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미 시집, 당신의 세계는 아직도 바다와 빗소리와 작약을 취급하는지
당신의 세계는 아직도 “바다”와 “빗소리”와 “작약”을 취급하는지 콕 집어 묻는 시인은 타인의 세계를 세밀하게 관찰하는 사람이지만 그 세계 속으로 굳이 들어가려 하지 않는다. 그저 “몰래 바다에 다시 손을”(「오늘의 주문 목록」) 대보거나, “달걀 같은 창밖만 하염없이 내다 보”(「달걀 빌리러 가기」)는 것이 전부이다. 시인 스스로가 “하루에 한두 번씩은 꼭 어두워”(「손전등」)져야 하는 사람이어서 “손전등을 켜 들고 다가”(「손전등」)가 타인의 세계에 불청객이 되려 하지 않는다. 시인이 타인과 그 세계에 가는 방법은 주로 시인의 사색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 배려가 쓸쓸하고 적적하다. 그러느라 매번 후회하면서도 “떠나면 후회할까 봐 후회를 떠나지 못하”(「결심은 베이커리처럼」)며 “청춘 다 낭비하고”(「밤의 프랑스어 수업」) “하루의 구석에서”(「밤을 믿다」) 오직 “믿을 구석”(「밤을 믿다」)인 밤을 기다릴 뿐이다.
신발을 구겨 신 듯
성격에 휩쓸려
인간에게도 바다에게도 가지 못했다
후회에는 갔다
나 혼자 내 힘으로
매번
―「휩쓸리다」 부분
시인의 내면에선 실없이 웃음 터지는 장면들이 쉴 새 없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표면적으로는 드러나지 않기에 타인에겐 “죽은 사람 취급”(「취급이라면」)을 받을지도 모르나 시인은 “살아 있는 게 너무 재밌”(「취급이라면」)다고 말한다. “잔뜩 약속하고”도 “항상 달려가지 않”(「달걀 빌리러 가기」)는 시인은 외로움을 숙명이라 생각하며 외로움과 즐겁게 사는 법에 능숙해진 사람이다.
내가 고독해서 얼마나 재밌는지를 알면
걱정이 분통과 질투가 되려나요
나는 비정하지만 조용합니다
무심하지만 평온합니다
나는 잘나지 못했지만 혼자 잘났습니다
그대들도 그대들대로 잘났으니
잘나기 바랍니다
―「약속이라면」 부분
무엇보다 시인은 지질구질하고 수치스러운 과거의 경험을 유쾌하게 보여주면서 누군가의 마음속에 하나씩은 품고 있을 과거의 지질했던 나의 경험을 위로한다. “아무리 희미해도 상관없습니다”(「취급이라면」)라고 말하는 시인이 오히려 또렷해지는 순간이다. 현재의 고독과 빌어먹을 과거의 나를 끌어안고 온전한 나를 완성해 가려는 시인의 모습. 어제와 오늘과 내일의 추한 나를 기꺼이 감당하고 마주하려는 시인의 모습이 “세상에 오직 한 사람의”(「역무원을 찾아서」) 존재로 선명해진 것이다.
너무 작고 말라서 잘 보이지도 않는 노인한테
미친 듯이 경적을 누르며
욕을 해 대는 남자를
사귄 적이 있었다
그 오토바이 뒤에 앉아서
남자의 허리를 껴안고
이 사랑이 영원하게 해 주세요
빌기나 했던
빌어먹을 여자였던 시절이 있었다
빌어먹을!”
―「그런 남자를 만난 적이 있었다」 부분
고독. 사전적 의미로는 세상에 홀로 떨어져 있는 듯이 매우 외롭고 쓸쓸하다는 뜻이다. 하지만 독일의 신학자 폴 틸리히는 ‘외로움이란 혼자 있는 고통을 표현하기 위한 말이고, 고독은 혼자 있는 즐거움을 표현하기 위한 말이다.’라고 했다. 고독한 시간이야말로 스스로에게 충만해질 수 있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수많은 관계 속을 전전하며 결국 가장 중요한 나와의 관계를 잃어가는 외로운 세계에서 빠져 나와 혼자 있는 즐거움을 발견해가는 고독한 시인에게 답장을 보낸다. “나는 여전히 바다 같은 작약을 빗소리를 오래오래 보고 있습니다”(「취급이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