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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호 May 08. 2024

3. 불운했던 바르샤바의 투사들(下)

폴란드 국내군 (1939-1945)

저항의 상징인 코트비차가 삽입된 폴란드 국기

국내군의 탄생과 시련

해가 바뀌어 1942년이 되었다. 독일군은 이전해 겨울부터 이어진 모스크바 공방전에서 소련군의 반격과 혹독한 추위를 통해 처음으로 후퇴를 경험하기 시작했다. 무적 독일군의 신화가 무너지는 순간이었고 폴란드인들을 포함한 유럽의 피지배 국민들은 작은 희망을 보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런던에 있는 폴란드 망명 정부의 시코르스키는 폴란드 내 저항 운동을 보다 공식화하고 조직화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시코르스키는 2월 14일에 기존에 있던 무장투쟁 연합을 ‘폴란드 국내군 (Armia Krajowa)’으로 명칭 변경 및 격상시켰으며 이에 따라 로베츠키는 폴란드 국내군 사령관이 되었다. 시코르스키는 국내군을 단순한 명목상의 존재로만 여기지 않았고 북아프리카에서 활동 중인 폴란드 군단과 함께 나치와의 전투에 참여 중인 저항의 양대 축으로 보았던 것이다.


국내군의 규모는 1942년 초 약 십만여 명으로 파악되었다. 폴란드 각지에서 지원자가 물려 들었는데 지원자들은 가입을 위해 대게 인적이 드문 야외나 개인 주택에서 십자가를 동반한 충성 맹세를 해야 했다. 선서는 다음과 같았다.


“나는 전능하신 하느님과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 앞에서 수난과 구원의 징표인 이 거룩한 십자가에 손을 얹고 나의 조국 폴란드 공화국에 충실할 것을 맹세합니다. 굳건히 그 명예를 지키고, 온 힘을 다해, 심지어 내 생명을 희생할 때까지 압제로부터 해방을 위해 싸울 것입니다. 나는 폴란드공화국 대통령과 그가 임명한 총사령관, 국내군 사령관의 명령에 복종할 것이며,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비밀을 확고히 지킬 것입니다. 신께서 도우시기를!”


이후 모집자는 지원자의 가입을 허락하며 ‘반역자는 사형’이라는 섬뜩한 말과 함께 모든 절차가 종료된다. 이때 동료들의 환영 인사와 함께 폴란드군의 특이한 두 손가락 경례 (검지와 중지를 모아서 조금은 우스워 보이는 이 독특한 경례는 과거 나폴레옹 시절, 전투에서 손가락을 부상당한 폴란드 병사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를 해야 한다. 더불어 이제는 군인의 소속이기에 철저한 상명하복에 따라야만 했다. 여자도 예외는 없었는데 이것은 폴란드 국내군이 이름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군대였기 때문이었다.


국내군은 폴란드 전역에 3개의 지역별 지부와 11개 독립 지부를 갖추었고 심지어 베를린과 부다페스트에 해외 조직까지 구축했다. 국내군이 확대됨에 따라 독일군 요충지, 산업시설 및 물자보급소에 대한 사보타주를 보다 광범위하게 수행할 수 있었고 전쟁 기간 내내 수십만 건 단위로 실시되었다. 정보 수집 역시 중요한 핵심 업무였는데 전후 영국정보국 리포트에 따르면 전쟁 중 대륙에서 오는 정보의 거의 절반이 폴란드에서 온 것이었고 이들이 전쟁 수행 전반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 중에는 유대인 학살을 위해 건설된 게토나 강제수용소에 대한 최초의 보고서 등이 포함된다. 또한 필요에 의해 다양한 기능의 여러 조직이 신설되었다. 그중 하나가 특수작전국 소속 ‘특별 전투행동 조직’으로 불린 부서였는데 이름만 봐서는 그 목적을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지만 사실 이 조직의 역할은 사령관의 직접 명령에 따른 나치와 그 부역자들의 암살이었다. 나치는 이들을 잡기 위해서 혈안이 되어 있었고 대대적인 검거로 인해 조직의 기능이 중단된 적도 있었다. 하지만 후속 조직이 신설되었고 계속적인 점령군 핵심 인물에 대해 암살 작업을 이어갔다. 한편 국내군 출신으로 영국에 있었던 이들 중 특수 공수 교육을 받은 이들이 있었다. 약 600명에 이르는 이들은 선택된 소수로서 영국 특수작전국 (SOE)에서 낙하, 통신, 파괴 및 생존에 대한 종합적인 훈련을 이수했고 316 명의 대원들이 실제로 폴란드에 투입되었다. 이들은 영국의 망명정부와 본토를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했고 폴란드인들에게 폴란드 망명정부가 단순한 허수아비가 아님을 알려 주었다. 하지만 이들의 작전은 극도로 위험해서 투입 병력의 삼분의 일이 임무 중 사망하게 된다.


1942년 초에 폴란드 국내군은 독일에 대한 저항의 상징을 비밀스럽게 공모했는데 바르샤바 대학의 한 여학생 작품이 선정되었다. 그 문양은 마치 배의 닻처럼 생겼는데 알파벳 P자와 W자를 위, 아래로 겹쳐 놓은 모습이었다. 폴란드어로는 닻을 뜻하는 ‘코트비차 (Kotwica)’로 불리었는데 알파벳 약자는 ‘저항하는 폴란드 (Polska Walcząca)’를 의미했다. 이 문양은 순식간에 국내군 내에서 사용되었고 영국의 망명정부에까지 전파되며 사실상 공식적인 투쟁과 저항의 상징이 되었다. 국내군은 대담하게도 이 문양을 도장으로 만들어서 독일군 간행물이나 화폐에 마구 찍어 버렸다. 곧이어 폴란드 전역의 건물이나 공공 기념물 등에 해당 로고가 페인팅된다. 독일 당국은 로고를 지우려고 했지만 새로 만들어지는 속도가 더욱 빨라서 결국은 통제 불능 상태가 되었다. 1943년 2월에 로베츠키는 모든 사보타주 행위에 해당 로고를 사용하라는 공식 명령을 내린다. 폴란드인들의 저항의 강도가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


1943년 4월 13일 전 세계는 독일 측의 한 발표에 충격을 받게 된다. 독일이 점령하고 있던 러시아 스몰렌스크 인근 카틴 숲에서 대규모의 폴란드군 집단 학살 흔적이 발견된 것이다. 문제는 독일 측에서 학살이 소련의 소행이라고 발표한 것이다. 소련 측은 이틀 후인 4월 15일에 공식적으로 반박을 했고 오히려 독일군이 포로들을 학살한 후 소련 측에 뒤집어 씌우고 있다고 주장했다. 독일은 무려 12단으로 쌓여 있던 약 3천 명의 시신을 발견했고 각 국의 법의학 전문가와 연합군 포로를 포함한 다국적 조사단을 구성하였다. 조사단은 신원이 확인된 250명의 시신을 보면서 신분증과 소지품을 확인했고 이들이 모두 폴란드군이라고 발표했다. 사실 소련은 폴란드군 포로 및 체포한 지식인들 중 체제에 위협이 된다고 생각되는 2만 2천 명을 선별하여 학살하였던 것이다. 스탈린 개인으로서는 폴란드인들에게 1920년의 패배에 대한 빚을 확실히 갚은 셈이었다. 문제는 연합국의 태도였는데 소련과의 관계를 의식한 영국과 미국은 해당 사실을 철저히 기밀에 부쳤고 모른 채 했다. 국제 정치의 현실은 자국의 이익 앞에서 지극히 냉혹했다. 폴란드 망명정부는 이러한 서방 국가들의 태도에 극도로 분노했고 학살을 부인하는 소련과는 더 이상 협력할 수 없었다. 소련은 폴란드가 나치 편이라는 말도 안 되는 비난을 하며 망명정부와의 외교 관계를 단절하게 된다. 동시에 폴란드 국내군이나 빨치산 조직은 소련과의 협력을 중단하였고 양 측이 서로 공격하는 일도 발생했다. 카틴 숲 학살을 통해 폴란드와 소련 양 측은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되었다.


폴란드 망명전부와 국내군이 카틴 학살을 통해 큰 충격을 받은 가운데 이번에는 마치 이들 조직에 망치로 머리를 가격하는 것과 같은 일이 벌어졌다. 나치는 국내군 우두머리인 로베츠키를 ‘공공의 적 1호’로 공포했고 그를 체포하기 위해 전담 팀까지 조직하며 노력을 기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호원도 없이 위조증명서로 바르샤바 시내를 활보했던 로베츠키는 쉽게 잡히지 않았다. 오히려 적은 내부에 있었는데 1943년 6월 30일 아침에 임시 아파트에 머물고 있던 그는 국내군에 잠입한 게슈타포 밀고자들에 의해 나치에 체포되었다. 로베츠키는 거물답게 즉시 베를린으로 압송되었고 친위대 수장인 하인리히 힘러 (Heinrich Himmler)에게 직접 심문을 받기도 했는데 이후 작센하우젠 강제수용소 특별동에 수감되었다. 나치는 그를 반소 활동에 이용하려 했지만 로베츠키는 절대 넘어가지 않았다. 총사령관인 그의 체포는 국내군이나 망명정부에 상당한 타격이었다. 하지만 국내군은 나름 거대 조직이었고 곧 새로운 지도자가 등장하게 된다. 국내군의 새 리더는 ‘폴란드 올림픽 승마팀’ 감독으로 베를린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땄던 ‘타데우시 부르-코모로프스키 (Tadeusz Bór-Komorowski)’ 장군이었다. 그는 로베츠키의 공백을 최소화하기 위해 7월부터 바로 총사령관 자리에 올랐다. 기존에 실시했던 많은 사보타주나 투쟁은 계속되고 더불어 국내군의 세력도 더욱 커지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 1944년 여름에는 국내군의 숫자가 무려 40만 명 이상이 되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전쟁의 흐름이 연합군 측으로 바뀜에 따라 드디어 국내군이 전면에 나서야 할 시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비르샤바 봉기 당시 팔에 폴란드 국기를 두르고 전투 중인 국내군

바르샤바를 해방하라!

1943년 8월의 쿠르스크 전투 이후 독일군은 전쟁의 주도권을 상실했고 끝없는 후퇴의 길에 오르게 된다. 런던의 폴란드 망명정부는 멀지 않은 미래에 소련군이 폴란드로 진군할 것으로 예상했는데 이대로 소련군이 폴란드를 해방시킬 경우에는 전후 새로운 정부 수립에서 망명정부는 소련 주도의 공산당에 주도권을 잃을 것이 뻔했다. 소련군보다 한발 빠르게 스스로의 힘으로 해방을 시켜야 대내외적으로 할 말이 있었고 자주적으로 나라를 재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배경으로 런던의 망명정부는 소련군이 폴란드 국경으로 다가오는 시점에 전국적인 봉기를 통해 자력으로 독일군을 축출하려는 ‘폭풍 작전’을 계획한다. 1944년 1월 4일에 소련의 ‘제2 벨라루스 전선 군’이 전쟁 전 소련-폴란드 국경인 볼리니아 지역에 진입했고 드디어 작전이 시작되었다. 이 지역에 있는 국내군 사이의 연락망을 통해 무장봉기가 계획되었고 3월 이후 본격적인 독일군과의 교전이 벌어졌다. 비록 여기저기서 벌어지는 산발적인 국지전이었지만 다가오는 소련군도 버거웠던 독일군에게는 국내군의 공격이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6월 22일에 소련군이 ‘바그라티온 작전’을 통해 독일 중부집단군을 궤멸시키고 본격적으로 벨라루스를 거쳐 폴란드 땅에 진입하자 마침내 전국적인 투쟁의 시간이 도래했다. 국내군은 7월부터 르부프, 브제스치, 코브린 등 폴란드 동부 전역에서 독일군을 몰아내기 위해 일어섰다. 이제 남은 것은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였다!


1944년 7월 31일 국내군 지도부는 봉기의 시기를 놓고 회의를 열었다. 소련군은 이미 바르샤바가 지척인 비스와 강 동쪽에 도달했고 모스크바의 폴란드어 방송에서는 연일 무장봉기를 부추기고 있었다. 부르-코모로프스키는 더 늦기 전에 행동할 것을 결정했고 봉기 개시일을 다음 날일 8월 1일 오후 다섯 시로 결정했다. 이 시간은 폴란드인들에게는 지난 5년 간의 노예 생활을 끝장내는 ‘W-아워’였다. (W는 ‘폭발’을 뜻하는 폴란드어 Wybuch에서 유래했는데 연합군의 D-데이, H-아워 등과 대비된다.) 국내군 지휘부는 시내를 여덟 개 지역으로 구분하여 작전을 진행했다. 마침내 8월 1일 오후 다섯 시에 바르샤바의 국내군은 노도와 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국내군은 독일군을 몰아내고 대략 일주일 이내에 소련군이 올 것으로 믿고 있었다. 이들은 순식간에 구시가지를 포함한 시내 주요 구역을 점령하는 동시에 독일군 부대 및 요충지를 급습했는데 총병력은 45,000명으로 추산되었다. 독일군도 이들의 봉기를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규모가 더 커서 당장에 진압할 방법이 없었다. 국내군은 중앙우체국, 발전소를 점령했고 겡시우프카의 수용소에 있던 유대인 350명을 해방시켰는데 이들 중 일부도 봉기에 가담한다. 또한 나치 친위대의 군복 보급창을 점령해 노획한 전투복을 국내군 병사들에게 보급했다. 사실 국내군은 치명적일 정도로 무기와 장비가 부족했는데 독일/폴란드군이 쓰던 소총 1,000 정이 주력 무기였고 권총이나 수류탄 일부와 소수의 기관총 및 자체 제작한 화염병 등이 무장의 전부였다. 독일제 무기에 독일군 군복과 철모를 쓴 폴란드인들은 피아 식별을 위해 코트비차가 그려진 폴란드 국기를 왼쪽 소매와 철모 위에 둘렀다. 비록 제대로 된 군복도 없었고 식량도 부족했지만 싸우겠다는 의지만큼은 그 누구보다도 강했다. 하지만 의지 만으로는 다가오는 독일군을 막을 수 없었다.


만 천명 규모의 바르샤바 방어 독일군은 곧 진영을 정비하기 시작했다. 또한 독일에서는 폴란드인들의 투쟁에 분노한 친위대 수장인 힘러가 직접 철저한 진압을 명령했다. 그는 과거 빨치산 진압 등에 경험이 있는 에리히 폰 뎀 바흐 (Erich von dem Bach) 장군 지휘 아래 디를레방어 여단과 카민스키 여단을 추가로 투입했다. 이들은 친위대 내에서도 지독히 잔인한 진압과 방식으로 악명이 자자했는데 살인, 약탈, 강간 등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악행을 다 저지르는 범죄자 집단이었다. 8월 4일과 5일 사이에 이 범죄자 부대들은 시내 볼라 (Wola)와 오호타 (Ochota) 지구에서 수 만 명의 시민과 국내군 포로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였다. 친위대는 학살을 위해 개머리판, 대검, 기관총 및 화염방사기 등을 동원하였고 건물마다 모든 것을 부수고 불 질렀으며 사람들이 뛰쳐나오는 대로 전부 살해하였다. 시민들과 국내군의 사기를 꺾으려는 사악한 의도였지만 폴란드인들은 결코 쉽게 무너지지 않았고 시내의 건물마다 이어지는 처절한 시가전을 벌이며 투쟁하였다. (힘러는 바르샤바의 전투를 스탈린그라드와 비교하기도 했다.) 이들은 독일군에 쫓기거나 지상에서 은폐할 곳이 없어지면 지하의 하수도로 가서 투쟁을 이어갔다. 독일군은 하수도 안으로 화염방사기를 쏘며 저항군을 태워 죽이려 했다. 처절한 투쟁이 이어지며 일주일 이상의 시간이 흘렀지만 금방 올 것처럼 보이던 소련군은 여전히 비스와 강 건너편에 있었다.


당시 소련은 카틴 학살 같은 과거의 정치적 사건으로 인해 바르샤바의 국내군 지원에 대단히 부정적이었다. 소련군 자체도 장기간의 전투로 인해 공격 여력이 떨어진 것도 사실이었지만 그들은 이러한 상황을 연합군 측에 정확히 알리지 않았다. 보다 못한 영국과 미국이 스탈린에게 죽어가는 폴란드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을 요청한다. 스탈린은 마지못해 공중지원을 했는데 ‘Po-2’ 같은 소형 복엽기를 투입해서 보급품의 양이 많지 않았고 많은 수가 독일군 진영에 투하되었다. 그나마 폴란드군 손에 들어간 보급품은 소련제 탄약 같이 사용이 불가한 것들이었다. (폴란드군이 쓰던 독일제 소총은 7.92mm 구경이었지만 소련군은 7.62mm를 사용했다.) 심지어 스탈린은 자국 수송기들이 바르샤바에 보급품을 공수한 후 소련 지역에 기착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영국과 미국의 요청마저도 거부했다. 냉전의 기미는 이미 1944년 8월 바르샤바에서 감지되기 시작했다. 스탈린의 관점에서 폴란드 국내군은 반공으로 뭉친 폴란드 망명정부의 주구이자 ‘혁명의 적’으로서 오히려 제거해야 할 대상이었던 것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바르샤바의 저항군은 수세에 몰렸다. 9월 초까지 여전히 여러 곳의 시내 중심부를 장악은 하고 있었지만 마치 섬과 같이 서로 떨어져서 독일군에 포위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독일군 진압 사령관인 폰 뎀 바흐는 투항하는 포로들은 수용소로 보내줄 것을 약속하며 전투의 종결을 꾀했다. 폴란드 국내군은 최후의 시도로 소련 측에 개입을 요청했지만 폴란드 출신이었던 소련 장군 ‘로코소프스키 (Konstantin Rokossovsky)’는 아무런 답을 하지 않았다. (그는 훗날 공산 폴란드의 국방장관이 된다.) 9월 말이 되자 더 이상의 총알도 식량도 남아있지 않은 상황에서 부르-코모로프스키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다했다고 생각했고 더 이상의 민간인들의 피해를 우려해 10월 2일 항복했다. 이들은 항복 전 함께 폴란드 국가를 부르며 그들의 63일간의 투쟁을 정리하였고 이후 국내군 만 오천 명이 독일군의 포로가 되어 각지의 수용소로 분산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복을 거부한 국내군 약 오천 명은 시민들 사이에 섞이어 투쟁을 이어갔다. 남아있는 바르샤바의 시민들은 대부분 임시 난민수용소로 이동했고 일부는 불행히도 나치의 강제수용소로 가게 된다. 봉기의 진압을 통해 20만 명 이상의 폴란드 시민이 목숨을 잃었고 국내군 만 육천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산된다. 사망자 중에는 봉기 다음날 힘러의 직접 명령에 의해 독일의 수용소에서 살해된 로베츠키 총사령관도 포함된다. 이후 벌어진 독일군의 조직적인 파괴로 한때 ‘동유럽의 파리’라 불리었던 바르샤바 시가지의 85%가 사라지게 되었다.


저주받은 군대 그리고 부활

1945년 1월 17일 소련군이 마침내 비스와 강을 건너 바르샤바를 해방한다. 소련군은 공산주의자들로 구성된 폴란드 인민군과 함께 도시에 진군하는데 국내군은 이들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1월 19일에 공식적으로 해산한다. 폴란드인들에게 해방의 기쁨은 잠시였고 곧 국내군 출신 이력자들이 소련군에 체포되기 시작한다. 종전 시까지 총 6만 명의 국내군 출신 사람들이 체포된 가운데 그중 5만 명이 소련 내 수용소에 수감된다. 일반 병사들은 그나마 이 정도로 끝났지만 국내군의 고위 지휘부 16명은 종전 직전인 1945년 3월에 모두 모스크바로 압송당하게 된다. 이중에는 국내군의 마지막 사령관인 레오폴드 오쿨리츠키 (Leopold Okulicki) 대령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들은 모스크바의 루뱐카 형무소에서 수개월간 NKVD에게 잔인한 고문을 당했다. 이후 ‘나치와 협력했다’는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죄목으로 기소당했는데 증거를 짜 맞춘 가짜 재판에서 결과는 이미 예상되었고 기소된 대부분의 사람들이 징역형을 선고받는다. 리더인 오쿨리츠키는 형 집행 중인 1946년 크리스마스이브에 의문의 상황에서 사망한다. 이후 소련의 위성국이 된 폴란드는 여전히 싸움을 지속하고 있던 국내군 잔여 세력에 대해 사면을 한다면서 여러 차례 항복을 권유하지만 항복한 이들은 모두 죽거나 투옥되는 일이 반복되었다. 더 이상의 희망을 포기한 사람들은 폴란드의 숲 속으로 들어가 자기만의 외로운 싸움을 이어간다. 마지막 국내군 잔존자는 1963년까지 존재했는데 국내군 상병 출신이던 45세의 ‘유제프 프란첵 (Jozef Franczak)’은 폴란드 동부에서 지역 경찰과 교전 중 사망한다. 공산주의 통치기간 내내 폴란드 국내군은 카틴 학살과 더불어 폴란드에서 철저히 터부시되는 주제였다. 그렇게 모든 것이 덮어지고 잊혀졌다.


폴란드 국내군-지하정부 기념 오벨리스크

1989년 동유럽에서 공산주의 정권들이 무너지며 철의 장막이 걷히기 시작했고 폴란드도 예외가 아니었다. 변화는 폴란드의 모든 곳에 불어 닥쳤는데 이제야 비로소 폴란드 국내군과 런던 망명정부에 대한 얘기도 수면으로 떠올랐다. 과거 나치 협력자나 배신자 정도로 치부되던 이들에게 드디어 정부 차원의 사면복권이 이루어진다. 1994년 8월에는 바르샤바 중심의 비예스카 (Wiejska) 거리에 폴란드 국내군 및 지하정부를 기념하는 오벨리스크 건립이 시작되었다. 1999년 6월에 완공된 이 32 미터의 거대한 오벨리스크는 하원 건물 인근에 위치해 있는데 이것은 폴란드 국내군과 지하 정부가 항상 국민의 옆에 있었던 것을 상징한다. 폴란드인들의 국내군에 대한 평가는 2004년 7월에는 ‘바르샤바 봉기 기념관’이 공식적으로 문을 열면서 그 정점에 달했는데 국내군은 ‘불굴의 폴란드 역사’ 중 가장 중요한 기둥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 지금도 폴란드인들은 그 기둥을 지키고 다시 잃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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