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중국과 미국 두 나라는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함께 싸웠고 피와 불의 시험을 견디어 내며 상호 간에 깊은 우정을 쌓았습니다.”
- 플라잉 타이거즈 노병에게 보낸 시진핑 주석의 편지 중 -
미국과 중국의 대결 구도가 심화되는 가운데 중국 관영 환구시보의 영문판인 ‘글로벌타임스(Global Times)’는 2023년 9월 19일 기사에 시진핑 주석의 편지 한 통을 공개했다. 시 주석이 쓴 편지의 수신인은 놀랍게도 미국의 평범한 노인들이었는데 정확히 말하자면 이 미국인들이 시진핑에게 쓴 편지에 시 주석 본인이 직접 회신을 한 것이었다. 이 미국인들은 해리 모이어(Harry Moyer)와 멜 맥멀렌(Mel McMullen)이라는 100세 전후의 노병들이었다. 이들은 2차 대전 당시 ‘플라잉 타이거즈(Flying Tigers 飛虎隊)’라 불리던 중국 주둔 비행대 소속 조종사들이었는데 중국을 위해 압도적인 숫자의 일본군과 맞서 싸우며 격렬하게 저항했다. 시 주석은 편지에서 과거 이들의 용감했던 행동에 대해 극찬했고 중국인들을 대표하여 깊은 감사를 표했다. 또한 과거 플라잉 타이거즈를 통해 중국과 미국이 힘을 합쳐 일본제국에 대항했던 것처럼 양국 사이의 우정이 계속되고 이들의 고귀한 정신이 영원히 기억되기를 바란다는 본인의 생각을 전달하였다. 당시 시 주석의 편지는 지난 수년간 양국의 갈등이 고조되는 가운데 상당히 이례적인 것으로 평가되었다. 게다가 중국 관영언론을 통해 해당 편지가 소개되었다는 것은 중국 정부의 의중이 반영되었다는 의미였고 이것을 양국 간 ‘관계 개선을 위한 신호탄’으로 보는 시각도 있었다. 사람들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플라잉 타이거즈’에 모아졌는데 이들은 중국과 미국의 강력한 연대를 상징했고 이들의 활약이 전쟁 기간 중 가장 어두웠던 시기를 밝게 비추었다는 점에서 더욱 큰 의미를 가진다. 플라잉 타이거즈의 설립에는 두 명의 주요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한 명은 미국인이었고 다른 한 명은 중국인이었다. 아마 이들조차 훗날 이 비행대가 이토록 의미 있고 유명해질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특명을 받은 사나이
장제스 부부와 함께한 클레어 셔널트
1940년 10월 15일 한 중년 미국인이 당시 중화민국의 임시 수도였던 충칭(中京)을 떠나 영국령 홍콩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그 중년 남자는 상당히 강인해 보이는 외모를 지녔는데 다른 중국 관리들과 함께 홍콩에서 비행정으로 갈아탔고 목적지인 미국의 샌프란시스코를 향해 머나먼 여정을 이어간다. 그는 출발 후 한 달이 경과한 11월 14일에 마침내 미국 땅인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는데 최종적으로는 수도 워싱턴 DC의 중국 대사관에 들어서며 기나긴 여정을 끝낼 수 있었다. 이후 이들 일행은 미국의 고위 관료들과 만날 준비를 했다. 이 남자의 이름은 ‘클레어 셔널트(Claire Chennault)’였는데 전직 미군 육군항공대의 소령 출신이었다. 그는 미군에서 예편한 이후 1937년 4월부터 중화민국에 있었고 당시 일본과 전쟁 상태인 중국에서 ‘공군 비행학교’의 책임자로 일하는 중이었다. 그를 미국으로 보낸 것은 당시 중국의 최고 지도자였던 장제스 총통이었는데 셔널트는 일종의 ‘고위급 밀사’ 역할을 맡았던 것이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한 이후 중국군은 총체적으로 밀리고 있었다. 1937년 말에는 수도인 난징(南京)이 치열한 혈투 끝에 함락되었는데 점령된 도시에서는 시민들이 학살되었고 수많은 여성들이 능욕을 당했다. 항전을 이어가려는 중국 정부는 이듬해 수도를 내륙의 충칭으로 옮기게 된다. 당시 셔널트는 장제스의 수석항공고문으로서 현대적인 중국 공군 비행사 양성에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한편 중국은 이미 일본을 가상 적(敵)으로 보고 있던 소련과 1937년 8월에 불가침조약을 맺었고 비밀리에 군사 협력을 강화했는데 특히 소련 공군 의용대의 지원을 많이 받게 되었다. 소련은 1937년부터 1941년까지 1200대의 항공기 및 3600명 이상의 조종사와 정비사들을 중국에 파견하였는데 이들은 민간인으로 위장하여 중국에 개별적으로 입국했고 조심스럽게 전투에 투입되었다. 사실 중국 공군은 일본군의 적수가 되지 못했고 항공기 보유 대수에 있어 거의 13분의 1 수준이었는데 그나마도 구형 소련 전투기가 대부분이었다. 소련 공군 의용대는 난징, 한커우, 란조우 등에 기지를 두고 후방을 공격하는 일본군 전투기 및 폭격기를 적극적으로 요격했고 심지어 1938년 2월에는 타이완의 일본군 비행장을 폭격하기도 했다. 이들의 존재와 활약은 사기와 전력이 바닥까지 떨어졌던 중국 공군의 회생에 큰 힘이 되었다. 문제는 1939년 8월의 독소 불가침 조약 이후 소련 조종사들과 고문관들이 점진적으로 철수하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1940년 여름이 되자 소련 공군 의용대 대부분이 귀국했는데 중국으로서는 빠른 시일 내에 이들의 전력 공백을 메꾸어야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총통인 장제스는 항공고문인 셔널트에게 미국에 가서 최대한의 항공기 지원을 얻고 (아직 미국이 공식적으로 참전하지 않았지만) 많은 ‘용병 조종사들’을 데려올 것을 지시한다. 특히 조종사는 소련 의용대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서라도 당장 수백 명이 필요했다. 셔널트는 어깨를 짓누르는 부담감을 느끼며 미국에 왔고 자국의 주요 인사들과 면담을 시작했다.
중국 대표단이 만난 많은 미국인들이 일본제국에 대항하는 중국의 외로운 투쟁에 큰 관심과 지지를 표명했고 최대한의 지원이 필요하다는 것에 동감을 표했다. 마침 미국에서 로비스트로 활동하고 있었던 장제스의 처남 쑹체웬(宋子文)은 사전에 미국 內 많은 친중 그룹들을 관리하고 있었고 이들과의 만남을 주선했다. 여러 미국인들 중에서도 재무장관이었던 헨리 모겐소 2세(Henry Morgenthau Jr.)는 연방정부의 돈줄을 쥐고 있는 실세 중 실세였다. 모겐소와의 대화에서 셔널트를 포함한 중국 대표단은 중국을 위한 미국의 안정화 자금과 여러 지원책에 대해 긍정적으로 논의했다. 12월 말에 셔널트는 국무부와 국방부는 물론 루스벨트 대통령까지 만났는데100대의 미국 전투기를 중국에 공급하는 것에 대해 동의는 물론관련 협정까지맺게 된다. 중국이 지원받을 전투기는 비록 최고 사양은 아니었지만 단단하고 무난한 성능의 ‘커티스 P-40’이었는데 문제는 이미 영국공군(RAF: Royal Air Force)에서 주문한 물량이라는 점이었다. 미국은 영국에게 더욱 우수한 스펙의 전투기를 공급해 줄 것을 제안하며 양보를 유도했는데 결국 영국은 해당 물량을 중국 공군을 위해 포기한다. 커티스社는 100대의 전투기를 분해해서 나무 상자에 포장했고 1941년 봄에 그때까지 일본과는 중립을 유지했던 영국령 버마(현재의 미얀마)의 랭군으로 보내게 된다. 동시에 셔널트는 전투기보다 ‘더욱 중요했던 것’을 찾아서 동분서주했는데 바로 전투기를 몰고 수리할 ‘조종사’와 ‘정비사’였다.
호랑이들을 한데 모으다
중화민국의 청천백일기 도장을 한 P-40 앞에 포즈를 취한 의용대 조종사들
100명의 조종사와 200명의 지상요원을 모으는 것은 상당한 난관이 뒤따르는 일이었다. 셔놀트는 우선 육군항공대와 해군항공대에 접촉했는데 중국 정부로부터 약속받은 많은 보수를 장점으로 내세웠다. 만약 장교라면 하위 계급일지라도 월 $600이 보장되었는데 이것은 당시 평균 월급의 3배 정도 되었다. 더불어 쑹메이링 여사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적기를 한 대 격추할 때마다 $500의 인센티브가 제시되었는데 이것이 큰 메리트로 작용했다. 또한 리크루팅을 위해 근무지에 대한 환상을 부풀렸는데 마치 열대 휴양지와 같은 중국이나 동남아시아의 이국적인 풍경에서 거주하며 여가 시간을 마음껏 누릴 수 있는 것처럼 포장했다. 더불어 어려움에 처한 중국이라는 나라를 도와주는 것에 대한 사나이들의 정의감과 의협심을 자극했다. 결국 해군항공대와 해병대에서 60명이 육군항공대에서 40명이 지원하며 100명의 지원자를 채울 수 있었는데 이들은 ‘좋게 말하자면’ 상당히 ‘진취적이고 터프한 성향(?)’의 사내들이었다. 이들은 1941년 중반이 되자 중국으로 떠날 준비가 완료되었다. 이때는 동남아시아를 집어삼키려는 일본의 야욕이 점차 커지고 있었고 이를 저지하려는 미국 및 영국과의 보이지 않는 힘의 대결이 지속되고 있었다. 미국은 일본의 전쟁 수행에 필수적인 석유 금수 조치를 통해 이들의 침략 의지를 꺾으려 했고 양 측 간에 물밑 협상이 진행되고 있었다. 의용대의 선발 인원들을 보내는 데 있어 약간의 절차상 이슈가 있었는데 미국은 아직 일본과 전투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군인 신분으로는 이들을 중국으로 보낼 수 없었다. 지원자들은 형식상 각 부대에서 제대를 했고’CAMCO(Central Aircraft Manufacturing Company: 센트럴 항공 제작사)’라는 민간 회사에 고용되어 중국에 가는 것으로 위장을 했다. 1941년 7월 10일에 전원 민간 여권을 가진 미국 의용비행대 제1진 300명이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했다. 약 3주 가까운 항해 끝에 이들을 실은 배는 목적지인 버마의 랭군에 도착한다. 의용대는 랭군 북쪽에 위치한 따웅우(Toungoo)의 영국군 비행장에서 대기하며 본격적인 훈련을 준비한다. 두 달 후에는 제2진 잔여인원 30명이 출발했고 11월 초에는 전체 의용대 대원들이 버마를 거쳐 중국 현지에 도착하게 된다.
셔놀트가 의용대를 구성하여 전투준비를 하고 있을 때 그는 예기치 못한 상황에 부딪치게 된다. 지원자 중에는 단지 높은 임금에 이끌려 플라잉 타이거즈에 합류하거나 낭만적인 모험을 하고 싶어서 조종 및 정비 경력을 속인 인원들이 있었던 것이다. 전투를 앞두고 이런 이들을 마구잡이로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곧 실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몇몇 인원들은 부대를 떠나게 되었고 실력 연마가 좀 더 필요한 이들을 위해 비행 학교 프로그램이 개설되었다. 셔놀트는 전체 의용대를 3개의 비행대로 구성했다. 각 비행대는 독특한 별칭으로 불렸는데 제1 비행대는 ‘아담과 이브(Adam & Eve)’로 불리었고 제2비행대는 ‘판다 곰(Panda bear)’ 그리고 제3비행대는 ‘죽음의 천사(Hell’s angels)’로 명명되었다. 이들은 당시 중국군의 상황을 고려하여 전략적으로 배치되었는데 제1, 2 비행대는 중국의 쿤밍에 있었고 제3비행대는 버마의 랭군에 나뉘어 주둔했다. 이 두 곳은 해안의 많은 부분을 일본에 빼앗긴 중국군 보급로가 지나가는 양쪽 끝이었다. 의용대의 P-40 전투기는 버마 랭군에서 하역되어 조립되었는데 한 대는 하역 중 항구 바닥에 처박히게 되었고 총 99대가 비행대에 인도된다(물에 빠진 한 대는 나중에 바다에서 건져낸 후 재인도 되었다). 의용대의 전투기는 영국 공군에 인도될 사양으로 미군의 표준 사양보다는 다소 성능이 떨어졌는데 밀봉식 연료탱크라던가 조종부 전방장갑판 등의 안전 사양이 미비했다. 상황이 어찌 되었든 간에 이제 그들은 전투를 준비해야 했다. 의용대는 일본군의 사기를 꺾으려는 마음에서 그들의 기체 기수에 훗날 전설이 되는 ‘상어 이빨’의 ‘노즈 아트(Nose Art: 주로 미군들이 2차 대전 중 항공기 기수 부분에 그리던 그림)’를 그리게 된다. 사실 이것은 북아프리카에 주둔하던 영국군 P-40에 그려진 것을 미군들이 보고 차용했다(한편 영국군은 1941년 4월에 그들과 대결하던 그리스 침공 독일 공군의 Me-110 기체 도장을 보고 모방한 것이었다). 조종석 캐노피 밑에는 월트 디즈니(Walt Disney)가 도안했다고 전해진 ‘날개 달린 호랑이’ 만화 그림이 있었는데 정작 조종사들은 이 그림이 마치 귀여운 아기 고양이 갔다며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들의 날개에는 미국 항공대의 하얀 별마크 대신 중화민국 공군의 ‘청천백일기(靑天白日旗)’가 그려져 있었는데 정식 미군이 아닌 중화민국을 돕는 자발적 의용대임을 분명히 했다.
이렇게 의용대가 전투를 준비하는 동안 일본과 미국의 회담은 최종적으로 결렬되었고 1941년 12월 7일에 일본군이 진주만을 기습하며 태평양 전쟁의 막이 오르게 된다. 드디어 ‘하늘의 호랑이들’이 본격적으로 활약할 시기가 도래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