴 군모를 쓰고 행진 중인 폴란드군

"거짓과 비겁은 반드시 대가를 치른다는 것을 기억하라"

- 조지 오웰 (영국의 작가), 바르샤바 봉기 당시 영국 언론의 지극히 반폴란드적인 보도에 대해 비판하며 -


최근 한국산 무기 구매를 통해 언론에 자주 언급되는 국가가 있다. 바로 동유럽의 에 위치한 폴란드다.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이후 자국 안보에 큰 불안을 느낀 폴란드는 단기간에 대량 공급이 가능한 한국산 무기 구매를 통해 국방력을 강화하고 있다. 폴란드는 2차 세계대전 때 그 어느 나라보다도 많은 피해를 본 국가였는데 무려 자국민 중 근 20%인 5백60만 명이 침략자의 손에 무참히 살해당했다. 폴란드는 당시의 희생을 교훈 삼아 다시는 그와 같은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굳은 결의를 되새기고 있는 것이다. 이런 폴란드에서는 매년 8월 1일에 국가적인 차원의 거대한 추모식이 열린다. 이 추모식은 2차 대전 당시의 ‘한 사건’을 기리는 행사로서 대통령과 정부 각료들이 모두 참석할 정도로 폴란드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대중들은 행사 도중 주변을 장식한 수많은 폴란드 국기들을 볼 수 있는데 이들 국기에는 좀 특이한 문양이 들어가 있다. 흰색과 붉은색의 폴란드 국기 가운데 마치 배의 닻이나 가톨릭의 상징처럼 보이는 특이한 로고가 들어가 있는 것이다. 국기 속의 이 문양은 폴란드가 가장 암울했던 시기에 탄생했는데 지금부터 설명하고자 하는 한 단체와 관련이 있다. 그 단체는 암흑으로 꺼져 있던 폴란드에 필사적으로 저항의 불을 밝혔지만 전쟁이 끝난 후 정치적인 문제로 인해 그 역할이 폄훼되었고 오랜 기간 동안 많은 폴란드 국민들에게 접근이 불가했던 금단의 영역으로 남아 있었다.



폴란드 창기병대의 재현 모습

국가의 부활과 패배

유럽에 있는 여러 나라 중 폴란드처럼 기구한 역사를 가진 나라도 드물다. 과거 15세기 이후 폴란드는 리투아니아와 함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왕국’을 결성하면서 동유럽의 강자로 부상하기도 했다. 폴란드는 독일 기사단을 물리쳤고 발트해와 우크라이나 쪽으로 영토를 확장했으며 러시아가 아직 미약했던 1611년에는 훗날 히틀러도 넘보지 못했던 모스크바까지 점령했다. 더불어 그 유명한 폴란드의 ‘날개 달린 창기병대 (Winged Hussars : 이들은 실제로 몸 뒤에 깃 털 모양의 날개를 달고 싸웠다.)’는 1683년 오스만 터키에 포위된 비엔나를 구원하는 등 폴란드는 명실상부한 유럽 역사의 주역으로 활약하였다. 하지만 이후 자신의 사익을 지키려는 귀족들의 내분과 프로이센, 스웨덴, 러시아, 오스만 터키 등 주변 강대국과의 잇단 분쟁으로 국력이 급격히 쇠퇴한다. 급기야 1773년부터 1795년 사이에 세 차례나 강대국들에게 잔인하게 분할되면서 폴란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다. 이후 폴란드라는 이름이 다시 역사에 등장한 것은 약 120년 이상이 지난 1918년의 일이었다.


1차 대전이 끝나고 유럽에는 독일, 러시아, 오스트리아-헝가리라는 세 개의 거대 제국이 무너졌다. 특히 러시아에는 공산 혁명이 일어나며 기존의 모든 것을 뒤집고 인근 지역으로 혁명을 퍼뜨리려 했다. 한편 피지배 민족인 폴란드인들은 이러한 혼란의 시기를 기회로 이용했고 1차 대전이 끝나던 1918년 11월 11일에 독립을 선포하며 폴란드 공화국을 수립한다. 하지만 신생 폴란드 공화국에 얼마 지나지 않아 커다란 위기가 닥치게 되는데 패배한 독일군이 기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등의 점령지에서 철수하자 동쪽에서 혁명의 전파를 원하는 볼셰비키들이 쳐들어온 것이다. 이에 맞서 폴란드를 비롯한 우크라이나 및 발트 국가들이 싸우게 되었는데 신생 폴란드군은 1919년 2월부터 볼셰비키와 본격적으로 전투를 벌인다. 그런데 아무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약체라 생각되던 신생 폴란드군이 볼셰비키를 연속적으로 격파하며 동진하기 시작한 것이다. 폴란드군은 벨라루스 서부와 리투아니아를 점령했고 우크라이나의 키이우까지 진군한다. 사실 러시아 백군과의 싸움도 병행해야 했던 볼셰비키로서는 병력을 나누어서 싸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폴란드군에 집중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후 양 측의 소모전이 계속되었고 1920년 중반이 넘어가자 상황이 서서히 볼셰비키에게 유리하게 전개된다. 폴란드군은 6월 키이우 전투에서 만 5천 명이 전사하는 큰 피해를 입게 되고 서쪽으로 후퇴를 거듭하게 된다. 신생 폴란드의 멸망을 우려한 영국은 볼셰비키에게 진군을 멈추고 휴전할 것을 제안했지만 레닌은 들은 채도 하지 않고 붉은 군대에게 공격을 계속하도록 명령했다. 볼셰비키는 8월 초에 바르샤바의 비스와 강까지 도달했고 지휘관인 미하일 투하체프스키 (Mikhail Nikolayevich Tukhachevsky)는 가련한 폴란드의 운명을 끝장내려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 기적이 일어났다. 자만한 볼셰비키를 유인한 총사령관 피우수트스키 (Józef Piłsudski) 지휘 하의 폴란드군이 이들을 역포위하며 문자 그대로 전멸시켜 버린 것이다. 무려 8만여 명의 볼셰비키가 포로가 되었고 레닌은 폴란드와의 강화를 수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서방 국가들은 볼셰비키의 진격이 멈춤에 안도했다. 20년대가 지나면서 폴란드는 볼셰비키와의 국경선을 확정 지었고 국가로서의 정체성을 확고히 할 수 있었다. 비록 폴란드가 원하는 평화는 지켜 냈지만 문제는 볼셰비키와의 일련의 대결을 통해 이들 지도부에 깊은 원한을 남겼다는 점이었다. 그러한 지도부 중 한 명이 당시 폴란드 남서부 전선에서 볼셰비키를 지휘하던 스탈린이었다. 그는 바르샤바의 붉은 군대를 지원하라는 공산당의 명령에 불복했다는 이유로 트로츠키와 투하체프스키로부터 패배의 원인으로 비난받았던 것이다. 이때부터 스탈린에게 ‘두 사람’과 폴란드라는 이름은 치가 떨리는 증오의 대상이 된다. 20년 후의 비극적인 그림자가 이때부터 드리워졌다.

       

폴란드의 오른쪽 국경이 어느 정도 정리되는 가운데 왼쪽인 독일과의 문제는 더욱 복잡하였다. 문제의 핵심은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폴란드에게 바다로 가는 통로를 내주기 위해 독일 땅 일부를 폴란드에게 떼어주고 그 중간에 위치한 단치히 (Danzig : 폴란드명 그단스크, 훗날 레흐 바웬사가 자유노조를 통해 활약한 곳이다.)를 국제 자유도시로 만든 것이었다. 이는 독일 본토와 철학자 칸트의 고향인 동프로이센을 단절시키는 결과를 낳았는데 독일인들에게 두고두고 원한의 이유가 되었다. 그래도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 까지는 그저 속으로만 불평을 삭이던 독일인들이 1933년 나치 집권 이후는 노골적으로 영토에 대한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1938년 뮌헨 협정 이후 체코-슬로바키아를 삼켜버린 나치는 자연스럽게 다음 목표로 폴란드의 바다 쪽 통로인 ‘폴란드 회랑’ 지대의 통행권을 요구했다. 이것은 사실상 그 땅을 독일에 달라는 얘기였고 폴란드로서는 절대 선택할 수 없는 옵션이었다. 그전까지는 나치에 대한 자극을 원치 않았던 영국과 프랑스도 이제는 상황의 심각성을 인식했다. 그들은 독일이 폴란드를 공격하면 양국 모두 폴란드를 방어하기 위해 행동을 취할 것임을 분명히 경고했다. 문제는 이들 두 나라가 폴란드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폴란드에게 더욱 우려할만한 일이 벌어졌다. 1939년 8월 23일에 ‘물과 기름’ 같은 나치 독일과 공산주의 소련이 상호 불가침 조약을 맺은 것이다! 이 조약의 의미는 독일이 폴란드와 싸울 경우 동쪽의 폴란드는 동쪽에 또 하나의 잠재적인 적을 둘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이제 20년 된 국가의 운명이 점점 위태로워지고 있었다.


1939년 9월 1일 새벽 4시 45분 단치히 항구에 친선 항해 목적으로 정박 중이던 독일해군 슐레스비히-홀슈타인호에서 11인치 주포가 포격을 가하면서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폴란드군은 전쟁이 곧 일어날 것을 알았지만 병력이나 무기의 양과 질 모든 면에서 독일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고 결정적으로 전광석화와 같은 ‘전격전 (Blitzkrieg)’에 압도당했다. 독일군은 폴란드 북부와 남부에서 거대한 두 개의 집단군이 거침없이 돌진하며 폴란드군 주력을 궤멸시켜 버렸다. 독일군 선두는 9월 8일에 수도인 바르샤바에 도달했고 도시를 포위했다. 폴란드군은 수도에서 격렬히 저항하며 끈질기게 버티었지만 9월 17일 동쪽에서 60만 명의 소련군마저 침공하자 더 이상의 희망은 사라졌다. 일부 고립된 지역에서 산발적인 저항이 있는 가운데 9월 22일 전 세계 사람들은 폴란드 동부의 브제시치 (Brześć : 현재 벨라루스의 브레스트)에서 나치 독일군과 공산주의 소련군이 함께 악수하며 퍼레이드를 하는 것을 보고 경악하고 만다. 10월 6일에는 모든 저항이 종식되었고 폴란드라는 나라는 다시 한번 지도상에서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폴란드인들의 저항의지마저 사라진 것은 아니라는 것이 밝혀지게 된다.


항복하는 폴란드군

저항운동의 시작

바르샤바가 독일군에 포위되어 있던 막바지인 9월 27일, 폴란드 방어군 사령관인 ‘율리우시 롬멜 (Juliusz Rómmel)’ 장군은 모든 것이 끝난 것을 알고 있었다. 째지는 듯한 사이렌 소리를 내는 슈투카 (Stuka) 급강하 폭격기의 공격과 독일군의 포격은 포위된 폴란드군과 시민들의 사기를 바닥으로 끌어내렸다. 이러한 가운데 전기, 가스, 수도 등 도시의 인프라가 무너졌고 9월 26일에는 독일군이 폴란드군 남쪽 방어선을 무너뜨리고 시내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롬멜 장군은 더 이상의 저항은 무의미하다고 판단했고 항복을 위한 독일군과의 협상을 준비한다. 바로 그때 그의 마음속 한구석에서는 또 다른 목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한다. 롬멜은 비록 조국이 전투에서는 패했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마침 그는 신뢰하는 부하였던 ‘미하우 토카르제프스키 (Michał Tokarzewski)’ 장군으로부터 전후 침략자에 대항하는 저항 조직에 관한 기본 제안을 보고 받았다. 롬멜은 이를 즉시 승인했고 그 결과로써 토카르제프스키를 수장으로 ‘폴란드 승리단 (Służba Zwycięstwu Polski)’이 결성된다. 롬멜은 바르샤바 항복 이후 전쟁의 나머지 기간을 독일군 포로수용소에서 보내야 했는데 토카르제프스키와 함께 뿌린 씨앗이 미래에 어떻게 자라날지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한편 폴란드 승리단은 1939년 11월 당시 프랑스에 있던 ‘폴란드 망명 정부’의 지령에 따라 ‘무장투쟁 연합 (Związek Walki Zbrojnej)’으로 이름을 변경했고 외연적으로 확장되기 시작했다. 독일과 소련에 분할된 조국의 상황에 따라 무장투쟁 연합은 크게 두 개의 지역으로 구분되었다. 1940년 1월부터 소련 점령 지구에서는 토카르제프스키가 조직을 이끌었고 독일 점령 지구에서는 간신히 독일군의 체포를 피한 바르샤바 기갑부대 출신의 ‘스테판 로베츠키 (Stefan Rowecki)’ 대령이 리더가 되었다. 이들은 점령지 내를 은밀히 이동하며 지인들을 포함한 조직원들을 포섭하기 시작했고 해외의 폴란드 망명정부와 연락망을 강화했다. 패전 초기 폴란드 여기저기에 난립했던 무장 투쟁 단체들이 깔때기처럼 무장투쟁 연합으로 모여들었고 점차 통합이 되어가고 있었다. 점령군의 서슬이 퍼런 시점에서 이들은 당장의 대규모 투쟁을 할 수는 없었지만 미래의 결전을 위해 병력을 모집하고 무기를 은닉하기 시작했다.


점점 세력을 넓히던 무장투쟁 연합은 독일이나 소련 같은 점령군에게는 골칫거리이자 미리 뿌리를 제거해야 할 위험 요소였다. 1940년 3월에 토카르제프스키는 독일군 점령 지역인 바르샤바에서 회합을 마치고 소련군 지역인 르보프로 돌아오던 중 NKVD (소련 비밀경찰, KGB의 전신)에게 체포되고 만다. 처음에는 체포한 ‘중년 사내’의 정확한 신원을 몰랐던 소련 당국은 곧 그들이 ‘엄청난 대어 (大漁)’를 낚았음을 확인하고 그를 악명 높은 모스크바의 루뱐카 교도소로 압송한다. 토카르제프스키가 NKVD의 끔찍한 고문을 받으며 인간의 한계에 직면하는 동안 소련군 점령지역의 무장연합 투쟁은 지도자 없는 상태로 방치되었다. 독일군 지역에서는 그나마 사정이 조금 더 나았는데 1940년 6월에 준장으로 진급한 스테판 로베츠키가 무장투쟁 연합의 전체 대표가 되며 확고한 입지를 구축했다. 그는 조직 내 다양한 기능들을 강화하며 역할 확대에 힘썼는데 특히 선전, 심리전을 담당하는 ‘정보-선전국’을 신설하여 일반인들이 가지고 있는 ‘장교 출신에 대한 불신’ (1939년 9월에 폴란드군이 보여준 너무나도 무기력했던 패배를 통해 당시 폴란드 대중에게는 군 장교를 불신하고 무시하는 태도가 널리 펴져 있었다.)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했다. 정보-선전국은 자체 라디오 방송 및 최대 5만 부에 달하는 주간 팸플릿 발행을 통해 런던 망명 정부에 정보를 전달하고 폴란드인들의 사기 고양에도 주력했다.      


1941년 6월 22일에 독일이 같은 편이었던 소련을 침공하자 폴란드 저항 운동에 많은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런던에 있던 폴란드 망명정부는 얼마 전까지 자신들을 점령했던 소련이 독일의 침공 이후 영국과 연합을 한 상황에서 소련과의 관계에 대해 재정립을 할 필요성이 있었다. 분명한 것은 폴란드 지도부가 전쟁의 승리와 조국의 해방이라는 대의가 무엇보다도 중요함을 인식했다는 점이었다. 1941년 7월 30일 폴란드 망명정부의 총리였던 시코르스키 (Władysław Sikorski)가 영국 주재 소련 대사 마이스키와 양국 간 협정을 체결했고 과거 소련과 독일 간의 모든 협정이 무효임을 천명했다. 고위급에서 이렇게 협력적인 전략적 방향을 결정했지만 폴란드에 있는 지하 저항세력 내에는 묘한 반발의 기류가 흘렀다. 폴란드의 좌익과 공산주의 계열은 원래 소련의 지침에 따라 독일 및 소련 점령군과의 저항에 참여하지 않으려 했다. 더구나 소련 점령 이후 폴란드군 포로 45만 명을 포함한 폴란드인 200만 명이 ‘인민의 적’으로서 소련으로 끌려갔다. 기존 저항 세력이 소련 및 좌익과 협력하기에는 무엇인가 개운치 않은 점이 많았던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시기가 나치라는 공동의 적을 놓고 협력할 때인 것만큼은 확실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무장투쟁 연합 지도자인 로베츠키는 소련군의 전투 수행 지원을 위해 동부 전선 독일군 후방에 수색, 정찰 인원을 파견한다. 이들은 독일군 후방에서 정보 수집을 하거나 지역 빨치산과 함께 사보타주 활동을 전개한다. 한편 소련에 억류되었던 토카르제프스키는 감옥에서 석방되어 새로 결성된 자유 폴란드군의 일원이 되었고 이후 북아프리카와 이탈리아에 파견되어 영국군과 함께 對독일 전투를 이어 나간다. 이렇게 전쟁이 새로운 국면에 진입함에 따라 폴란드 저항 운동 역시 커다란 변화의 시기를 지나고 있었다.


(하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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