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성공이 트루만 대통령으로 하여금 군대에서 흑인과 백인의 통합에 관한 행정명령을 내리는 것을 가능케 했다고 생각한다.”
- 332 전투비행단 소속 찰스 맥기 (Charles Edward McGee) 준장, 2007년 BBC와의 인터뷰에서 -
2021년 1월 미국 조폐국은 새로운 디자인의 25센트 동전을 선보였는데 이 동전은 코로나 상황 하에서도 대중의 관심을 끌게 된다. 동전의 앞면에는 미국 건국의 아버지이자 전통적인 위인인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의 모습이 있어서 그리 특이한 형태는 아니었는데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킨 것은 바로 동전의 뒷면이었다. 은색 동전 뒷면에는 2차세계대전 당시 미군의 주력 전투기였던 P-51 머스탱(Mustang) 2기가 보였고 그 옆에 흑인 남성으로 보이는 전투기 조종사의 모습이 등장한다. 사실 이것은 흑인 남성의 모습이 미국 화폐에 새겨진 최초의 사례였다. 동전의 테두리에는 터스키기 항공대원(Tuskegee Airmen)이라는 설명과 함께 “그들은 두 개의 전쟁에서 싸웠다(They fought two wars).”라고 적혀 있었다. 이들 흑인 조종사들은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고 조국인 미국을 위해 최선을 다해 나치와 싸웠는데 사실 이보다 더욱 힘겨웠던 전쟁이 따로 있었다. 이들의 전쟁은 당시 미국이 처해있던 국내외 사건들과 사회적인 편견 및 차별 등이 얽힌 매우 복합적인 것이었는데 그 투쟁의 과정은 지독히도 외롭고 험난한 가시밭길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투쟁을 통해 전후 미국 사회 전반에 엄청난 변화가 불어 닥치게 되었고 전반적인 국가 진일보의 시발점이 되었다. 지금부터 그들이 싸워야 했던 두 개의 전쟁 (또는 투쟁)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2021년에 나온 신규 25센트 동전. 무명의 흑인 조종사가 새겨져 있다.
새로운 도전의 시작
털사 인종 폭동(1921년) 당시 산탄총을 든 백인이 체포한 흑인들을 감시하고 있다
1865년 미국 남북전쟁이 끝나고 링컨 대통령이 노예 해방을 공식화했지만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미국 사회에서 흑인의 지위는 별반 나아진 것이 없었다. 이것은 20세기 들어서도 마찬가지였는데 특히 남부 여러 주에서 흑인에 대한 차별은 일상적이었다. 여전히 많은 곳에서 흑백 인종에 대한 사회적 분리가 법제화 또는 관습화 되어있었는데 흑인은 백인과 같은 화장실이나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없었다. 이것을 어긴 흑인에 대한 제재와 집단 폭행은 특히 미국 남부 내의 암묵적인 불문율이었는데 KKK 단 같은 극렬 인종주의자들이 기승을 부리곤 했다. 흑인들 역시 이러한 상황에 대해 분노하긴 했지만 사회적 약자였던 이들은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미국 사회에서 흑인은 여전히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는 2등 시민이었는데 흑백 간의 갈등은 남부를 넘어 미국 전역에서 불거지고 있었다. 이러한 사건의 절정은 1921년에 발생한 중남부 오클라호마 털사(Oklahoma Tulsa)에서 벌어진 인종 간 폭력 사건이었다. 한 흑인 구두닦이가 엘리베이터에서 백인 여성을 성폭행했다는 거짓 소문이 퍼졌고 이에 흥분한 백인들의 폭력으로 백 명 이상의 지역 흑인들이 살해당했던 것이다. 이에 반발하여 들고일어난 수천 명의 흑인들은 상당수가 경찰에 구류되었지만 오히려 이 사건으로 체포된 백인은 한 명도 없었다. 이것이 20세기 전반부에 있었던 ‘자유와 평등의 나라’ 미국의 냉혹한 현실이었다. 인종 간의 평등과 정의는 요원한 것처럼 보였다. 흑백 간의 갈등은 군대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우선 흑인은 철저히 백인과 분리되었고 주류 전투 부대에서 배제되었다. 이들은 주로 취사, 수송 및 잡역 등 비전투 병과에 집중적으로 배치받았다. 흑인들의 전투 능력에 대한 백인 고위 관리 및 장교들의 근거 없는 의구심이 작용한 결과였는데 1925년 미국 육군대학의 ‘비밀 보고서’는 흑인을 “전투 능력이 떨어지고 게으르며 기술적인 업무를 처리하는 것에 부적합한 인종”으로 폄하했다. 이들은 흑인들의 지능이 선천적으로 낮다고 믿었고 자기들의 행동을 “차별이 아닌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백인과 분리되어 흑인들이 주축이 된 일부 미 육군 전투 부대가 존재하긴 했지만 그들의 지휘관은 예외 없이 모두 백인이었다. 사실상 흑인 병사들에게는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권리만 인정되었는데 당시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차별이 당연시되는 암울한 시대였다.
시간이 흘러 1930년대 후반을 거치면서 유럽을 중심으로 대규모 전쟁의 발발 가능성이 증대되기 시작한다. 비록 미국이 초기에는 중립을 유지할지라도 시시각각 다가오는 전쟁을 준비해야 한다는 점은 분명했다. 특히 교육과 훈련에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는 항공기 조종사들에 대한 양성이 절실히 요구되었다. 이러한 계획의 일환으로 루스벨트 대통령은 1938년 12월에 년간 2만 명의 대학생들에게 조종사 훈련을 시키는 ‘민간 조종사 훈련 프로그램 (CPTP: Civilian Pilot Training Program)’을 추진하는 안에 서명한다. 이 프로그램은 공식적으로는 항공산업을 활성화하기 위한 방안으로 소개되었고 ‘민간 조종사’란 타이틀이 강조되긴 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미래의 전쟁에 대비하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1939년 6월에는 ‘민간 조종사 양성 법안’이 통과되어 본격적인 예비 조종사 양성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1939년 9월에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자 조종사 양성 프로그램은 이제 국가적인 방위를 위한 핵심적인 현안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폴란드 전투에서 루프트바페(Luftwaffe: 독일 공군)의 무시무시한 능력을 보며 미 육군과 해군 모두 조종사와 훈련기가 부족함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조종사 양성을 위한 프로그램에 참여한 대학교 중에는 남부 앨라바마주의 흑인 전용 교육 기관인 터스키기 대학교(Tuskegee Institute)도 있었다. 이곳에서는 흑인들을 대상으로 조종사 교육을 실시하였는데 유소년기에 대서양을 횡단한 찰스 린드버그(Charles Lindburgh)나 최초의 여자 조종사 아멜리아 에어하트(Amelia Erhardt)의 소식을 들으며 창공을 동경했던 많은 흑인 젊은이들이 모여들었다. 푸른 창공에는 흑인도 백인도 없었다. 이런 가운데 루스벨트는 1940년에 3선에 출마했고 흑인들의 표를 얻기 위한 전략 중 하나로 흑인 조종사 부대 양성을 공약으로 발표했다. 결국 루스벨트는 대선에서 승리했고 이후 해리 슈워츠(harry Shcwartz) 상원의원 같은 백인들이 흑인 조종사 훈련생을 위한 기금을 마련하는 법안을 통과시키며 흑인 젊은이들의 꿈에 날개를 달아 주었다. 이와 같은 지원에 힘입어 흑인 훈련생들은 단기 속성 교육을 통해 조종사가 되는 꿈에 한발 더 다가갈 수 있었다 1940년 9월에 제정된 ‘군인 선발 훈련 및 복무에 관한 법안’은 모든 군인 선발 및 훈련 과정에서의 인종 차별을 금지하게 된다. 미국 인구의 10%를 차지했지만 군인 복무 비율은 2% 대에 머물렀던 흑인들의 군복무를 늘리기 위한 ‘거대한 사회적 전진’이 서서히 진행되고 있었다. 전쟁에 따른 세상의 변화가 이러한 속도를 더욱 가속화한 것이었다.
과거 1차 대전 때 미국인으로서 항공기 조종사를 희망했던 ‘유진 불라드(Eugene Bullard)’는 단지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미군에서 조종사의 꿈을 이루지 못했고 프랑스군 항공대 소속으로 겨우 참전할 수 있었다. 여전히 미국 흑인에게 전투기 조종사는 사실상 ‘금단의 영역’이었지만 이제 그러한 불합리와 차별의 거대한 벽이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조종사가 되기 위한 흑인 젊은이들의 커다란 기대만큼이나 사람들의 우려와 걱정도 만만치 않았는데 백인이 주류인 미국 사회에서 이들이 차별받는 ‘주변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의 도전 결과가 어떻게 될지 당시로서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다.
흑인 비행대의 창설
영부인인 엘레노어 루스벨트를 태우고 비행했던 터스키기 훈련교관 찰스 앤더슨
1941년 4월 11일 터스키기에는 상당히 특별한 손님이 방문했는데 그 손님은 바로 ‘퍼스트레이디’인 엘레노어 루스벨트(Eleanor Roosevelt)였다! 그녀는 터스키기 부대 내의 아동 병원 시설을 둘러보았는데 마침 상공에서 훈련 중인 여러 대의 비행기를 볼 수 있었다. 무슨 의도였는지 갑자기 영부인은 훈련 비행기의 조종사를 만나고 싶어 했고 그렇게 선임 훈련 교관인 흑인 찰스 ‘치프’ 앤더슨(Charles ‘Chief’ Anderson)과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그녀는 예정에 없던 상황에 사색이 된 경호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흑인 조종사’인 앤더슨의 단엽인 J-3컵(Cub) 비행기에 탑승하고 싶어 했다. 이후 40분 간 역사적인 영부인과 흑인 조종사의 비행이 이루어진다. 루스벨트 여사는 그동안 흑인은 비행에 적합지 않다는 말을 주변에서 수도 없이 들었는데 이 짧은 비행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비행기가 착륙한 후에 아이처럼 신이 난 영부인은 앤더슨에게 “이거 봐요, 당신도 비행할 수 있잖아요!”라며 흥분해서 외쳤다. 이 짧은 비행은 하나의 이정표가 되었는데 흑인도 비행기를 조종할 수 있다는 하나의 상징과 같은 사건이 되었다. 영부인의 비행을 통해 루스벨트 행정부는 흑인 조종사 양성에 더욱더 박차를 가했고 ‘터스키기에서의 거대한 실험’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사실 앤더슨의 비행 1개월 전인 1941년 3월 22일에 최초의 흑인 전투비행대인 ‘제99추격비행대(The 99th Pursuit Squadron)’가 일리노이즈 맨툴(Rantoul, Illinois)에서 33명의 조종 교육생 및 수백여 명의 정비병과 함께 창립되었다. 이것은 미군이 양성하려는 3만 명의 조종사 중 극히 일부의 숫자였지만 이들은 흑인 중 대학 교육을 받은 상위 1% 중에서도 선발된 엘리트였다. 조종 교육생들은 3개월 후에 터스키기로 이전하면서 훗날 터스키기 비행대의 핵심 그룹이 된다. 비행대는 앤더슨과 같은 열혈 교관의 지도로 비행 훈련에 매진했는데 이곳 소속의 장교 중에 ‘벤저민 데이비스 2세 (Benjamin Oliver Davis Jr.)’가 있었다. 원래 그는 이곳에서 전술학을 강의했던 교관으로 미국 역사상 네 번째 육군사관학교 출신 흑인 장교였고 사관학교 재학 시 백인 동료 생도들의 온갖 모욕과 차별을 견디며 이 자리까지 오게 되었다. 사실 그의 집안 자체가 상당히 특별한 사례였는데 데이비스의 아버지는 ‘벤저민 데이비스(Benjamin Oliver Davis Sr.) 준장으로 당시 미군에 복무했던 첫 번째이자 유일한 흑인 장군이었다. 하지만 그는 다른 장군들처럼 휘하의 전투 부대를 갖지 못했고 아들인 데이비스 2세와 마찬가지로 터스키기에서 교관으로 전술학을 강의했다. 이것은 흑인 장교 밑에 백인 하급자를 두지 않으려는 미군 나름의 고려 끝에 나온 조치였는데 당시 미 육군에 복무했던 흑인 장교 다섯 명 중 군목 세명을 제외한 나머지 두 명이 ‘데이비스 부자’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데이비스 2세는 나름의 돌파구를 찾아 조종사에 지원했고 전투기를 몰기 위해 다른 이들과 함께 훈련에 매진했다. 그는 ‘99 전투비행대’의 지휘관이 되었는데 타고난 인품과 리더십을 바탕으로 휘하 흑인 부대원들을 훌륭하게 이끌었다. 그와 다섯 명의 다른 흑인 조종사들은 1942년 3월에 모든 과정을 수료하며 전투기 조종사가 되는데 훗날 데이비스 2세는 미 공군의 첫 번째 흑인 장군이 되었다.
터스키기 훈련장에 흑인 조종사들이 있었던 반면 이곳의 전체 책임은 백인 부대장이 맡고 있었다. 초기의 터스키기 비행대는 지역의 백인 주민들과 상당한 갈등 관계를 겪어야만 했는데 백인 주민들은 흑인 훈련생들의 시설을 마치 교도소와 같은 혐오 시설로 인식했다. 때때로 곤봉을 휴대한 흑인 군사경찰(Military Police)들이 치안 유지를 위해 동네를 돌아다니곤 했는데 백인 주민들은 불쾌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고 부대에 신고를 하기도 했다. 부대의 백인 지휘관 성향에 따라 이러한 상황에 소폭의 변화가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백인 부대장들은 기존 관습 및 지역 주민들과의 마찰을 줄이기 위해 ‘흑백 분리 정책’을 유지했다. 하지만 진주만 공습 직전인 1941년 12월 초에 ‘노엘 패리시(Noel Parrish)’ 대위가 훈련장의 책임자가 되자 상항이 근본적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패리시는 그 자신이 이미 9개월 이상 이곳 터스키기 및 인근의 맥스웰 비행장에서 훈련을 받으며 생활해 왔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부대의 상황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패리시가 이전의 백인 장교들과 달랐던 것은 그가 기본적으로 흑인 훈련병들을 인간으로서 존중했고 이들을 능력에 따라 대우했다는 점이었다. 패리시는 실력이 미흡한 후보생들은 가차 없이 탈락시켰지만 우수한 후보생들은 최선을 다해 지원했고 인종을 초월하여 진심 어린 애정을 가지고 대했다. 더불어 그는 주변에 거주하는 백인 거주민과의 갈등을 최소화하기 위해 자신이 직접 이들과 대면하며 소통했고 무엇보다도 흑인 대원들의 사기를 진작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패리시는 여성 재즈 가수 레나 혼(Lena Horne)과 엘라 피츠제랄드(Ella Fitzgerald)나 만능 엔터테이너인 루이 암스트롱(Louis Armstrong)과 같은 당대 최고의 연예인들을 터스키기 기지에 초청해서 각종 공연 및 여흥의 시간을 갖기도 했다. 헤비급 권투 챔피언이었던 조 루이스(Joe Louis) 역시 방문자 중 한 명이었다. 백인 주민들 때문에 부대 밖으로 나가기도 힘들었던 터스키기의 부대원들에게 이러한 위문 공연은 더할 나위 없는 선물이었다. 일련의 진심 어린 노력을 통해 패리시는 흑인이 생김새가 다른 차별과 혐오의 대상이 아니라 같은 동료 미국인이자 ‘함께 적과 싸워야 하는 소중한 전우’라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고자 했다. 그의 노력을 통해 터스키기 비행대는 본연의 임무인 훈련에 매진할 수 있었고 본격적인 전투에 나설 수 있는 ‘흑인 조종사’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더불어 흑인 조종사들의 비행기를 수리하고 유지할 정비사와 기관요원들도 양성되기 시작했다. 터스키기 조종사들의 전설이 시작될 토대가 하나, 둘 마련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