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인 8월 31일 드디어 303 비행대의 첫 번째 공식 출격이 시작되었다. 이들은 늦은 오후에 출동했는데 목표는 영국의 남동부 끝에 위치한 켄트(Kent) 지방이었다. 드디어 이곳에서 독일군 호위 전투기 Bf-109 편대와 마주쳤고 즉시 ‘도그 파이팅(Dog fighting: 마치 두 마리 개가 서로 엉켜 싸우듯이 전투기들이 교전하는 상황을 나타냄)’에 들어갔다. 양 측의 전투기들이 서로 얽히는 가운데 결과가 나왔는데 폴란드인들은 이 날 무려 6대의 적기를 격추했다. 영국인 편대장이 놀라고 기뻐하는 가운데 귀환 후 기지 근처의 바에서 술잔을 돌리며 이 날의 성대한 전과를 축하했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이틀 후인 9월 2일은 부대원 모두에게 힘든 날이 되었는데 긴장과 기다림 속에 3회나 출격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303 비행대는 두 대의 적기를 격추시켰는데 그중 한 대는 체코슬로바키아 출신 부사관인 요제프 프란첵(Josef František)의 집요함 덕분이었다. 그다음 날인 9월 3일에도 프란첵은 도버 해협 근처에서 또 한 대를 격추했다. 프란첵은 영국에서의 훈련 초기에 랜딩기어 내리는 것을 잊어버려서 (사실 그는 구형인 ‘랜딩기어 고정식’ 비행기에 익숙해 있었다.) 동체 착륙을 해야만 했던 프란첵은 하루하루 엄청나게 성장하고 있었다. 9월 5일에 303 비행대는 5대의 적 전투기와 3대의 폭격기를 격추했는데 동 기간 중 자신들은 1대가 격추당했고 다른 2대가 불시착했다. 격추당한 폴란드 조종사는 비록 비행기는 파괴되었지만 낙하산으로 탈출하여 잠시 치료를 받은 후 다시 임무로 복귀할 수 있었다. 이 점이 홈그라운드에서 싸우는 영국과 폴란드 비행대의 유일하지만 엄청난 장점이었다. 한편 이 날의 전투에서는 상당히 이례적이고 특이한 상황이 발생했다. 적기 한 대를 격추시키며 총알을 모두 소진한 303 비행대의 스타니슬라브 카루빈(Stanislav Karubin)은 이후 독일기를 후방 상공에서 무작정 초저공으로 추격하였다. 독일기는 후방 상공에서 쫓아오는 영국기를 보고 순간 당황하게 되었는데 결국 지상에 좌측 날개가 충돌한 후 불시착하며 파괴되었다. 적에 대한 폴란드인들의 분노는 총알도 없이 적기를 추락시킬 정도였다! 9월 6일 출동에서는 적 전투기 5대와 폭격기 2대를 격추했지만 이 날 비행대의 폴란드인 리더였던 크라스노뎅스키(Zdzisław Krasnodębski) 심한 화상을 입는 부상을 당하며 전투에서 배제된다. 9월 7일은 303 비행대에게 최고의 날 중 하나였는데 무려 15분 간의 교전에서 2대의 전투기를 포함한 14대의 적기를 격추하는 기록을 달성하였다. 비행대는 이후 10 대 이상을 고정적으로 격추시켰는데 가장 전투가 치열했던 9월 15일의 ‘베틀 오브 브리튼 데이 (Battle of Britain day: 영국 공군이 독일 공군기 68대를 격추하며 독일의 침공 의지를 좌절시킨 날)’에는 독일기 15대를 격추하며 다시 한번 그 진가를 발휘했다. 이날 독일군은 런던에 대대적인 폭격을 하려 했는데 폴란드인들의 요격으로 폭격기는 런던에 제대로 접근하지도 못했다. 영국은 몰랐지만 독일은 9월 21일을 영국 침공일로 잡았고 9월 15일에 영국 공군을 전멸시킬 각오로 공격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는 폴란드 비행대를 포함한 영국 공군을 통해 결사적으로 저지되었던 것이다. 이제 전투 투입된 후 2주 정도 지났을 뿐인데 이때 즈음에는 폴란드 비행대의 격추 실적이 전체 영국 공군 전투비행대 중 최고 수준으로 올라가 있었다.
303 비행대가 기대 이상으로 승승장구하자 이들이 전과를 부풀리는 것은 아닌가 하고 의심을 품는 영국인도 다수 있었다. 그러한 영국 비행대장 중 한 명이 어느 날 이들의 전투를 자신의 전투기를 몰고 직접 참관했다. 몇 시간 후 그가 기지로 돌아왔을 때 그는 다른 동료들을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 대며 “폴란드 조종사들의 실력이 소문 그대로였다”라고 간결하게 말했다. 폴란드 조종사들의 엄청난 실력에 대해 한 폴란드 비행대원은 “우리는 독일군 기체의 검은 십자가 마크를 보면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격추 본능이 배가되었다. 그것은 절대적인 복수심에서 나온 감정이었다”라고 말했다. 그들은 독일군으로 인해 조국에서 쫓겨나고 머나먼 이곳까지 와서 싸워야 했고 그들의 가족 및 친지들의 생사도 알 수 없는 상황에 처해있었다. 이들 입장에서는 도저히 독일군을 증오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러한 증오가 죽음도 불사하는 전투 정신으로 승화되었고 폴란드인들을 한계상황까지 마구 몰아붙이도록 이끌었다. 보통 영국 조종사들은 적기 격추를 위해 400야드 거리에서 발포를 실시했는데 폴란드 조종사들은 정확도를 가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100야드까지 접근했다. 이것은 엄청난 차이였는데 이런 차이들이 축적되어 결국 최상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었다.
폴란드 비행대를 방문하여 격려하고 있는 영국 국왕 조지 6세
폴란드 조종사들의 성공은 영국인들의 관심을 끌기 충분했다. 9월 20일 BBC에서는 이들의 성과를 보도하고 감사한다는 메시지를 보냈는데 이들의 마지막 멘트는 “폴란드여 영원 하라(Long live Poland!)였다. 영국을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폴란드 조종사들은 기지 주변의 주민들에게도 사랑받았고 특히 젊은 아가씨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이러한 배경으로 인해 아가씨들을 유혹하기 위해 폴란드인으로 가장하는 영국군까지 등장하는 웃지 못할 사례가 있을 정도였다. 9월 26일에 303 비행대는 매우 특별한 귀빈을 모시게 되었는데 바로 영국 국왕인 조지 6세가 이들을 친히 격려하기 위해 방문한 것이다. 국왕이 부대원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 가운데 갑자기 비상 사이렌이 울리며 조종사들이 긴급출동해야 했다. 이후 버킹검 궁으로 돌아온 조지 6세는 돌아오자마자 조종사들의 전투 경과를 물었다. 몇 시간 후 그는 “전투기 4대, 폭격기 9대 등 총 13대 격추”라는 또 하나의 엄청난 전과를 기분 좋게 들을 수 있었다.
10월이 되자 독일군의 공격이 다소 줄어드는 모양새를 보이고 있었지만 부대원들은 방심할 수 없었다. 10월 8일에 비행대는 정찰 임무를 수행 중이었는데 부대로 귀환하던 도중 프란첵의 전투기가 편대를 이탈했고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이후 그의 전투기는 추락된 채로 발견되었는데 전투 피로에 따른 사망으로 추정되었다. 그가 거둔 격추 기록은 17대였는데 비영국인 중 단연 최고였고 이것이 불과 한 달 남짓한 기간에 달성했다는 점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10월 11일에 비행대는 40일간의 임무를 마치고 휴식 및 정비에 들어갔다. 일단 독일군의 영국에 대한 침공 의지는 당분간은 꺾인 것처럼 보였다. 303 비행대는 짧은 투입 기간 동안에 140여 대의 적기를 격추하며 교전비 14대 1을 달성했는데 이것은 놀라움을 넘어 하나의 기적을 만들어낸 것이었다. 이들은 독일과 영국 간의 팽팽하던 저울에 큰 힘을 보태 그 중심이 영국 쪽으로 기울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다.
배신 그리고 치유
1946년 6월 8일 런던에서 열린 ‘승전 1주년 기념행진’에서 행진 중인 미군: 폴란드군은 초대되지 않았다
1941년에 접어들자 영국 본토에 대한 직접적인 독일군의 위협은 거의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1월에 303 비행대의 전투기가 스핏파이어로 교체되었는데 이들의 임무는 지금까지 와는 반대로 대륙으로 날아가 독일군의 공군 기지 및 시설들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1941년 6월 22일 독일이 소련을 공격하면서 영국에 대한 폭격 및 침공 가능성은 현저히 줄어들게 된다. 한편 영국 정부는 새로운 동맹국인 소련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했는데 문제는 런던에 있는 폴란드 망명정부는 과거 독일과 함께 자국을 침공했던 소련을 극도로 의심하고 증오했다. 당분간은 공동의 적인 독일에 맞서 연합군의 이름 아래 함께 투쟁했지만 이들은 근본적인 출발점과 지향점이 달랐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양국의 갈등은 깊어져 갔는데 소련과 서방 간에 벌어진 테헤란, 얄타 등의 회담에서 폴란드 등 중소국의 운명이 당사자와 상의 없이 결정됨에 따라 폴란드 망명정부의 분노는 커져가고 있었다. 소련과 서방의 합의에 따르면 폴란드는 소련에 점령당한 동부 영토를 포기해야 했고 대신에 독일의 동부 영토를 자국으로 합병하게 될 것이었다. 한 마디로 나라 전체가 서쪽으로 이동하며 영토는 20% 줄어드는 역사상 유례없는 상황이 벌어질 것으로 보였다. 이러한 가운데 소련은 이미 폴란드를 포함한 동구권에 자신의 위성정권 수립을 계획했고 국가별로 이를 준비하고 있었다. 한편 폴란드 비행대는 종전까지 지상 공격 지원 및 폭격기 호위 등에 투입되며 유럽 본토의 ‘폴란드 2군단’과 함께 전 세계에 폴란드라는 나라의 위상을 대표하며 연합군의 승리에 기여했다.
1946년 6월 8일 영국 런던에서는 대독일 및 대일본 승전 1주년을 기념하는 퍼레이드가 열리게 된다. 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영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싸웠던 30개국 이상의 혈맹들이 참여하게 되었다. 이미 행사 계획은 전년인 1945년 11월부터 준비가 되어 있었고 각 국에 참가 초청장이 발송된다. 행사 당일 런던 시내의 가장 중심인 리젠트 파크, 화이트홀 등 주요 거리를 각 국 참전용사들이 위풍당당하게 행진했다. 미국, 프랑스, 체코슬로바키아, 네덜란드, 벨기에, 그리스, 인도, 중국은 물론 영국 식민지였던 트랜스요르단(현재의 요르단) 등 소국까지 참가하였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연합군 내에 무려 20만이나 되는 병력이 참전했던 폴란드가 보이지 않았다. 사실 폴란드의 참가 여부는 영국 정치, 외교계에서 뜨거운 감자였다. 당시는 1947년 3월의 트루먼 독트린(Truman Doctrine: 공산주의 확대를 저지하고 자유와 독립을 추구하려는 나라는 적극 지원한다는 미국의 정책. 흔히 냉전의 공식적인 시작이라고 얘기된다) 이전이었지만 이미 미국과 소련 간에는 냉전이 세계 여기저기서 시작되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폴란드에는 서서히 공산화를 위한 준비가 진행되고 있었고 이미 사법과 치안 등 주요 부문을 장악했다. 당시 폴란드 공산세력은 소련의 지시를 받는 꼭두각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런던의 폴란드 망명 정부에 충성하는 해외의 폴란드인들이 조국에 귀국하기를 거부한다. 여기에는 폴란드 비행대도 포함되었는데 돌아가면 체포되거나 죽음을 당할 것이 너무나도 뻔해 보였던 것이다. 문제는 당시 애틀리(Clement Richard Attlee) 수상의 영국 노동당 정부에서 소련의 눈치를 보았고 런던의 폴란드 망명정부 쪽 군대들에 대한 초청장을 발송하지 않은 것이었다. 처칠을 비롯한 많은 의원들과 특히 영국 공군 장성들이 말도 안 되는 조치라며 항의했다. 의원 10명은 정부에 “우리는 감사하는 마음도 잊은 민족인가?”라며 공식 항의서한을 보냈다. 이에 영국정부는 행사 직전에 단 25장의 초청장을 아직 영국에 있던 폴란드 비행대에만 송부했는데 비행대는 수많은 다른 폴란드군들이 여전히 영국에서 대기 중인데 자신들만 초청받는 상황에 대단히 분개했고 참가를 거부한다. 결국 폴란드 측에서는 아무도 참가하지 않았다. 제국주의의 행사라며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던 소련도 참가를 거부했다. 영국 거주 폴란드 비행대와 폴란드군은 영국의 배신에 대해 치를 떨었지만 바로 이것이 국제사회의 현실이었다. 작가이자 전사가인 존 키건(John Keegan)은 이것이 “냉전 시대에 벌어졌던 영국의 가장 부끄러운 행위 중 하나였다”라고 말했다. 몇몇 조종사들은 런던의 거리에서 행사를 바라보며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그들은 분을 삼키며 기다려야 했고 그 기다림에 답을 얻기까지는 조금 더 세월이 더 필요했다.
1948년 11월 2일 영국 노솔트 기지 인근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제복을 입고 모여 있었다. 이 자리에는 영국의 전현직 공군참모총장이 모여 있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폴란드 참전 용사들이었다. 이날 행사는 이들이 모금을 하여 만든 폴란드 공군 기념관(Polish Air Force Memorial)의 오픈 기념식이었다. 기념관은 탑의 모양이었는데 꼭대기에 폴란드 공군의 상징인 독수리가 있었고 탑 중간에는 폴란드군으로 구성되었던 영국 공군 비행대가 적혀 있었다. 영국인들은 폴란드 용사들이 조국으로 돌아갈 수 없는 현실에 같이 가슴 아파해 주었다.
2003년 9월에 영국에 사는 한 폴란드 참전 군인의 아들이었던 마이클 모신스키(Micheal Moszynski)가 당시 총리였던 토니 블레어(Tony Blair)에게 1946년 당시 폴란드군의 전승 행사 참여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에 대해 항의의 편지를 보냈다. 블레어 총리는 즉시 과거의 잘못된 정부의 행동에 대해 사과했다. 폴란드인들이 영국정부 인사로부터 사과를 받는데 6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전쟁 중 18000명의 폴란드인들이 14개 비행대 소속으로 영국 공군과 함께 싸웠고 그중 약 2000명이 전사했다. 전쟁 후 전범 재판에 서게 된 독일군 룬트슈테트(Gerd von Rundstedt) 원수에게 소련 측 인사들이 전쟁 중 가장 중요한 전투가 무엇이었는지 물었다. 소련군은 당연히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예상하고 유도질문을 한 것이었는데 룬트슈테트의 답은 의외로 ‘영국 전투’였다. 여기서 영국이 이겼기 때문에 이후 소련에도 지원을 할 수 있었고 독일군을 양면 전쟁의 악몽에 빠뜨려서 결국 연합군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폴란드 조종사들은 대전 중 가장 값진 희생을 한 집단이 되었는데 이를 통해 전쟁의 결과와 역사의 흐름까지 바꾸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