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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호 Oct 08. 2024

7. 분노로 무장하여 역사의 흐름을 바꾸다(上)

영국공군 소속 303 폴란드 전투비행대(1940~1945)

303 전투비행대 소속의 폴란드 조종사들

인류전쟁에 있어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적은 인원들에 의해 이토록 큰 은혜를 입은 적은 결코 없었다.”


- 윈스턴 처칠, 영국항공전 당시 참전 조종사들을 언급하며 -


 

2013년 10월 15일, 유럽 축구팬들의 관심은 이날 벌어진 ‘2014 브라질 월드컵’의 유럽 내 예선 경기에 집중되어 있었다. 경기는 영국의 영국 축구의 성지인 웸블리 구장(Wembley Stadium)에서 벌어졌는데 조 1위이자 최강팀이었던 잉글랜드는 이날 승리하며 본선 진출을 확정 짓고자 했다. 한편 폴란드는 반드시 잉글랜드를 이겨서 본선 진출에 대한 희망을 살리고자 했다. 중요한 경기인지라 폴란드에서 무려 18000명의 축구 팬들이 영국으로 대거 건너왔고 자국의 승리를 기원하며 페이스 페인팅을 비롯한 열띤 응원을 펼치고 있었다. 비록 경기는 잉글랜드가 2대 0으로 승리하며 본선 진출을 확정 지었지만 이날 경기장에서 관중들의 관심을 끈 것이 또 하나 있었다. 바로 경기 시작 전에 폴란드 응원석에서 거대한 깃발이 올라왔던 것이다. 이 깃발은 폴란드 국기처럼 붉은색과 흰색으로 되어 있었고 대각선으로 서로 색깔이 교차하며 마치 체스 판 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사실 이 깃발은 과거 ‘폴란드 공군’의 상징이었는데 이 상징물이 영국의 경기장에서 올라오게 된 데에는 과거 2차 세계대전 기간 중 양국 사이에 벌어졌던 대단히 특별한 인연과 관련이 있었다. 그 인연으로 인해 처칠이 얘기한 ‘가장 어두웠던 시기(The darkest hour)’에 놓여 있었던 영국이 생존하고 구원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폴란드 군인들은 상상도 못 했지만 결과적으로 전 세계를 구하게 되었다.


2013년 월드컵 예선전 시 웸블리 경기장에 올라온 폴란드 공군 표지


망국의 용사들

폴란드 항복 이후 나치와 항전하기 위해 프랑스에서 집결한 폴란드 망명군 병사들 (1940)

1939년 9월 1일 독일이 자국을 공격하고 순식간에 점령해 나가자 폴란드 국민들은 문자 그대로 ‘충격과 공포’에 빠지게 된다. 폴란드는 중동부 유럽의 강국으로서 독일의 침략에 대비하여 나름의 군사적 준비도 강구했지만 결국 전투력이란 것은 상대적인 것이었고 폴란드는 독일군의 신형 장비와 혁신적인 전술을 당할 수 없었다. 더구나 9월 17일에 동쪽에서 소련군마저 침공을 했을 때 ‘이 가련한 나라’의 운명은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많은 폴란드 병사들이 당시에 국경을 맞대고 있던 남쪽의 루마니아나 헝가리 또는 북쪽 스칸디나비아의 덴마크, 스웨덴 등지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후 천신만고 끝에 튀르키예와 지중해 또는 북해를 건넌 망국의 병사들은 독일과 전투를 앞두고 있던 프랑스에서 재조직되었고 그 숫자는 순식간에 8만 명에 달했다. 일부 폴란드군은 ‘카르파티아 여단’이란 이름으로 프랑스 식민지인 시리아에도 주둔하기도 했다. 1939년~1940년의 혹독한 겨울이 지나고 이듬해 봄이 오자 포성이 멀리 북쪽의 덴마크와 노르웨이에서 먼저 울렸는데 소국 덴마크는 불과 몇 시간 만에 독일군에 점령되었다. 노르웨이는 조금 상황이 달랐는데 이곳은 독일이 절실히 필요로 하는 전략 자원인 스웨덴 철광석의 핵심 이동 루트였다. 연합군도 이를 잘 알고 있었고 노르웨이가 독일 손에 들어가는 것을 막으려 했다. 4월 8일에 노르웨이 해안에는 영국, 프랑스 등의 연합군이 독일군과 거의 동시에 도착했고 양 측은 즉시 전투에 돌입하게 된다. 일부 폴란드군도 이곳 전투에 함께 투입되었지만 독일군의 기세를 꺾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런 가운데 5월 10일에 독일군이 대대적으로 베네룩스 국가들과 프랑스에 침공을 개시했고 모든 연합군이 독일군을 막기 위해 서유럽의 전투에 투입된다. 폴란드군의 2개 사단도 프랑스군 지휘 하에 전투에 동원된다.


한편 독일군은 강력한 육군은 물론 당시 세계 최강의 공군을 가지고 있었는데 나치의 권력서열 2위인 헤르만 괴링(Hermann Göring)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5600대 이상의 전투기와 폭격기 및 지원기를 동원할 수 있었다. 프랑스로 탈출한 폴란드군 중에는 소수의 공군 조종사들도 있었으며 그 숫자는 200명 정도였다. 이들은 밀려드는 독일군에 대항해 전투에 나가고 싶었지만 당장 자국군에 공급해야 할 전투기조차 부족했던 프랑스군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전투기들이 많지 않았다. 결국 이들이 받은 전투기는 독일군의 주력 메서슈미트(Messerschmidt) Bf-109 전투기에 비해 속도, 무장 등 모든 성능이 형편없었던 ‘콜드롱(Cauldron) C-714’ 전투기였는데 그래도 없는 것 것보다는 나았다. 결국 폴란드 조종사들은 독일군 침공이 일주일 이상 지난 5월 18일에나 해당 전투기를 인수할 수 있었다. 이후 장비 및 보급 등을 완료하자 5월 25일이 되었는데 이미 프랑스는 전쟁에 지고 있었고 연합군은 됭케르크(Dunkerque) 철수를 준비 중이었다. 폴란드 조종사들은 우여곡절 끝에 6월 8일부터 전투에 참가할 수 있었는데 전투기에 오른 폴란드 조종사들은 대단히 저돌적으로 독일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조국에서 독일군의 공격 및 폭격에 당했던 악몽을 잊을 수 없었는데 놀랍게도 복수심 때문인지 3일 간 벌어진 공중전에서 무려 12대의 독일 전투기를 격추하는 예기치 못했던 전과를 올렸다. 사실 폴란드 조종사들은 이미 폴란드 전투 시 랜딩 기어가 고정된 구형 ‘PZL P-11’ 전투기로도 독일군과 싸운 경험이 있었고 이 와중에 무려 130대의 독일기를 격추시켰던 것이다. 최종적으로 폴란드 조종사들은 프랑스 전투에서 53대의 독일기를 격추시켰다. 하지만 이들의 분전에도 불구하고 6월 초가 되자 프랑스는 ‘패배라는 운명’을 벗어날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영국은 자국에서 벌어질 다음 전투에 대비해서 사력을 다해 병력 및 항공기를 철수시키기 시작했다. 조종사들을 포함한 다수의 폴란드군들 역시 계속 투쟁을 이어가기 위해 영국으로 철수하였다. 이제 프랑스 전투(Battle of France)는 끝이 났고 히틀러에 대항하는 마지막 남은 섬나라에서 영국 전투(Battle of Britain)가 벌어지기 직전이었다. 전 세계 대부분의 사람들은 독일군이 다시 한번 쉽게 승리를 재현하며 영국을 점령할 것으로 예측했고 영국 내에서도 외무장관 핼리팩스경(Lord Halifax) 등이 독일과 협상하자는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수세기 동안 전 세계를 호령해 왔던 대영제국 역사상 최대의 위기 순간이었다.


‘미운 오리들’의 반란

출동 준비 중인 303 비행대의 조종사 (1940)

1940년 6월에 윈스턴 처칠이 전시내각 수상으로서 자신이 국민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은 ‘피와 수고와 눈물과 땀뿐’이라는 감동적인 연설을 통해 영국인들을 고무시켰지만 침공하는 독일군은 말로써 막는 것이 아니었다. 영국인들에게는 실제적인 무기와 군대가 필요했다. 영국에게 있어 한 가지 강력한 이점이라면 대륙과 영국 사이에 도버 해협이라는 바다가 있었고 이를 세계 최강의 해군이 지키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적인 독일해군의 전력은 다행히도 이전 노르웨이 전투에서 13척의 주력 전투함들이 침몰하면서 약화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이점이 있었던 영국 해군도 공중에서 공격하는 적기에는 매우 취약했는데 독일군도 이를 잘 알고 있었고 본격적인 침공 전에 우선 영국 공군을 박살 내는 것을 우선적인 전략 목표로 했다. 영국 공군만 없어진다면 대규모 ‘유보트(U-boot)’ 부대를 동원해서 상륙을 저지하려는 영국 해군을 박살내고 유유히 영국에 진입할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이제 양 측의 공군이 1차적인 싸움의 주력이 될 상황이었다. 문제는 프랑스 항복 이후 세계 최대 규모의 독일 공군에 대항하는 영국 공군의 전력이 상당히 부족했다는 점이었다. 당시 독일군의 주력 전투기 메서슈미트 Bf-109E형 대비 영국군의 스핏파이어(Spitfire) Mk I은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두 기종 다 우수했다. 문제는 전투기와 조종사의 숫자였다. 7월 한 달 동안 독일군과 영국군 전투기들은 도버의 해협을 위주로 ‘서로의 전력을 탐색하는’ 전투를 하고 있었다. ‘도버의 하얀 절벽(The white cliffs of Dover)’을 배경으로 양 측 전투기들 편대가 뒤엉켜 교전을 할 때는 ‘대전 중 가장 낭만적인 모습’으로 비추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전쟁은 전쟁이었고 매일 많은 조종사들이 죽어 나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수적으로 열세인 영국군에게 더욱 많은 조종사가 필요한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마침내 영국은 자국에 있던 외국인 가용인력들과 접촉하기 시작했다.


프랑스 패배 이후 영국에 집결한 폴란드 조종사는 100여 명이 조금 넘었다. 영국 공군은 1940년 7월에 이들을 2개의 폴란드 전투기 비행중대로 개편했는데 하나는 302 비행대였고 또 하나가 바로 303 비행대였다. 303 비행대는 영국 중서부 랭커셔(Lancashire) 블랙풀에서 창설되었는데 8월 2일에 런던 서부에 위치한 노솔트(Northolt) 공군 기지로 이동하게 된다. 부대는 13명의 장교 조종사와 8명의 부사관 조종사 및 100여 명 이상의 지상 지원요원으로 구성되었다. 폴란드인들은 독일군에게 복수하겠다는 열망이 체코, 벨기에, 캐나다, 남아공 등 다른 어느 나라 지원자보다도 컸는데 이들의 간절한 바람과는 반대로 주어진 첫 번째 과제는 교신에 필수적인 비행 관련 영어 공부였다. 이들 중 상당수가 영어로 의사소통이 안되었는데 이것은 전투 시 부대 간 무선 커뮤니케이션에 심각한 악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이러한 사실을 인정했기에 폴란드인들은 영어 공부에 열정을 쏟아붓는다. 폴란드인들의 노력에 기름을 붓기 위해 비행대장인 ‘존 켄트(John Alexander Kent)’는 자신도 폴란드어를 배우며 폴란드인들과 같이 호흡하기 위해 노력했다. 장시간 동안 전투기 또는 강의실에서 부지런히 영어 단어를 배운 폴란드인들은 두 번째 과제를 부여받았는데 어처구니없게도 그것은 ‘자전거 타기’였다. 영국 공군의 의도는 자전거 타기를 통해 폴란드인들이 영국식 편대 비행에 간접적으로 나마 익숙해지기 바랐던 것이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폴란드 조종사들이 비행에 관한 한 영국 조종사들 이상의 베테랑들이었다. 또한 모든 장교 조종사들의 계급은 이전의 폴란드군 계급과는 무관하게 영국 공군 소위로 통일되었다. 마침내 이들에게 전투기가 제공되었는데 그것은 폴란드인들이 기대하던 스핏파이어(Spitfire)가 아니었고 2 선급으로 분류되는 ‘허리케인(Hurricane)’이었다. 비록 이 기종이 튼튼한 방공 전투기였고 폴란드인들이 그동안 조종했던 어느 전투기보다 우수했지만 조금 더 좋은 것을 원하는 것이 인간의 기본적인 심리였다(사실 당시 영국 공군도 스핏파이어 공급이 넉넉하지는 않았다). 폴란드인들은 자신들을 은근히 무시하고 하대하는 것처럼 보이는 영국인들에게 본때를 보이고 싶었고 서서히 그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그 절호의 기회가 오게 된다.


303 비행대는 1940년 8월 31일에 공식 투입되기로 결정되었고 8월 30일에 마지막 투입 전 편대 비행을 하고 있었다. 비행 중 영국인 편대장은 멀리 이동 중인 독일군 폭격기들을 발견하게 되고 폴란드인들에게 교전하지 말고 기지로 돌아갈 것을 ‘매우 느린 영어로’ 명령한다. 하지만 폴란드인들은 하나 같이 교신이 안 들린다며 “반복을 요청합니다(Repeat please)”라는 말만 되풀이한다. 이후 갑자기 폴란드어로 대화하는 소리가 들렸고 뭔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을 느낀 영국 편대장이 주위를 둘러보았을 때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폴란드 조종사들은 이미 독일군 전투기 편대를 향해 미친 듯이 날아가기 시작했다. 이들은 마치 사냥개들이 먹잇감을 몰듯이 돌진했는데 목표물을 정한 후 날개에 장착된 6기의 7.7mm 기관총들을 난사했다. 독일 폭격기들은 사태를 파악하고 도망치기 시작했지만 결국 한 대의 폭격기가 연기를 뿜으며 추락하기 시작했고 곧 하얀 낙하산이 보였다. 33세의 ‘늙다리 소위’ 루드비크 파슈키예비치(Ludwik Paszkiewicz)의 일격이 독일 폭격기의 운명을 절단 내 버렸던 것이다. 노솔트 기지에 복귀한 파슈키예비치는 독일 폭격기인 도르니어(Dornier) Do-17을 격추했다고 보고했는데 후에 확인된 바에 따르면 이것은 폭격기를 호위하던 쌍발엔진의 메서슈미트 Bf-110이었다. 영국인 편대장과 303 비행대장인 존 켄트는 파슈키예비치의 규율부족과 편대 이탈에 대해 질책했다. 이후 그는 11 전투기 비행단장인 키스 파크(Keith Park)가 보낸 짧은 전보 하나를 읽어 주었다.     


“오늘 부로 303 비행대는 전투에 투입되었습니다. 축하합니다!”


비행대원들의 환호성 및 박수와 함께 전대원들이 영국 동료들과 상호 진심에서 나오는 감정적인 교감을 느낄 수 있었다. 폴란드 조종사들에게는 타국에서 오랜만에 느껴보는 동료애였고 이것은 비행대의 사기를 올리기에 충분했다.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독일군 사냥에 나설 시간이 되었다.


(하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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