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들은 인생에서 숭고한 이상과 믿음에 최상의 가치를 두는 사나이들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 겨울전쟁 후 떠나는 스웨덴 의용군에게 전달된 만네르하임 원수의 고별사 중 -
2024년 2월 26일 전 세계 언론들의 이목은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쏠려 있었다. 세계인들의 시선이 이곳 헝가리에 쏠린 것은 이날 아름다운 다뉴브 강변의 국회의사당에서 표결을 통해 한 가지 중요한 의사결정이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표결의 내용은 헝가리 국내 문제는 아니었는데 최종적으로 재적의원 199명 중 184명의 찬성으로 가결이 선포되었다. 이렇게 해서 스웨덴은 나토(NATO)의 32번째 회원국으로 인정을 받게 되었는데 2022년 5월에 핀란드와 함께 가입 신청을 한 지 1년 9개월 만의 일이었다. 스웨덴과 핀란드가 나토에 가입하게 된 배경은 바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이었다. 양국은 러시아가 2022년 2월에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자 심각한 안보위협을 느끼게 되었고 3개월 후인 5월에 나토 가입을 신청했던 것이다. 나토는 집단안보체제를 통해 회원국 중 어느 한나라가 침공을 받으면 전체 회원국이 다 같이 지원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나토 가입은 순탄치 않았는데 당시 30개 회원국이 있었던 나토에서는 회원국 전체가 동의해야 신규 회원국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문제는 튀르키예와 헝가리가 스웨덴의 가입에 강한 반대의사를 표명했다는 것이었다. 튀르키예는 자국 內 반란 단체로 규정한 쿠르드노동자당(PKK)을 스웨덴이 지원하는데 대해 강하게 반발했다. 한편 헝가리는 스웨덴과 다른 형태의 갈등을 겪었는데 스웨덴 정부가 헝가리의 오르반 빅토르(Orban Viktor) 총리를 독재적이며 비민주적인 인사로 비판해 왔던 것이다. 이후 스웨덴 당국은 양 국과의 갈등을 풀기 위해 노력했는데 튀르키예에는 유럽연합(EU) 가입에 대해 지지를 약속했고 헝가리에는 자국산 그리펜(JAS 39 Gripen) 전투기 판매를 약속했다. 사실 스웨덴 입장에서 자국의 안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었고 이를 위해서는 못할 것이 없었다. 결국 스웨덴은 양국의 최종적인 지지를 얻게 되었고 나토에 가입하며 1814년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이후 210년 만에 공식적으로 중립을 포기하게 된다. 중립을 포기한 것은 이미 1년 전 나토에 가입한 핀란드도 마찬가지였는데 사실 두 나라는 80여 년 전 ‘소련’이란 침략자를 두고 서로 진하게 얽혔던 인연이 있었다. 당시 스웨덴은 중립국으로서 비록 전쟁에 참여하진 않았지만 지금부터 설명하려는 많은 스웨덴인들이 ‘절망에 빠진 작은 이웃 나라’를 돕기 위해 전장으로 뛰어들었던 것이다.
위기의 신생 공화국
핀란드 적백 내전 중 포즈를 취한 백군의 모습(하얀 완장을 착용했다)
유럽의 북쪽 끝에 위치한 핀란드는 1차 대전 이전까지 러시아 제국 소속의 대공국으로서 ‘차르’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1917년 러시아에 혁명이 발생했고 종주국이 혼란한 틈을 이용하여 핀란드인들은 독립국 건설을 추진하였는데 1917년 12월에 독립을 선언하게 된다. 이후 국내의 좌우익 갈등이 깊어짐에 따라 1918년 1월부터 핀란드는 내전 상태로 돌입하게 되었다. 내전의 당사자는 사회민주당 지지자 및 소비에트식 혁명을 추종하는 세력(적군 赤軍)과 이를 막으려는 우익세력(백군 白軍)이었다. 백군은 스웨덴계 귀족가문 출신으로 러시아 제국군에서 군단장까지 역임했던 만네르하임(Carl Gustaf Emil Mannerheim) 장군이 지휘했는데 그는 러일전쟁과 1차 대전의 무수한 전투에 참전한 경험이 있었다. 만네르하임과 휘하 장교들의 노련한 지휘와 더불어 러시아에 대한 적개심과 혁명을 전파하려는 적군에 대한 두려움에서 스웨덴에서도 1000명의 지원군이 백군으로 참전하였다. 결정적으로 4월에 핀란드로 파견된 만 명의 정예 독일군을 통해 백군은 순식간에 승기를 잡을 수 있었다. 결국 백군은 1918년 5월에 적군 세력을 일소하여 내전에서 승리하였다. 내전 중 좌우익을 막론하고 양 측간에 심각한 수준의 포로 및 민간인 학살이 자행되었다. 한편 독일군은 핀란드에 계속 주둔하면서 본격적으로 내정을 간섭하려는 의도를 드러내기도 했는데 1918년 11월에 독일이 1차 대전에서 최종적으로 패배하면서 결국 철수하게 된다. 이후 핀란드는 1919년 2월에 공화국임을 선포하였고 북유럽의 신생국으로서 불안한 민주주의를 시작하게 된다.
1920~30년대를 거치면서 핀란드는 나름 민주주의가 작동하는 모범적인 국가로 자리매김하였는데 1931년에는 공산당을 불법화했고 소련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비록 1932년에 양국이 불가침 조약을 맺고 1934년에 이를 재확인했지만 문제는 이것이 그저 ‘종이 한 장의 문서’라는 것이었고 공산주의의 맹주였던 소련에게 핀란드는 늘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그 지도자인 스탈린은 제정 러시아 시절의 판도를 다시 회복하기 위해 호시탐탐 주변국들로부터 기회를 노리고 있었는데 핀란드도 그 먹잇감 중 하나였다. 사실 핀란드는 잘 모르고 있었지만 스탈린은 히틀러와 맺은 독소 불가침 조약(1939년 8월 23일: 양국 외무장관 이름을 따서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이라고도 한다) 협정에 따라 중부, 동부 및 북부 유럽의 세력권을 분할하였다. 이 밀약에 따르면 핀란드는 폴란드 동부, 발트 3국, 루마니아의 베사라비아(오늘날의 몰도바 공화국) 지역과 함께 소련의 영향권에 속하게 되어 있었다. 양국의 불가침 조약 일주일 후에 히틀러가 폴란드를 공격했고 9월 17일에 소련도 사전 합의에 따라 폴란드 동부를 침공한다. 소련은 폴란드란 나라를 지도에서 지워버린 후 발트 3국과 ‘강요된’ 군사협정을 통해 자국군을 주둔시켰고 현지의 우익 인사들을 대대적으로 체포한다. 이제 ‘붉은 곰’의 다음 타깃이 북쪽의 핀란드라는 것은 너무나도 분명해 보였다. 핀란드도 이미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했는데 9월 말 이후 조심스럽게 군대동원령을 준비했다. 10월 초에 소련의 외무장관 몰로토프는 핀란드 대표단을 모스크바로 초청했는데 스웨덴 주재 핀란드 대사였던 유호 파시비키(Juho Kusti Paasikivi)가 대표단장을 맡았다. 회담은 겉으로는 화기애애한 분위기였지만 이후 소련이 핀란드에 제안한 협상안은 핀란드 대표단을 당황하게 했고 곧 분노하게 만들었다. 몰로토프의 요구를 요약하자면 한 마디로 ‘영토 교환’이었는데 “레닌그라드가 핀란드 국경에서 너무 가까우니 안전을 위해 핀란드 땅을 달라”는 황당한 것이었다(레닌그라드는 국경에서 32km 떨어져 있었다). 대신 소련 측도 그만큼의 다른 땅을 대토(代土)로 제공하겠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땅의 위치였는데 소련은 핀란드의 심장부인 서부 카렐리야 공업지대, 라플란드 지역과 핀란드만 일대의 섬들을 요구했다. 더불어 수도인 헬싱키(Helsingki), 항코(Hanko), 비푸리(Viipuri를 포함한 주요 항구에 소련군이 30년 동안 주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 마디로 핀란드의 목줄을 쥐고 비틀겠다는 속셈이었다. 이에 대한 소련의 제안은 습지로 가득한 동부 카렐리야의 황량한 불모지를 내어준다는 것이었는데 핀란드에게 이것은 협상의 의미를 퇴색케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피하고자 했던 핀란드는 추가 협의를 통해 합의안을 도출하려 했지만 소련은 10월 31일에 양측의 합의 없이 일방적으로 자신들의 요구를 대외에 발표해 버린다. 선제적인 발표를 통해 핀란드를 꼼짝 못 하게 옭아 매려는 속셈이었는데 핀란드 의회는 11월 9일에 이를 공식적으로 거부했다. 모든 것이 끝났고 핀란드 대표단은 11월 13일에 모스크바를 떠났다. 소련 정부 측에서는 아무도 그들을 전송하러 오지 않았다. 이제 외교로 할 수 있는 것은 더 이상 없었고 남은 것은 군인들이 손에 피를 묻히며 처리해야 했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겨울 전쟁 중 눈 속을 이동 중인 핀란드군 스키부대
1939년 11월 26일 핀란드 국경과 가까운 소련의 마을 마이닐라(Mainila)에서 포성이 울리기 시작했다. 소련의 발표에 따르면 소련 국경 800미터 지점에 있는 곳에 핀란드군의 포탄 7 발이 발사되었고 소련군 국경 수비초소에서 군인 4 명이 사망했다는 것이었다. 핀란드는 그 정도 사거리를 가지는 포가 인근에 없음을 밝히며 양국의 공동 조사를 제안했지만 몰로토프는 핀란드의 즉각적인 사과를 요구했고 핀란드군이 즉시 국경에서 수십 킬로미터 후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핀란드는 당연히 사과 요구를 거부했고 소련은 11월 29일 핀란드와 공식적으로 외교관계를 단절한다. 훗날 밝혀졌듯이 이 포격은 소련 측의 자작극이었고 전쟁 도발을 위한 명분을 만들기 위한 기만 작전이었다.
11월 30일 오전 7시에 침공 준비를 완료한 소련군이 대대적인 포격과 함께 핀란드 국경을 넘기 시작했다. 드디어 양 국간의 ‘겨울전쟁’이 시작된 것이었다. 소련군은 4개 집단군 26개 사단을 동원하여 라도가호 좌/우측과 북동부, 북부의 4개 방향에서 동시에 협공을 진행하였다. 공격하는 소련군은 45만 명 이상이었는데 이를 막는 핀란드군은 총 병력 33만이었고 국경 쪽에 16만 명이 배치되었다. 병력의 열세에 더불어 장비의 차이는 차마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컸다. 소련군이 전차 3200대를 동원한데 비해 핀란드군은 30여 대를 배치했는데 이중에는 1차 대전의 유물인 르노 FT-17이 포함되었다. 항공기도 비슷한 상황이었는데 소련군의 3800대 대비 핀란드군은 110대였다. 공세 초기 소련군은 거대한 매머드가 진격하듯이 육중하게 진격해 나아갔고 이를 지켜보는 다른 나라 사람들 모두 소련의 신속한 승리를 예견하고 있었다. 핀란드군은 소련군의 경량급 T-26 전차만 봐도 공포에 질렸는데 사실 핀란드군의 전차 보유량이 많지 않았고 전차 실물을 처음 보는 병사들이 많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소련군 사령부는 상황을 지극히 낙관했고 특히 북동부 살라(Salla) 방면에서 진격하는 부대의 지휘관들은 행여라도 병사들이 스웨덴 국경을 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를 주었다. 소련군 제7군은 라도가호 서쪽의 카렐리야 지협의 만네르하임 선(핀란드의 對소련 방어선)에 근접하고 있었고 동쪽에서는 제8군이 라도가 호수를 우회해 만네르하임 선 배후로 가고 있었다. 동쪽에서 밀고 오는 적을 막지 못하면 핀란드군 주력은 양방향에서 협공을 당할 상황이었다. 핀란드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져 있던 이때 한 사람으로 인해 상황이 급반전하기 시작했다.
파보 탈벨라(Paavo Talvela)는 1차 대전 후 독립 전쟁에 참여했던 핀란드군 예비역 대령이자 군수물자 구매위원회 소속의 기업인으로서 핀란드군의 패배를 가슴 아프게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답답한 마음에 옛 친구인 총사령관 만네르하임을 만났고 자신이 직접 부대를 지휘해 소련군을 저지하겠다고 제안한다. 12월 8일 탈벨라 대령이 이끄는 전투단은 소련군 전초가 있는 라도가호 북동쪽의 톨바야르비(Tolvayarbi) 마을로 급파되었다. 그의 휘하에 있는 핀란드군은 눈 속에서의 위장을 위해 하얀색 설상복을 입었고 스키와 수오미 경기관총(흔히 우리가 <따발총>이라고 부르는 소련군 <PPSH-1941> 기관단총의 원형이다. 분당 900발의 발사속도로 겨울전쟁 당시 핀란드군이 사용하여 소련군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고 이후 소련도 자체적으로 개발하게 된다)을 사용하여 소련군 진지에 몰래 야습을 감행했다. 소련군은 다가오는 적이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고 허공에 마구 총질을 해대며 무너졌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는데 이러한 방식의 치고 빠지는 게릴라 전법이 소련군에게 매우 효과적임이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이후 핀란드군은 하얀색 위장복을 입고 야밤에 유령처럼 나타나 소련군을 공격한 후 연기처럼 빠져나가는 전술을 반복한다. 또한 전차에 대해서는 ‘몰로토프 칵테일(Molotov Cocktail: 소련 외무장관 몰로토프에 대한 조롱의 의미를 담은 조어이다. 소련군의 항공 폭탄을 ‘몰로토프의 빵바구니’라고 부른 것에서 파생된 것이다)’이라 불렸던 화염병을 제작하여 공격하였고 저격수를 투입하여 소련군의 진격을 더욱 어렵게 했다. 이렇게 눈 덮인 숲에서 유령 같은 핀란드군의 공격을 받은 소련군은 마치 통나무가 작은 불쏘시개로 쪼개어지듯 소부대로 분리되었는데 점점 작은 단위로 나누어 진후 전멸해 버리곤 했다. 핀란드인들이 ‘모티(Motti: 핀란드어로 불쏘시개용 나무 쪼가리를 뜻함)’라고 불렀던 전술은 이렇게 시작되었고 이후 소련군은 영하 30도에 이르는 극심한 추위와 보급의 어려움 속에 부대 하나하나가 분쇄되어 갔다. 시모 해위해(Simo Häyhä: 공인 534명 사살이라는 역대 최고 저격 기록을 가지고 있다)와 같은 핀란드의 우수한 저격수들이 눈 속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소련군들을 한 명, 한 명씩 처리하자 주변의 소련군은 움직이지도 못하고 그대로 동상에 걸리며 죽어 나갔다. 전 세계 사람들은 ‘작은 거인’과 같은 핀란드인들의 엄청난 투지에 찬사를 보냈고 이들의 분투를 돕기 위해 사방에서 지원하기 시작했다. 유럽 각국은 물론 미국 및 남미의 우루과이에서까지 핀란드를 위해 싸우려는 지원병이 몰려들었는데 가장 큰 도움은 바로 국경을 맞대고 있는 한 나라에서 왔다. 바로 스웨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