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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좋으니 Jun 10. 2024

감각을 향유함

황유원 시집 『하얀 사슴 연못』(창비, 2023)을 읽고

하얗게 쌓인 눈, 아무도 밟지 않은 길. 내가 처음으로 밟고 싶다는 마음보다는 아무도 밟지 않길 바라는 새벽이 있었다. 황유원의 시집 『하얀 사슴 연못』에 말을 더하는 것이 - 조금 과장되게 표현하자면 - 태초의 순수를 건드리는 기분이어서 “할 말을 잃고 만 사람의 얼굴”(「무언어」)처럼 “머릿속이 새하얘”졌다(「백지상태」). 하지만 태초의 아름다움도 발견되어야 비로소 아름다움을 얻듯이 백지에 첫 글자를 적듯 떨리는 마음으로 그의 시를 발견해서 향유하길 원한다.     


그의 시집의 처음이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으로 시작되는 것이 좋았다. “당신 안에서 쉬기 전까지, 우리 마음은 정처 없습니다.”라는 한 철학자의 짧은 고백은 시집 전체 분위기를 아우른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던 『고백록』으로 포문을 연 황유원의 시는 종교적 이미지가 여러 장면에 깔려 있다. 그 때문에 하얀, 사슴, 연못은 각각 하나이면서 전체로서의 하나이자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인 기독교의 삼위일체를 떠올리게 한다. 우리의 내면세계는 외부로부터 받은 것이 공명하는 곳이기에 철학을 전공한 시인의 성찰이 드러날 수밖에 없음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건너편 테이블에 앉은 중년 여인들이

하나님이 왜 역사하시는지에 대해 떠들고 있었다

돌아가야 할 곳이 있다고 했다

그들이 일상어처럼 사용하는 은혜와 증거와 속죄와 희생과 지상낙원

같은 말들이 눈 내리는 창밖을 더욱

비현실적으로 만들어가고 있었다

―「낮눈」 부분     


어쩌면 천국은 결국

고작 이층에 있는 것이지만

때로는 이층까지 가기도

그토록 힘들다는 것을 생각한다

천국이 알아서 내려와주면 좋으련만

천국은 저 위에 있어서 우리는 자꾸

올라가다 미끄러지기만 한다는 것을

결국 제압되어 안락사에 이른 후에도

천국은 내려올 생각이 없다는 것을

―「에스컬레이터」 부분     


존재는 유(類)안에 있다. 그리고 누구도 예외 없이 유한하다. 이 사실이 종종 불안하고 불만족하며 불합리하게 여겨진다. 화자는 신을 향유하면서도 인식의 심연에서 인간 자신의 근본적인 연약함에 대해 고요한 마음으로 대상을 관찰하며 사유한다. 그리고 이러한 사유는 존재에 대한 공간을 열어주며 향유하지 못하는 존재에 대한, 타자성에 대해 존중하는 태도를 가능하게 한다.


『하얀 사슴 연못』은 시 전체의 이미지와 잘 어울리는 탁월한 제목이지만 만약 그의 시집이 많이 판매되지 않았다면 시집 제목 때문이 아닐지 생각했다. 그의 시가 많이 읽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아쉬웠는데 시인이든 편집자든 모두 원한 제목이었다면 그 또한 이유 있는 선택이라고 지지하는 마음이지만 조금 타협점을 찾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마음이었다. 여기까지는 어디까지나 시집을 다 읽기 전의 생각이었고 그의 시집을 다 읽은 후에는 『하얀 사슴 연못』이 왜 시집 제목이 되었는지 이해되는 바였다. 시에 제목이 될 만한 구절이 이렇게나 많은데 싶었지만, 막상 시에서 찾아낸 어떤 아름다운 구절을 붙여도 『하얀 사슴 연못』이 소유한 이미지를 능가하지는 못했다.     

 

어쨌든 그의 시는 한마디로 “말이 필요 없”(「무언어」)을 만큼 깨끗했고 “다 마신 찻잔 바닥에 녹지 않고 남은 설탕처럼 태연히 남아 있는 마음”(「포카라」) 같은 것이었다. 시베리아의 야쿠트인들이 입김이 얼어붙는 소리에 처음으로 이름을 붙여준 것처럼 “무심한 아름다움”(「별들의 속삭임」)의 언어로 감각의 향연을 펼친다.     


시베리아의 야쿠트인들은

입김이 뿜어져 나오자마자 공중에서 얼어붙는 소리를

별들의 속삭임이라고 부른다     

별들의 속삭임을 들어본 건 아마

아쿠트인들이 처음이었을 거다

그들 말고는 그 누구도 그 어떤 소리에

별들의 속삭임이라는 이름을 붙여준 적 없었을 테니까

―「별들의 속삭임」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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