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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호 Oct 03. 2024

6. 편견과 차별을 극복하고 정상에 우뚝 서다(下)

미군 최초의 흑인 비행대인 터스키기 항공대 (1939~1947)

레드 테일스(Red tails)의 전설

332 전투비행단의 P-51 머스탱 전투기들

1942년 9월이 되자 터스키기 조종사들은 전투에 나아갈 준비가 되었다. 하지만 전 세계 오대양 육대주의 그 많은 전쟁터에서 이들을 반기는 백인 지휘관은 하나도 없었다. 시간이 흘러 1943년이 되자 북아프리카 전선에서는 독일과 이탈리아의 추축동맹군이 빠르게 무너지고 있었는데 드디어 99 전투비행대가 행동에 나설 시기가 다가왔다. 9개월을 대기 상태에 있던 99 전투비행대는 짧은 환송 파티 후인 1943년 4월 2일에 P-40 워호크 전투기와 함께 북아프리카로 이동하였다. 모로코의 카사블랑카에 도착한 이들은 투입 전 교육을 받았고 이후 6월 초부터 튀니지와 시칠리아 섬의 중간에 위치한 추축국 전략 기지였던 판텔레리아(Pantelleria) 섬 공격 작전에 참가한다. 이 섬에는 11000 명의 이탈리아군과 소수의 독일군이 병력이 방어하고 있었는데 섬의 포대와 레이더 장비를 통해 7월에 예정된 연합군의 시칠리아 섬 상륙작전에 위협적인 요소로 간주되었다. 99 전투비행대를 포함한 연합군 공군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게 된 이탈리아군 방어부대는 6300톤 이상의 압도적인 폭격에 망연자실했다. 결국 이들은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에서 6월 11일에 항복하게 된다. 판텔레리아 섬 공격은 역사상 거의 유일하게 공군력 만으로 점령된 사례로 기록되었다. 99 전투비행대는 지상 공격에 참여하며 소중한 첫 전투의 경험을 쌓았고 공대공 전투에서 적기를 격추하며 ‘수훈부대 표창(Distinguished Unit Citation)’을 받게 된다. 이들의 소식을 전쟁 뉴스로 보게 된 미국 내의 가족 및 지인들은 영화관에서 환성을 지르며 기뻐했다. 모든 것이 순조로워 보였지만 갑자기 의외의 상황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99 전투비행대의 상급 부대인 33 전투비행단의 윌리엄 모마이어 (William W. Momyer) 대령이 99 전투비행대의 전투 시 공격성과 적극성이 부족하다며 상부에 비난성 보고를 한 것이었다. 그는 99 전투비행대를 후방의 해안순찰 임무로 돌릴 것을 제안했는데 워싱턴의 육군항공대에서 즉시 이에 대한 조사에 들어갔다. 이후 하원 청문회까지 소집될 정도로 사안이 확대되었고 타임(TIME)지 등 언론에도 대서특필되었는데 부대장인 벤저민 데이비스 2세는 즉시 워싱턴으로 가서 혼신을 다해 자신의 흑인 비행대를 변호했다. 그는 부하들의 열정이나 의지 등 추상적인 것보다는 실질적인 전투 통계에 집중했다. 최종적으로 육군항공대는 99 전투비행대가 다른 부대 이상의 충분한 활약을 했다고 결론 내렸다. 하지만 흑인 조종사들로 구성된 ‘특별한 부대’로서 이런 식의 편견과 비난은 이제 시작일 뿐이었고 부대원들은 나름의 굳은 각오를 해야 했다.

99 비행대는 이후 시칠리아로 근거지를 옮겼는데 안치오(Anzio)의 연합군 교두보나 몬테카시노(Monte Casino) 등의 연합군 격전지에 항공 지원을 통해 독일군 전력에 상당한 타격을 입혔고 연합군의 진격로를 여는데 큰 역할을 담당했다. 안치오에서는 이틀 동안 무려 12대의 적기를 격추하여 미국 신문들의 헤드라인을 장식하기도 했다. 흑인 조종사들의 실력이 증명되자 더욱 많은 흑인 비행대가 구성되었고 1944년 5월에는 99 비행대를 포함한 332 전투비행단(332nd Fighter Group)으로 확대 개편된다. 부대장은 터스키기 멤버로서 대령으로 진급한 벤저민 데이비스 2세가 맡게 되었다. 332 비행단은 6월에 남동부 이탈리아의 아드리아해 인근에 있는 라미텔리(Ramitelli) 비행장으로 이동한다. 이들의 주요 임무는 중부 유럽의 나치 점령 지역을 폭격하던 미 제15공군의 B-17이나 B-24 같은 중폭격기들을 자신들의 P-51 머스탱 전투기로 호위하는 것이었다. 비행대는 미군 폭격기 위에서 에스코트했는데 대열 한가운데로 침투하여 쏜살같이 치고 빠지는 독일군 전투기들을 자신의 목숨을 걸고 막아냈다. 그들에게 전달된 “한 대의 폭격기도 잃지 않게 하라”는 명령을 문자 그대로 수행하려 했던 것이다. 기존에는 흑인 조종사들을 회의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던 백인 폭격기 승무원들이 이들의 헌신적인 모습에 열광하기 시작했고 적이었던 독일군 조종사들은 이들을 ‘검은 악마’라고 불렀다. 또한 이때를 전후하여 332 비행단의 전투기들은 자신들만의 표식으로 후방 꼬리 날개에 붉은색의 도색을 했고 이로서 ‘레드 테일스’의 명성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훗날 폭격기 승무원들이 “비행기 밖의 붉은 꼬리 날개를 보면 마음이 편안해졌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데이비스 대령은 아예 그의 비행기 이름을 ‘(폭격비행대의) 요청에 의해(By request)’라고 지었다. 폭격기 승무원들이 그만큼 자신을 원한다는 유머가 섞인 작명이었다. 머스탱 전투기를 운용하는 다른 호위 비행대의 폭격기 손실 대수가 평균 46대였는데 332 비행단은 그 절반 수준인 27대일 정도로 뛰어난 능력을 보여 주었다.  


‘요청에 의해(By request)’라 명명된 자신의 전투기 앞에서 포즈를 취한 332비행단장 벤저민 데이비스 2세

이들 활약의 정점은 대전 말기인 1945년 3월 24일에 실시했던 베를린의 ‘다임러-벤츠(Daimler-Benz)’ 전차 공장 폭격 호위 임무였다. 이탈리아의 기지에서 1200 km 이상의 장거리를 이동하여야 했는데 여분의 연료탱크가 필요할 정도였다. 비행대는 어렵게 베를린 인근 브란덴부르크 상공에 도착했지만 이들을 기다리는 것은 환영의 축포가 아닌 어느 때보다 심했던 대공포화였다. 또한 최초의 제트전투기인 Me-262 30여 대가 몰려왔는데 이들은 독일 공군 슈퍼 에이스인 ‘발터 노보트니(Walter Novotny)’의 이름을 딴 ‘제7전투비행단 노보트니(Jagdgeschwader 7 Novotny)’ 소속의 정예 부대였다. 비록 독일이 전쟁에 패배할 것이라는 것은 기정사실이었지만 자존심 강한 독일 공군은 연합군 폭격기들을 곱게 보내줄 생각이 없었다. 미군의 머스탱이 아무리 우수한 전투기라 하더라도 제트엔진을 장착한 독일기를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속도가 150km나 빨랐던 적 제트기를 공격하기 위해서는 창의적인 전술이 필요했다. 비행대는 기동성을 높이기 위해 연료탱크를 탈착해 버린다. 이후 독일군 제트기에게서 최대한 멀리 떨어졌고 적군 조종사들의 시야가 좁아지는 후측방을 지점을 집중적으로 파고들었다. 이날의 전투에서 터스키기 조종사들은 기체에 장착된 6기의 50 구경 브라우닝 기관총으로 3대의 독일군 제트기를 격추시켰다. 폭격기들의 작전은 성공했지만 연료탱크를 버린 흑인 비행대는 상당수가 귀환 도중에 비상착륙해야 했다. 이 날의 용맹스러운 전투를 통해 332 전투비행단은 또 하나의 부대 표창을 받으며 우수한 흑인 전투 부대로서 공인받게 된다.  


전쟁 기간 중 992명의 터스키기 출신 훈련생들이 조종사가 되었다. 이들 중 절반이 전투에 참여했는데 총 1600회 이상의 출격을 감행했고 112대의 적기를 공중전에서 격추시켰으며 또 다른 150대 이상을 지상에서 파괴했다. 또한 950량 이상의 수송열차를 파괴하여 추축군 병참선을 붕괴시켰으며 이탈리아군의 어뢰정 한 척도 대파시켰다. 이러한 수훈을 세우는 동안 희생도 있었는데 총 66명의 터스키기 조종사들이 전투 중 사망했고 12명이 독일군의 포로가 되었다. 이렇게 큰 공적과 희생을 치르며 조국을 위해 봉사했지만 이들에게는 아직 끝나지 않은 ‘내부의 전쟁’이 남아 있었다. 어쩌면 그 전쟁은 총칼로 치렀던 지금까지의 어떤 전쟁보다 더욱 치열했다.


또 하나의 전쟁에서 승리하다

흑인 장교에 대한 불평등에 항의하며 자신의 경력을 포기한 로저 테리 (가운데)

흑인 전투 비행단이 유럽전선으로 건너갈 무렵인 1943년 5월에 터스키기에서는 흑인 만으로 구성된 616 폭격비행대(The 616th Bombardment Squadron)가 구성된다. 하지만 이들은 전투에 참여하지 못했고 대기 중에 해체되는데 이후 ‘332 전투비행단’의 성공 소식이 전파되는 가운데 다시 흑인 폭격기 부대 창설의 목소리도 높아진다. 마침내 1944년 1월 흑인으로 구성된 477 폭격비행단(the 477th Bombardment Group)이 창설되었다. 이들은 60대의 쌍발 엔진이 달린 B-25 미첼 폭격기를 조종하며 미시간주의 셀프리지 필드(Selfridge Field, Michigan)에서 전장에 투입될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혼자서 비행하는 전투기 조종사와는 달리 여러 명이 팀워크를 이루어 운용해야 하는 폭격기는 분명 흑인들에게 새로운 도전이었다.


문제는 이들의 부대장인 로버트 셀웨이(Robert Selway) 대령이 지독한 인종차별주의자였다는 점이었다. 그는 흑인들을 불신했고 자신의 부대에서 흑백 분리 기조를 유지했다. 모든 흑인 교육생들이 이러한 조치에 분노했으나 당시의 암묵적인 관행이었고 일단은 인내하는 수밖에 없었다. 1945년 3월에 부대는 인디애나주의 프리먼필드(Freeman field, Indiana)로 이동하게 되는데 이곳에서 사건이 발생한다. 부대장인 셀웨이의 명령에 따라 모든 백인들은 교관(Instructor) 신분이 되었고 모든 흑인들은 교육생(Trainee) 신분이 되었는데 이 중에는 수백 시간의 비행을 한 조종사 출신 장교들도 있었다. 백인들은 교관 신분으로 장교 클럽 이용이 가능했지만 흑인들은 비록 장교라도 교육생 신분으로 클럽 이용이 불가능했다. 흑인들은 급이 떨어지는 사병용(교육생용) 클럽을 이용해야만 했다. 이러한 편법을 동원한 차별에 흑인 장교들이 폭발했고 마침내 행동을 개시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장교 정복을 차려입고 정당하게 장교 클럽에 입장하려 했는데 돌아오는 말은 “당신에게 서빙할 수 없다”라는 냉소적인 담당 병사의 대답이었다. 이 말의 속 뜻은 간단히 말해서 “(너 같은) 검둥이에게는 서빙할 수 없다”라는 것이었다. 거의 모든 흑인 장교들이 들고일어났고 4월 5일에서 6일까지 이틀 동안 61명이 체포되었다. 이후 셀웨이는 오히려 장교 클럽에 대한 기지 내 규정을 포함한 불평등한 문서를 내밀고 흑인 장교들에게 서명하도록 요구했다. 흑인 장교들이 이에 격렬히 반발하자 이들 모두를 전시 명령불복종으로 처벌하겠다고 협박했고 결국 101명을 체포한다. 이들은 2주 정도를 인근의 수용소에 갇혀 있게 되는데 이곳에는 자신들보다 자유롭게 생활하는 독일군 포로들이 함께 있었다. 엄청난 아이러니였다. 부대의 어수선한 상황은 워싱턴의 고관들에게도 들리게 되었는데 마침 이때 루스벨트 대통령이 서거했다. 육군참모총장 조지 마샬(George Marshall) 장군은 대통령 사망에 따른 혼란한 시기에 일어난 항명사건의 파장을 우려했고 즉시 101명의 석방을 지시했다. 한편 4월 6일에 체포된 61명 중 58명 역시 석방되었으나 나머지 3명은 군법회의에 회부되었다. 최종적으로 기소된 3인 중 한 명인 로저 테리(Roger Terry) 소위만 클럽에 들어갈 때 다른 백인 장교를 밀쳤다는 죄목으로 벌금 및 불명예제대를 판결을 받았다. 비록 전시 명령불복종에 따른 ‘최악의 처벌’을 받지는 않았지만 명예를 소중히 여기는 테리 소위에게 이 판결은 사회적인 매장이자 죽음과도 같은 상황을 의미했다. 이 사건은 미국 내 인종차별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에서 군대 부문의 이정표가 되었고 이후 미국 사회는 50~60년대의 격변기를 거치며 인종 간의 완전한 통합을 향해 멈추지 않고 나아간다.


시간이 좀 더 흐른 1948년 7월 트루먼 대통령은 ‘대통령 명령 9981(Executive order 9881)’을 통해 미국 내 군대의 인종간 완전 통합을 선언한다. 모든 미국인들이 인종에 대한 구별이나 차별 없이 함께 근무하게 된 것이다! 이 모든 것에는 터스키기 항공대를 비롯한 참전 흑인들의 희생이 밑바탕이 되었다. 아직 완전한 통합까지는 갈 길이 요원했지만 이것은 미래의 결실을 위한 거대한 씨 뿌리기 작업이 되었다. 그 열매는 항명사건의 피해자인 로저 테리가 기소된 지 50년이 지난 1995년에 결실을 맺었는데 그는 자신의 모든 죄목에 대해 미국 정부의 완전한 사면을 받았고 군대에서의 계급도 회복되었다. 결국 터스키기 조종사들은 전쟁이 끝나고도 반세기가 지난 후에 서야 ‘두 개의 전쟁’에서 모두 승리할 수 있었다. 그 승리를 향한 여정은 길고도 힘들었지만 이들의 용기 있는 도전을 통해 세상의 모든 핍박과 차별을 받는 이들에게 확고한 희망을 안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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