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군사령관 마크 클라크 장군(좌측 두번째)과 해군성 장관 제임스 포레스탈(좌측 세번째)에게 사열 받고 있는 100대대 병사들
100대대는 1944년 1월에 이탈리아 전선 최악의 격전장이 된 ‘몬테 카시노(Monte Casino)’ 전투에 투입된다. 이곳은 이탈리아 반도 중간의 험준한 산지에 위치했는데 고대로부터의 유서 깊은 수도원이 있는 동시에 로마로 직접 연결되는 6번 도로가 지나는 전략상 요충지였다. 즉 연합군은 로마로 가기 위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곳을 점령해야 했다. 이러한 연합군의 상황을 잘 알고 있는 독일군의 알베르트 케셀링(Albert Kesselring) 장군은 이 일대에 ‘구스타프 라인(Gustav Line)’이라는 견고한 방어선을 구축해 놓았다. 또한 방어선에 더불어 아프리카 전선의 백전노장인 ‘헤르만 괴링 장갑사단’이나 최정예 공수부대(Fallschirmjäger)를 배치하여 이곳을 사수하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해 놓고 있었다. 이러한 독일군에 대해 연합군은 미군(일본계 병사들을 포함하는), 영국/인도군은 물론이고 캐나다군, 남미에서 온 브라질군 등이 있었다. 또한 복수를 벼르고 있는 자유 폴란드군 및 프랑스군에 속한 알제리/모로코/세네갈 출신의 식민지 부대 등이 포진되어 몬테 카시노 일대는 마치 인종 전시장을 방불케 했다. 100대대가 속한 34사단은 연합군 전체에서 정면에 배치되어 있었는데 100대대는 사단의 정예 부대로서 공격의 선봉에 섰다. 하지만 독일군의 기관총과 빈틈없는 포화망에 갇혀 좀처럼 진격하기가 쉽지 않았다. 몬테 카시노의 독일군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적들의 감시 속에 화력이 집중되었던 개활지대를 거친 후 험준한 산지를 올라가야 했다. 이곳은 절대적으로 방어하는 측에 유리한 지형이었고 공격하는 측은 목숨을 걸어야 했다. 이탈리아에 처음 상륙했을 때 1300명이었던 부대원 수는 몬테 카시노 전투가 진행되면서 600명 이하로 줄어들게 되었다. 이때부터 100대대는 ‘퍼플 하트 대대(Purple Herat: 퍼플 하트는 미군이 전사자 및 부상병에게 수여하는 메달)라는 별칭으로 불리게 된다. 그만큼 부대원 모두가 마치 죽음을 작정이라도 한 듯이 적진으로 달려가 싸웠던 것이다. 부대원들이 이러하였기에 장교들도 솔선수범을 보여야 했는데 이러한 장교들 중 한국계인 김영옥 중위가 있었다. 그는 로스앤젤레스 출신으로 100대대에 자원 입대했는데 일본계와 한국계의 사이가 안 좋다는 것을 알게 된 백인 상사들이 그의 전출을 권유했지만 끝까지 이를 거부했고 일본계 병사들과 하나가 되어 싸웠다. 그는 항상 선두에 서서 부대원들을 이끌고 공격에 앞장섰는데 이미 1943년에 11월에 일련의 독일군 기관총 진지들을 분쇄한 공로로 은성무공훈장(Silver Star)을 수여받는다. 이러한 과정에서 일본계 부하들은 김영옥 중위가 비록 한국계이지만 친형처럼 따르며 존경했고 그와 함께하며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1943년 말까지 연합군은 몬테 카시노를 포함한 독일군의 구스타프 방어선을 뚫지 못했는데 대안으로 구스타프 라인 서쪽 후방인 안치오(Anzio)에 상륙해서 몬테 카시노 일대의 독일군 병력을 분산시키고 ‘모든 길이 통했던’ 로마로 가는 길을 열고자 하였다. 하지만 1944년 1월에 실시된 안치오 상륙에서 연합군은 독일군에 막혀 내륙으로 전진하지도 못한 채 해안에 갇혔고 사실상 3면으로 포위되어 버린다. 독일군은 안치오의 연합군을 “역사상 최대의 자급하는 포로수용소”라며 비아냥거렸다. 100대대는 이런 상황에서 3월에 안치오에 투입되었는데 병사들은 마치 1차 대전 당시의 참호전과 같은 교착 상태를 두 달 동안 견뎌야 했다. 답답한 전황 속에서도 연합군은 전면적인 재공세를 준비하게 되는데 김영옥 중위는 또 하나의 임무를 부여받게 된다. 바로 전방의 독일 기갑사단의 위치 및 동태 파악을 위해 독일군 포로를 잡아오는 것이었다. 김영옥 중위는 대담하게도 휘하 일병 한 명만 데리고 5월 16일 아침 교대근무 시간에 독일군 진지로 잠입하여 피곤에 지친 포로 2명을 생포하게 된다. 포로들의 심문에서 부대의 진격로 상에 기갑사단이 없다는 진술을 확보했고 5월 17일에 연합군의 총공세가 시작되었는데 마침내 독일군의 방어선을 뚫으며 내륙으로 진격할 수 있었다. 드디어 로마로 가는 길이 열리게 된 것인데 김영옥은 이때의 공로로 명예훈장 다음가는 영예인 수훈십자장을 받게 된다. 이후 100대대는 로마 인근에 주둔하면서 대기 중이었는데 본토에서 모든 훈련을 마친 442 연대가 5월 말에 안치오에 도착했고 함께 싸우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미군 지휘부는 1944년 6월 11일에 442 연대를 34사단에 배속시킨다. 이후 자연스럽게 100대대는 442 연대에 편입되었고 그렇게 두 일본계 부대는 하나로 뭉치게 되었다. 한편 100대대는 공식적으로는 442 연대의 1대대였지만 그간의 엄청난 전훈과 공적을 인정받아 ‘100대대’라는 이름을 그대로 유지하게 되었고 부대 대통령 표창을 받는 영광을 누렸다. 이제 100대대의 명성을 이어받아 상급 부대인 442 연대가 실력을 보여줄 차례였다.
“끝장을 볼 때까지 싸운다!(Go for broke!)"
프랑스 브뤼에르에서 대통령 표창을 받는 442연대 병사들 (1944년 11월)
100대대를 보충받아 신규 편성된 442 연대는 로마를 거쳐 중북부의 토스카나(Toscana)로 진군한다. 6월 26일에 이들의 첫 전투가 벌어졌는데 장소는 피사(Pisa)와 피렌체(Firenze)가 멀지 않았던 수베레토(Suvereto)의 벨베데레(Belvedere) 마을이었다. 442 연대는 마을의 독일군을 소탕하기 전에 입구와 출구에 미리 부대원들을 배치하였고 측면에서 기습공격을 했다. 이후 마치 토끼몰이를 하듯이 독일군을 몰아붙였는데 이들은 이미 기다리고 있던 미군의 매복 공격을 받으며 무너지게 된다. 영리한 작전과 병사들의 용맹함이 결합되어 최상의 결과를 낳았다. 당시 442 연대 병사들은 때로 사거리가 멀어 포병 지원이 없는 상황에 처했는데 기다리지 않았고 즉시 공격을 하며 스스로 기회를 만들었던 것이다. 7월 한 달 동안 442 연대는 계속 북진했고 1000명 이상의 독일군을 사살했고 300명 이상을 포로로 잡는 전과를 올렸다. 9월 11일에 442 연대는 5군을 떠나 제7군 소속 36사단에 배속되었고 다음 목표지로 가기 위해 나폴리 항구로 이동하였다. 이것은 이들의 다음 목표가 다시 한번 바다를 건너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442 연대는 9월 30일에 남 프랑스의 마르세이유(Marseille)에 상륙했다. 당시 북 프랑스에서는 노르망디 상륙을 통해 독일군을 밀어붙였고 8월 25일에 파리가 해방되었다. 이제는 남 프랑스 일대의 협공을 통해 잔여 독일군을 프랑스에서 밀어버릴 차례였고 이에 442 연대도 가담하게 된 것이다. 이들은 10월까지 도보와 열차를 통해 프랑스를 종단하며 북쪽으로 이동했는데 그 거리가 자그마치 800 km였다. 이들은 아비뇽(Avignon)과 와인으로 유명한 론(Rhone) 계곡을 지나서 동부 프랑스의 보쥬(Vosges) 산맥 일대에서 작전을 펼쳤는데 독일군은 이곳에서 무너지면 이제 다음 전장은 독일 본토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결사적으로 대항했다. 더불어 험준한 산악 지형에서 고지전을 펼치는 가운데 연대원들은 무섭게 내리는 가을비, 진흙 밭 및 안개 등으로 인해 점점 심신이 지쳐갔다. 당시 이들의 주요 교전지 중 한 곳은 독일 국경에서 멀지 않은 작은 마을 브뤼에르(Bruyères)였는데 독일군은 이곳을 강력한 진지로 강화해 놓은 상황이었다. 442 연대는 10월 15일에 36사단의 다른 부대들과 함께 본격적인 공격에 들어갔다. 232 공병중대가 선제적으로 도로의 지뢰 제거를 진행하는 병사들은 가운데 마을 주변의 울창한 숲을 통해 공격을 개시했다. 이곳을 방어하는 독일군은 친위대 경찰연대와 척탄병(Grenadier) 연대의 병사들이었는데 기관총, 대전차포를 적절히 활용해 공격하는 미군을 필사적으로 막고 있었다. 442 연대 또한 마을 주변의 고지들을 하나씩 점령하면서 전진했는데 독일군 돌격포(Strumgeschutz: 포탑이 고정되어 있으며 적 전차를 기습 공격하는 역할을 했던 독일군의 대전차 기갑차량)와 전차의 공격에는 대전차용 바주카포를 활용하며 대응했다. 이러한 치열한 공격과 방어가 사흘간 지속되었는데 한 마디로 ‘전투 프로 對 전투 프로’의 대결이었다. 10월 18일에 442 연대는 마침내 마을 중심부를 장악할 수 있었고 현지 주민들을 만났는데 지하실에서 나온 프랑스 주민들은 아시아계 미군 모습에 어리둥절했지만 곧 이들을 열렬히 환영했다. 이후 10월 23일까지 격렬한 시가전을 통해 인근의 비퐁텐(Biffontaine) 마을도 해방시켰는데 전투에서 숨 돌릴 틈도 없이 이들에게 다음 임무가 떨어졌다. 비퐁텐에서 불과 몇 킬로미터 동쪽으로 가야 했는데 이곳에 미군 1개 대대가 포위되었던 것이다.
고립된 대대는 같은 36사단 소속의 141 연대 1대대로 ‘텍사스 출신’ 병력 275명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독일군의 2개 연대에 포위되었다. 이들은 미국-멕시코 전쟁 당시 포위된 텍사스의 알라모(Alamo) 요새에서 투쟁한 이들에게 영감을 얻어 ‘알라모 대대’ 또는 ‘사라진 대대(Lost battalion)’로 불리었다. 보쥬 산맥의 전투가 격렬하다 보니 양군 간에 부대가 서로 뒤엉키게 되었고 결국은 고립되었던 것이다. 36 사단장 달퀴스트(John E. Dahlquist) 장군은 442 연대에게 알라모 대대의 구출을 위해 10월 27일 새벽에 출동하도록 명령한다. 산악에서 10월 말의 짙은 안개와 추위가 덮치는 가운데 442 연대 병사들은 지금까지 투입된 전투 중 가장 힘든 시간을 겪게 된다. 나쁜 날씨에 더불어 쏟아지는 포격 속에 숲의 나무들에 포탄이 부딪치며 파편이 튀었고 독일군이 설치한 부비 트랩에 많은 병사들이 전사하거나 부상을 입었다. 독일군의 포화가 심해지자 442 연대 병사들조차 잠시 머뭇거리게 되었는데 보다 못한 3 대대장 알프레드 퍼설(Alfred Pursall) 중령이 권총을 휘두르며 선두에서 이들을 독려했다. 곧 병사들은 하나, 둘 일어나 적에게 돌격했는데 일본어로 만세를 뜻하는 ‘반자이(Banjai)’를 외치며 공격한 것이다(사실은 반자이가 아닌 온갖 고성과 욕설의 혼합이었다고 한다)! 알아들을 수 없는 괴성을 지르며 착검한 채 뛰어오는 아시아계 병사들의 모습에서 독일군은 상당한 공포를 느꼈다. 수류탄을 던지고 백병전을 겪은 후에 연대원들은 마침내 독일군 방어진지를 돌파할 수 있었고 10월 30일에 211명의 알라모 대대를 구출하게 된다. 하지만 전투 과정에서 무려 800명의 442 연대 병사들이 전상을 입게 되었는데 어떤 소대는 소대원이 불과 2명만 남아 있었다. 10월 초 보쥬 산맥에 들어갔을 때 2900명 이상을 헤아리던 연대 병력이 800명 미만으로 줄게 된 것이다. 병사들은 때로는 자신들에게 내려진 명령이 자살임무 같다고 느낄 때도 있었지만 이들은 어찌 되었던 주어진 임무를 묵묵히 완수해 낸다. 이러한 과정에서 “끝장을 볼 때까지 싸운다(Go for broke: 원래는 도박장에서 ‘올인’을 한다는 의미이다)"라는 연대 구호를 문자 그대로 실행한 442연대원들의 용맹함에 찬사가 쏟아졌고 이들은 전 미군의 관심을 받게 된다.
스스로 전설이 되다
의회 황금장 수여에 서명한 오바마 대통령과 함께한 442연대 참전용사들
보쥬 산맥에서의 격전 후에 442 연대는 남 프랑스로 이동하며 프랑스-이탈리아 국경을 경비하는 임무를 맡게 된다. 그동안의 사투와 비교하면 이것은 휴식과 같은 시간이었고 실제로 병사들도 상황을 즐기면서 부대는 재충전을 하게 된다. 1945년 3월에 442 연대는 4개월 간의 경비 임무를 마치고 다시 한번 전선으로 이동했다. 당시 442 연대는 분리되어 임무를 수행했는데 보병들은 북부 이탈리아 전선으로 이동했고 522 야전포병대는 독일 서부의 라인란트(Rheinland)로 파견을 나가게 된다. 522 포병대는 442 연대 중 유일하게 독일에서 전투를 수행한 부대가 되었다. 이들은 독일 서부에서 남부로 이동하며 임무를 수행했는데 4월 말에는 바이에른주의 후어라흐(Hurlach) 인근에서 유대인 강제수용소를 해방하기도 한다. 뼈와 가죽만 남은 수용소 생존자들의 모습과 산더미처럼 쌓인 시체를 보며 사선을 넘어온 강인한 병사들조차 충격에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한편 442 연대 본대는 이탈리아 북부의 리보르노(Livorno) 항구로 이동했는데 과거의 제5군에 재합류하여 92사단에 배속된다. 92 사단은 미군 유일의 흑인만으로 구성된 전투 부대였는데 같은 유색인종인 일본계 연대가 이들과 힘을 합치게 된 것이다. 당시 이곳의 연합군은 독일군의 최후 방어선인 고딕 방어선 (Gothic Line)에 막혀 이렇다 할 전진을 못하고 있었다. 독일군은 특유의 장기를 살려 이탈리아 산맥 위에 일련의 강력한 콘크리트 요새들을 건설했는데 수많은 기관총좌와 벙커로 가득 차 있었다. 독일군 사령관 알베르트 케셀링 원수는 비록 독일이 전쟁에서 패할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전투에서까지 패하고 싶지는 않았다. 한때 유럽의 거의 전부를 점령했던 나치의 마지막 남은 알량한 자존심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나치의 자존심’에 마지막 구멍을 내야 하는 임무가 442 연대에 배정되었다. 1945년 4월 3일 442 연대는 고딕 라인의 서부 지역에 배치되었는데 지난 수개월 동안 ‘늘 해왔듯이’ 독일군 고지를 향해 묵묵히 돌격하기 시작했다. 부대는 몬티뇨소(Montignoso), 브루지아나(Brugiana)와 오르트노보(Ortnovo) 등의 서북부 산악 지역을 돌파하며 북상해 나아갔다. 마침내 4월 23일에는 이탈리아 지역 파르티잔과 함께 주요 철도 교차점인 아울라(Aulla)에서 독일군을 포위하며 이들의 숨통을 끊어 놓았다. 이것으로 이탈리아 전선에서 주요 전투는 사실상 종결이 되었고 5월 8일에 독일이 항복하며 유럽에서 전쟁이 끝나게 된다.
442 연대원 모두 전쟁의 종결을 환영했고 순차적으로 귀국길에 오르게 된다. 아직 일본과의 전투가 진행되고 있었기에 김영옥 대위 같은 이들은 태평양 전선으로 전출을 희망했다. 하지만 8월 15일에 일본 역시 항복했고 모든 부대원들이 다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442연 대원들은 귀국하면서 전쟁 영웅으로 환영받았는데 이것은 단순한 미사여구가 아니었다. 2년이 안 되는 전쟁 기간 동안 442연대원들은 21개의 명예훈장, 52개의 수훈십자장, 300개 이상의 은성무공훈장과 4000개 이상의 동성무공훈장을 수여받았다. 또한 대통령 부대 표창 8회를 받았고 20개 이상의 프랑스와 이태리의 무공 훈장도 수여받았다. 비록 차별과 견제를 받는 일본계 2세 부대로서 이들의 시작은 미약했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부대를 미군 역사상 최다 훈장을 받은 ‘최고의 부대’로 만들며 스스로 전설을 써 내려갔다. 이들에 대한 찬사는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이어졌는데 1962년에 텍사스주는 텍사스 출신의 ‘알라모 대대’를 구한 공적을 기려 442 연대 베테랑들을 ‘명예 텍사스 주민(Honorary Texans)’으로 선포하였다. 시간이 흘러 2010년 10월에 미국 의회는 442 연대에 대해 ‘미국 의회 황금장’서훈을 의결하였고 1년 후에 생존한 442 연대 부대원들을 대상으로 수여된다. 이 모든 것은 부당한 차별과 편견에 대항하여 묵묵히 자신들의 의지를 보여주고 용기로서 증명해 낸 442 연대 니세이 부대원들의 공로이다. 더불어 이들의 ‘해외에서의 승리’를 통해 미국 내 수용되었던 일본계 미국인들도 ‘국내에서의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이들이 전쟁 당시 보여 주었던 행동은 “나를 의심하고 인정하지 않는 이들에게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라는 어려운 질문에 대한 가장 인상적인 답변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