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2 연대는 전투에서 일본계 미국인들의 조국에 대한 충성스러움과 용맹함을유감없이 보여주었다.”
-미군 제5군 사령관 마크 클라크 장군 -
2024년 7월 22일 미국 버지니아주 포트 벨부아르에 있는 미 육군 국립박물관에서는 매우 특별한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이 날의 주인공은 행사장소인 육군 박물관과는 다소 거리가 멀 것 같은 사람이었는데 바로 프로야구단인 샌디에이고 파드레스(San Diego Padres)의 포수 카일 히가시오카(Kyle Higashioka)였다. 그는 이날 행사 주최 측으로부터 매우 특별한 메달을 증정받았는데 이것은 일본계인 그의 할아버지의 과거 참전 경력과 관련이 있었다. 행사는 최초의 아시아(일본)계 미 육군참모총장이었던 에릭 신세키(Eric Shinseki) 예비역 대장의 주도로 진행이 되었는데 그는 대단히 감격한 표정이었다. 이날 히가시오카는 자신의 할아버지를 대신하여 미 의회 황금장(US Congressional Gold Medal) 복제품을 대신 수여받게 되었는데 그 또한 매우 기뻐하면서도 상기되어 있었다. 히가시오카의 할아버지는 2차 대전 중 일본계 병사들로만 구성된 특별한 부대에서 근무했고 다른 병사들과 함께 유럽 전선에서 독일군을 상대로 용감히 싸웠다. 사실 일본계 병사들은 독일군들만 상대했던 것이 아니었는데 이들은 당시 미국 국내에 존재했던 일본계에 대한 수많은 편견 및 차별과도 맞서야 했다. 일본계 병사들이 훗날에도 기억되고 칭송되는 것은 이러한 투쟁의 과정에서 보여준 그들 만의 대응 방식 때문이었는데 이들은 문자 그대로 끝장을 보고자 했다. 하지만 그 시작은 대단히 미약했고 혼란스러웠다.
미국 국적의 이방인들
진주만 공습 직후 성난 미국인들에 의해 일본이 선물한 벚나무가 베어져 있다 (워싱턴DC)
1941년 12월 7일 일본 제국의 전투기들이 하와이 진주만을 공격했을 때 미국인들의 분노는 통제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특히 일본의 선전포고가 공격 시간 이후 전달되었다는 사실(선전포고문을 작성하는 대사관의 타이핑 작업이 늦게 되었다) 만으로 ‘비열한 일본인’에 대한 이미지가 미국인들에게 각인되었다. 즉시 전국적으로 反일본은 물론 反아시아 광풍이 불기 시작했다. 수도 워싱턴 DC에는 1912년에 일본이 우호의 상징으로 선물한 벚나무가 있었는데 성난 군중들에 의해 베어져 나갔고 많은 일본 및 아시아계 상점이 공격당한다(이때부터 1947년까지 워싱턴에서는 벚꽃 축제가 열리지 않았다). 특히 캘리포니아 등 미국 서부 지역에서는 일본인과 외모 구분이 거의 되지 않는 중국 및 다른 아시아계 미국인들이 자신이 일본계가 아님을 밝히느라 곤욕을 치러야 했다. 막상 일본군의 직접적인 공격을 받은 하와이는 좀 더 상황이 복잡하였는데 이곳의 일본계 주민들 숫자는 15만 명으로서 전체 하와이 인구의 3분의 1 이상이었다. 이들 대부분이 하와이에서 태어나고 본인을 미국인으로 생각했는데 이는 본토에 있는 대다수의 일본계 주민들도 마찬가지였다. 1941년 12월 7일 시점에서 하와이를 제외한 미국 땅에는 총 12만 7천 명의 일본계 미국인이 살고 있었는데 이중 대부분인 11만 2천 명이 서부의 태평양 연안에 거주하고 있었다. 이중 8만 명 이상이 이민 2세대(일본어로 니세이 二世) 이후의 사람들로서 미국에서 태어난 미국 국적자였다. 이제 미국은 일본을 비롯한 독일, 이탈리아와 전쟁 상태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미국은 독일계나 이탈리아계 대비 외모가 두드러지는 일본계 미국인들의 처리를 놓고 고민을 하게 된다. 이들 중 다수는 분명 미국인이었고 미국에 충성할 것으로 생각되었지만 지금은 온갖 상황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 전시라는 것이 문제였다. 워싱턴에는 여전히 이들의 충성심에 의구심을 갖는 고위 관료들이 많았다. 결국 미국 정부는 일본계 미국인들에 대해 보다 확고한 일련의 행정적 조치를 취하게 된다.
1942년 2월 19일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Roosevelt) 대통령은 ‘행정명령 9066호’에 서명했다. ‘행정명령’이라는 건조한 단어만 보면 단순한 정부의 행정조치 정도로 치부할 수 있겠지만 사실 이것이 담고 있는 내용은 단순한 그 글자 이상의 엄청난 것이었다. 이 행정명령의 주요 내용은 국가 안보에 위협이 되는 사람들을 미국 내륙의 황량한 사막지대로 강제수용한다는 것이었다. 정부의 공문을 보면 수용 대상이 반미국적인 외국인들이나 적국의 시민들 또는 간첩행위자에만 해당하는 것으로 생각되겠지만 사실 이 행정명령의 주 타깃은 따로 있었다. 바로 서부의 태평양 해안지대에 거주 중인 12만 명에 달하는 일본계 미국인들이 그 대상이었다. 미국 정부는 이들 일본계 미국인들을 분리 수용 함으로써 국내 보안을 강화하고 미래에 발생할지 모를 ‘재난의 불씨’를 제거하고자 했다. 문제는 이들 중 상당수가 이미 미국 국적의 미국인이었다는 점이었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미국 정부는 단지 인종과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자신의 국민들을 강제수용한 하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한 가지 예외가 있었는데 하와이에 있는 일본계 주민들이었다. 주민의 3분의 1인 이들이 사라질 경우 경제, 행정, 사회, 교육 등 모든 면에서 하와이의 모든 기능이 마비될 것으로 예상되었다. 최종적으로 1800명 정도의 인원들만 강제수용되었으며 다수인 일본계는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본격적인 일본계의 이주 및 수용은 1942년 3월 24일부터 시작되었는데 이날 서부 워싱턴주 베이브릿지(Bay bridge)에 거주하던 일본인 227명이 캘리포니아의 만사나르(Manzanar)로 이동하도록 명령받았다. 이들은 거주하는 집에서 퇴거당했는데 대부분의 경우 여행용 슈트 케이스 몇 개만 들고 침울한 표정으로 임시 거주지로 향했다. 눈치가 빠른 일부 사람들은 재산이나 사업체를 미리 처분하기도 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렇지 못했고 재산 상의 손해를 보게 되었다. 곧 캘리포니아 전체에서 일본인들의 강제 이동이 진행되었고 8월까지는 모두 17개의 임시 수용소(Civilian Assembly Centers)로 옮기게 되었다. 일본계 주민들과 더불어 미국과 협력하는 남미 국가에서 추방된 독일계나 이탈리아계 외국인들 역시 수용되었는데 이들은 오천 명 정도로 그 숫자가 많지는 않았다. 갑자기 12만 명의 사람들을 수용해야 하는 상황에서 서부방위사령부는 육군 공병대에 임시수용소 건설을 지시했다. 임시 수용소 시설은 대부분 이전에 경마장이나 박람회장이었던 것을 개조해서 사용하였고 여러 가족들 간에 분리되어 거주할 수 있도록 칸막이 등이 만들어졌다. 더불어 필수 시설인 공동 화장실이나 세탁시설 및 식당 등이 신속하게 지어졌다. 물론 지역 주민들은 자신들 거주지 인근에 일본계가 들어오는 것에 강하게 반대했지만 전시인 상황인지라 모든 항의는 묵살되었다.
임시 수용소에서 잠시 시간을 보낸 일본계 주민들은 이후 ‘재정착 센터(Relocation centers)’라 불리었던 메인 수용소에 수용되었는데 캘리포니아, 콜로라도, 유타, 와이오밍 등 미국 7개 주에 10개가 있었다. 각 수용소는 대략 만 명 정도의 인원들이 거주했는데 대개 황량한 사막 지대에 철조망이 둘러쳐 있었다. 수용자들은 군대의 막사 같은 건물에 거주했다. 건물 밖에는 사막의 먼지바람이 휘몰아쳤고 사람들은 연신 콜록대며 눈과 입을 막았다. 막사 내부는 상당히 비좁았는데 사생활을 보장받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계속되어야 했다. 수용자들은 함께 텃밭을 가꾸었고 합창단을 만들거나 야구, 미식축구 같은 운동에 함께 참여하여 교류를 유지하였다. 이러한 활동들을 통해 수용자들은 같은 공동체로서 일체감을 공유했고 수용소에서의 단조로운 생활을 견디고 있었다. 비록 이곳의 수용소 생활이 나치의 강제수용소나 일본군 포로수용소의 끔찍한 환경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수용자들은 의기소침했고 마음 한구석에는 끊임없는 의문이 맴돌고 있었다. 수용자 중 많은 이들이 미국 국적자임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잠재적인 적’으로서 강제로 수용되어 있는 이 부조리한 상황에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혼란을 겪기 시작한 것이다. 비록 이들이 미국의 주류인 백인으로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이들 대부분은 자신을 미국인으로 여겨왔다. 하지만 당국의 태도는 명백히 아시아계에 대한 인종적인 편견을 바탕으로 자신들을 ‘미국의 적’으로 내몰고 있었다. 거의 모든 수용자들이 이러한 고민을 했는데 결국 이에 대한 결론은 “자신이 미국인(I am an American)”이라는 것이었다. 수용자들은 곧 자신들의 정체성과 애국심을 정부에 전달하기 위해 노력한다. 특히 젊은 남자들은 보다 적극적인 방식을 선택했는데 자신들의 애국심을 증명하기 위해 군대의 문을 두드린 것이다. 이들의 열의가 먼저 표출된 곳은 일본계의 숫자가 가장 많았던 하와이였다.
“나는 미국인이다(I AM AN AMERICAN!)”
미군 입대에 앞서 복무선서를 하는 일본계 미국인들 (니세이)
진주만 공격 직후 미군은 일본군의 상륙을 예견하여 해안 지대에 방위군인 298/299 연대를 배치한다. 문제는 이들 중 상당수가 일본계라는 점이었는데 미군 지휘부는 이들이 아군에게 총부리를 돌릴 것을 우려했고 결국 지급했던 스프링필드 소총과 탄환을 회수한다. 결국 일본계 병사들은 하와이 방어에 참여할 수 없었는데 이들 입장에서는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이후 계엄령이 선포된 하와이에는 델로스 에몬스(Delos Emmons)라는 신임 군정사령관이 부임하게 된다. 그 역시 일본계 주민들을 신뢰하지 않았던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델로스는 적어도 일본계 주민에게 애국심을 증명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 방위군에서 제외된 일본계 대학생 ROTC생들이 주축이 되어 대학승리봉사단(VVV: Varsity Victory Volunteer)이라는 일종의 노동 및 근로지원부대가 창설되었다. 이것은 일본계 주민들에게 본격적인 전투 부대 창설을 위한 커다란 첫걸음으로 인식되었다. 이후 일본계에 대한 공식적인 징집이 시작되었는데 1942년 5월에 1400명 이상의 일본계 지원자들이 최종적으로 선발되었다. 한편 미 당국은 일본군의 하와이 침공을 우려했고 이 경우에 일본계 병사들이 안보 상의 문제가 될 것을 우려했다. 일본계 병사들은 6월 5일 군사훈련을 한다는 명분 하에 미국 본토로 은밀히 출항하게 된다. 이들은 ‘하와이 임시 보병대대’라는 잠정적인 부대명으로 불리게 되었는데 상위 부대가 없는 이른바 ‘고아 부대’였다. 미국 서부의 오클랜드(Oakland) 항구에 도착해서야 이들은 ‘제100대대’라는 정식 부대명을 부여받는다. 최초의 미군 소속 일본계 전투 부대가 탄생하는 순간이었지만 그 전후 배경은 그다지 고무적이지 않았다. 이후 100대대는 3량의 분리된 열차에 실려 미 대륙을 횡단했고 최종 목적지인 5 대호 근처 위스콘신의 캠프 맥코이(Camp McCoy)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백인 장교 및 부사관의 지휘아래 본격적인 훈련이 시작되는데 일본계 병사들은 끊임없이 자신들의 애국심과 충성심을 시험하려는 백인 교관들의 날 선 의도와 냉랭한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반면에 부대 주변의 민간인들과는 대체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는데 한 번은 인근 호수에서 익사할 뻔한 민간인을 100대대 병사가 구조한 사건도 있었다. 캠프 맥코이에서 6개월 간의 기본 훈련을 마친 병사들은 1943년 1월에 상급 훈련 과정을 위해 남쪽 미시시피의 캠프 셸비(Camp Shelby)로 이동했다. 보다 실전적인 전투기술 연마가 실시되었는데 이곳의 훈련 강도는 이전 훈련장보다 훨씬 더했지만 병사들 누구 하나 불평하지 않았고 어려움을 견디어 내고 있었다. 자신들에 대한 보이지 않는 차별 속에 일본계로서 일종의 오기심이 발동했던 것이다. 결국 100대대 병력들은 일련의 훈련 과정을 대단히 우수한 성적으로 마치게 되었는데 이것은 미군 지휘부에 깊은 인상을 남기게 된다. 이후 추가적인 일본계 미국인 부대 설립이 결정되었다. 이 과정에서 미국 정부는 일본계 지원자에 대해 설문조사를 실시하게 되는데 내용 중 이들이 일본에 충성하는지를 물어보는 항목이 있었다. 이것은 여전히 일본계에 대한 불신이 존재한다는 증명이었고 화가 난 일부 인원들은 설문지를 공란으로 제출하는 것으로 자신들의 분노를 표출했다. 우여곡절 끝에 1943년 2월에 하와이에서 3000명, 본토에서 800명이 모여 ‘제442보병연대’가 탄생하게 된다. 본토 출신 지원자가 상대적으로 적었던 것은 이들 가족들이 대부분 수용소에 갇혀 있다는 점도 작용을 했다. 442 연대는 3개의 보병대대에 더불어 522 야전 포병대대와 대학승리봉사단(VVV) 출신들이 주요 부대원이었던 232 전투공병중대 등으로 구성되었다. 442 연대 역시 미시시피의 캠프 셸비에서 훈련을 받았는데 7월에는 인근 루이지애나에서 야외기동훈련까지 마치고 돌아온 100대대와 합류할 수 있었다. 100대대 병사들은 스스로 부대 구호를 만들었는데 바로 “진주만을 기억하라(Remember Pearl Harbor)”였다. 이것은 다른 미국인들에게 같은 미국인으로서 자신들의 충성심을 보여주고 싶은 강한 열망에서 나온 것이었다.
먼저 훈련을 받았던 선배로서 100대대는 이제 전장으로 나갈 모든 준비를 갖추었다. 한편 미국 정부는 이들이 같은 혈통인 일본군과 맞서기보다는 유럽 전선에 파견하여 독일 및 이탈리아군과 싸우도록 내부적인 방침을 정하였다. 그리고 두 달 후인 8월 말에 100대대는 마침내 대서양을 건너 이동했는데 그들의 목적지는 최전선이 아니었다. 이들이 간 곳은 이미 연합군이 점령한 북아프리카 알제리의 오랑(Oran)이었는데 사실 당시 연합군 총사령관이던 아이젠하워(Dwight D. Eisenhower) 장군이 일본계 병사들의 전입을 강하게 거부했다. 하지만 이탈리아 침공을 목전에 둔 제5군 사령관 마크 클라크(Mark Wayne Clark) 장군이 100대대의 훈련 성과에 따른 잠재력을 높이 평가했고 이들을 자신의 휘하에 있는 34 보병사단 133 연대에 배속시켰다. 전선으로 이동하기 전까지 이들의 임무는 본격적인 전투보다는 그저 단순한 독일군 포로 경비 위주의 평이한 업무였다. 드디어 9월 19일에 34사단이 출동했고 이에 배속된 100대대 역시 3일 후에 이탈리아 중서부의 살레르노(Salerno)로 이동하게 된다. 100대대가 투입된 살레르노 일대는 이탈리아 최고의 경관을 자랑하는 지중해의 명승지였지만 이들과 대항하는 적들은 전혀 호의적이지 않았다. 100대대는 북동쪽의 교통 요충지인 베네벤토(Benevento) 방향으로 진격하며 다양한 전투를 경험한다. 이곳의 독일군은 매우 거세게 저항했는데 독일군의 기관총과 벙커 앞에 물불을 안 가리고 돌격했던 많은 100대대 병사들이 전상을 입게 된다. 그 과정에서 이들의 전투본능이 드러나는데 전투 개시 후 두 달 동안 100대대는 수훈십자장(Distinguished Service Cross)을 6개나 받을 정도로 그 용맹함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다가오는 시련들의 서막에 불과했고 일본계 병사들 앞에 이제부터 본격적인 고행이 펼쳐지려 하고 있었다. 그 장소는 이탈리아 중부의 ‘몬테 카시노(Monte Casino)’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