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란드 지원을 호소하는 스웨덴 의용군의 모집 포스터 (포스터 상단의 Finlands sak är vår는 “핀란드와 우리의 대의는 똑같다”라는 의미이다)
핀란드가 소련의 공격을 받은 시점 전후로 유일한 동맹국은 발트해 건너의 에스토니아였다. 하지만 이미 10월에 에스토니아는 소련군의 군홧발에 짓밟히게 되었고 핀란드는 외로이 투쟁을 해야 하는 처지였다. 사실 스웨덴 정부와 많은 국민들이 핀란드의 불행한 상황에 동정심을 가졌다. 하지만 국제관계는 동정심으로 해결될 것이 아니었고 스웨덴 정부는 비록 중립은 아니지만 철저히 ‘비교전국(Non-belligerent)’임을 선언했다. 핀란드는 스웨덴에 정규군 파병을 요청했지만 소련군과의 승산 없는 싸움에 휘말리기를 꺼려하는 스웨덴 입장에서는 절대로 수용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스웨덴은 18세기 러시아 표트르 대제의 침공 이후 일종의 ‘러시아 공포증(Russia Phobia)’을 가지고 있었고 소련군이 자국 땅에 오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 다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런 가운데 전쟁 초기 핀란드군이 괴멸되어 밀리기 시작하자 스웨덴 국민들 사이에 “핀란드를 도와야 한다”는 여론이 들불처럼 퍼져 나갔다. 순식간에 스웨덴 전국에 걸쳐 125개의 모집소가 설치되었는데 정부는 자국의 비교전국 상황을 고려하여 처음에는 모병 포스터조차 제작하지 못하게 했고 민간에서 자발적으로 모병을 진행하는 것으로 보이게 했다. 이러한 스웨덴의 상황에 힘을 보태기 위해 핀란드 외무장관 엘야스 에르코(Eljas Erkko)가 12월 초 스톡홀름으로 갔고 “최대한 많이, 최대한 빨리 핀란드로 와달라”는 만네르하임 총사령관의 절박한 매시지를 전달했다. 수많은 스웨덴 국민들이 의용군에 지원했는데 주로 핀란드 내전에 참가했던 예비역 장교들이나 스탈린과 공산주의를 혐오하는 이들이 다수였고 소련의 야만적 침략에 분개하여 지원한 순수한 동기를 가졌던 사람들도 있었다. 심지어 구스타프 아돌프(Gustav Adolf) 왕자까지 의용군에 합류하고자 했지만 왕실의 일원으로서 손자의 대외적 상징성을 고려한 할아버지 ‘구스타프 5세’의 반대로 참전할 수 없었다. 최초에 스웨덴 정부는 ‘외견상 중립’에 대한 대외적 파장을 고려하여 지원자 숫자를 4천 명 이내로 제한하려 했다. 하지만 의용군에 합류하려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렸고 불과 일주일 만에 400명의 스웨덴군 장교를 포함한 ‘만 2천5백 명’ 이상의 사람들이 지원했다. 여기에는 같은 중립국이었던 노르웨이에서 온 7백여 명의 지원자들도 포함되었다. 신체검사 등을 거쳐 최종적으로 8천7백 명이 전투에 적합한 것으로 선발되었다. 또한 스웨덴 각계의 지도층을 중심으로 핀란드를 돕기 위한 ‘핀란드 위원회(Finlandskommittén)’가 구성되었는데 위원회는 의용군의 무기와 장비를 구매하기 위한 자금을 모금했다. 총 20억 크로네(현재 가치로 약 US$ 3억 1천만)가 모금되어 전달되었는데 이것은 당시 핀란드 년간 국방예산의 두 배 가까운 금액이었다. 비슷한 모병과 모금 등이 노르웨이, 덴마크, 헝가리 및 미국에서도 벌어졌다. 한편 스웨덴은 핀란드에 직접 무기를 지원하기도 했는데 13만 5 천정의 소총과 5천만 발의 탄약, 기관총 그리고 330문 이상의 야포, 대전차포 및 대공포가 패전의 위기에 처한 핀란드에 긴급히 수혈되었다.
지원자들의 지휘관은 스웨덴 예비역 중장 출신이자 핀란드 내전의 노장인 71세의 에른스트 린더(Ernst Linder)가 맡았는데 그는 1924년 파리 올림픽에 승마 대표로 참가했던 특이한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린더 장군은 의용군 부대를 세 개의 연대급 전투단으로 구성하였고 각 전투단에는 보병을 중심으로 중화기 중대, 포병대 및 노련한 예거 중대(Jaeger: ‘사냥꾼’이란 뜻으로 일종의 특수정찰대)가 포함되었다. 린더는 자신과 같이 핀란드 내전에 참가한 경험이 있던 노련한 칼 에렌스베르드(Carl August Ehrensvärd: 계속 군에 남았던 그는 1948년에 스웨덴 육군 참모총장이 된다) 중령을 참모장으로 삼았다. 또한 270명으로 편제된 항공대도 만들어졌는데 ‘제19 의용항공대(Flygflottilj 19)’로 명명되었다. 이들은 스웨덴에서 원조한 12대의 영국제 글레디에이터(Gladiator) 복엽 전투기, 5대의 하트(Hart) 경폭격기 및 기타 비행기 8대 등을 조종하여 전투, 폭격 및 정찰 임무에 투입될 계획이었다(의용항공대는 전투 중 12기의 소련군 전투기를 격추하는 전과를 올린다). 이들 비행기의 숫자는 당시 미약했던 스웨덴 공군력의 30%에 해당되었다! 이제 해야 할 일은 막 편성된 의용군들을 핀란드로 이동시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스웨덴 정부는 이들이 스웨덴 영토에서 훈련을 하거나 집합하여 이동하는 것을 일절 허락하지 않았는데 의심의 눈초리로 스웨덴을 바라보던 소련을 자극할까 두려워했던 것이다. 이들은 우여곡절 끝에 스웨덴과 핀란드의 국경에 있는 도시 하파란다(Haparanda)에 집합했고 여기서 삼삼오오 핀란드로 입국했다. 이후 핀란드 서부의 케미(Kemi)로 이동하였는데 그곳에서 단기 속성 훈련을 받게 된다. 지휘관인 리더 중장은 1월 초에 핀란드군의 만네르하임 원수와 만났고 스웨덴 의용군의 구체적인 전투 참여에 대해 함께 논의하였다. 최종적으로 의용군은 핀란드 북부 전선 일대에 투입되기로 결정되었다. 1월 한 달 동안 이들은 핀란드의 거친 설원 이동에 필요한 스키 기술을 연마했고 동계 전투를 대비한 체력 향상에 주안점을 둔 훈련을 지속했다. 아직 전투에 투입되기 전이었지만 이때만 해도 전반적인 상황은 핀란드군이 소련군을 도처에서 격파하고 있었으므로 모두들 고무적인 분위기였다. 그렇게 훈련에 매진하던 의용군들에게 드디어 본격적인 전투에 참여할 기회가 오게 된다. 때는 1940년 2월 초였고 장소는 핀란드 북동부 일대였는데 상황은 1월의 긍정적인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게 전개되고 있었다.
짧았지만 의미 있었던 투쟁
파괴된 소련군 전차를 살펴보고 있는 스웨덴 병사
1939년 12월 이후 보여준 소련군의 어처구니없는 졸전에 스탈린은 격노하였는데 사실 이것은 예견된 패배였다. 스탈린이 몇 년 전에 벌였던 ‘대숙청(Great purge)’에 의해 소련군 장교의 거의 80%가 전시도 아닌, 평시에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유능한 지휘관들이 빠진 자리를 오직 스탈린에게만 충성하던 무능력자들이 차지했고 소련군은 제대로 된 작전도 지휘도 할 수 없었다. 스탈린은 국면 전환을 위해 우선 지휘관부터 교체한다. 그는 자신의 오래된 술친구였지만 무능했던 국방인민위원 보로실로프(Kliment Yefremovich Voroshilov)를 해임했다. 러시아 내전의 용장 세묜 티모센코(Semyon Konstantinovich Timoshenko)가 핀란드 전선의 신임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는데 스탈린은 티모센코 휘하 병력을 90만 명으로 증원했다. 병력과 장비를 보충한 티모센코는 2월 1일에 만네르하임선의 카렐리야 지협을 포함한 全전선에서 30만 발 이상의 대대적인 포격을 개시하며 총공격을 감행한다. 이 공격에서 소련군은 전차와 보병, 항공기까지 상호 결합된 ‘보다 유기적인 작전’을 전개하였다. 마치 거대한 쇠망치가 두드리는 듯한 소련군의 포격 속에서 핀란드군은 모든 전선에서 동시에 후퇴하기 시작했고 전열이 무너졌다. 조국을 잃어버릴 수도 있는 ‘진짜 위기’가 시작된 것이다. 이때가 바로 스웨덴 의용군이 훈련을 마치고 본격적인 전선 배치를 앞두고 있던 시기였다.
소련군의 공격으로 남부 카렐리야 지협의 핀란드군 주방어선이 무너지고 있었고 북부의 핀란드군이 긴급히 남부 주전선으로 투입되어야만 했다. 스웨덴 의용군은 2월 초부터 로바니에미(Rovaniemi)와 케미예르비(Kemijärvi)를 거쳐 북동부 전선의 살라 일대로 스키와 기차를 통해 이동했다. 이들은 이곳에서 핀란드군의 전력을 대체하여 방어전에 투입된다. 살라는 소련 국경 인근에 위치한 핀란드 북동부의 관문으로 이곳이 뚫리면 소련군은 핀란드 중북부를 가로질러 곧장 스웨덴 국경까지 갈 수 있었다. 다시 말하면 소련군에 의해 핀란드가 남북으로 분리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스웨덴 의용군은 살라 일대 방어를 대부분 책임졌고 린더 장군은 이 일대 ‘라플란드 집단군’의 사령관이 되었다. 의용군은 사력을 다해서 소련군을 막았는데 이곳이 뚫리면 자신들의 조국인 스웨덴까지 더 이상 막을 부대가 없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련군은 끊임없이 포격과 항공 공격을 가했고 의용군은 야간에 소규모 정찰을 통해 적에게 치고 빠지는 불의의 일격을 가하곤 했다. 특히 선봉에 있던 예거 중대는 몇 배나 되는 소련군과 근접 전을 벌이며 총검으로 서로 죽고 죽이는 사투를 벌이기도 했다. 이들은 이렇게 소련군 2개 사단을 묶어 놓으면서 남부 전선의 핀란드군에 대한 압력을 경감시켜 주었다. 3월 1일에는 제1 전투단 지휘관인 마그누스 디르센 중령이 소련군 포격에 전사할 정도로 전투가 치열하게 전개된다. 이때가 되자 의용군 모두가 곧 최후의 순간이 다가옴을 직감하고 있었다. 이미 핀란드군의 주전선인 남부의 만네르하임선이 뚫려 있었고 이제는 수도 헬싱키 역시 위태롭게 되었다.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핀란드는 즉시 소련과의 강화를 준비하기 시작했는데 3월 7일에 협상 대표단을 모스크바로 급파했다. 3월 13일에 마침내 핀란드가 소련의 조건을 받아들였고 105일간의 겨울전쟁은 종결된다. 이 순간에도 소련군은 의용군 진영에 포격을 퍼부었는데 ‘제2 전투단’이 주 목표가 되었다. 이 마지막 날 전투에서 9명이 사망했고 그렇게 스웨덴인들의 전쟁은 끝나게 된다.
이제 스웨덴 의용군이 조국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핀란드군 총사령관 만네르하임 원수는 3월 27일 이들 병사들을 스웨덴 국경 근처의 케미(Kemi)에서 직접 전송했다. 그동안 자국을 위해 싸워준 것에 대해 진심 어린 감사를 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40명 정도의 의용군 병사들이 전투에서의 수훈을 통해 핀란드 정부로부터 훈장을 수여받았다. 그리고 많은 아쉬움과 회한을 남긴 채 의용병들은 스웨덴으로 귀국했다. 이들 중에는 1년 후 핀란드가 소련과 다시 ‘계속 전쟁(Continutaion war)’을 수행할 때 ‘스웨덴 의용대대’를 편성하여 계속 싸운 이들도 있었다. 최종적인 통계에 따르면 33명의 스웨덴 의용군이 사망했고 50명이 전투 중 부상을 입었다. 이들의 희생을 무려 2만 6천 명 이상이 사망한 핀란드군과 비교할 수는 없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핀란드의 ‘놀라운 용전’ 뒤에는 스웨덴 의용군과 같이 대의를 위해 뭉친 외국인들의 지원이 있었다는 점이다. 또한 이러한 외부의 지원을 통해 핀란드 국민들은 더욱 용기를 얻었고 자신들이 혼자가 아님을 느끼게 되었다. 결국 이러한 지원에 힘입어 핀란드는 소련이라는 ‘체급이 다른 거대한 적’을 거의 쓰러뜨릴 때까지 난타할 수 있었던 것이다. 휴전 협정의 결과로 핀란드는 국토의 10%를 소련에 넘겼지만 이것은 최초의 협상 제안보다는 다소 완화된 조건이었고 무엇보다도 다른 나라들처럼 소련방에 편입(정복)되는 ‘최악의 운명’은 피할 수 있었다. 소련은 핀란드라는 작은 고추의 매운맛을 충분히 보았고 이후 웬만하면 건드리지 않으려 했다. 이 모든 결과에는 자신의 목숨을 위기에 빠진 이웃 나라를 위해 기꺼이 바치려 했던 ‘스웨덴 사나이들’의 헌신도 큰 역할을 했다.
이제 스웨덴과 핀란드 두 나라는 과거의 역사를 잊어버리지 않고 다시 한번 자국의 생존을 위해 힘을 합치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