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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ME Nov 30. 2022

전남편이 문자를 보냈다


지잉- 


짧게 진동한 휴대폰 화면을 뒤집어보자 문자가 하나 와 있었다. 요즘엔 주로 카톡을 보내지 않나? 광고인가? 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 했는데, 가만 보니 이름이 저장된 상대로부터 온 것이었다. 


처음엔 잘못 본 줄 알았다. 그러나 욕지거리로 저장된 이름은 몇 번을 다시 들여다보아도 그대로였다. 어딘가 익숙한 글자들과 욕설의 조합이라니? 평소 욕을 하는 것도, 듣는 것도 몸서리치게 싫어하는 내가 왜 이 사람을 이름대신 욕으로 저장했을까? 


‘아.’


그러다 벼락같은 깨달음이 뒤따랐다. 


‘이거 누군가 했더니...’


전남편이었다. 


정체를 깨닫고 났더니 긴장이 풀리면서 얕은 탈력감이 덮쳐왔다. 날것 그대로의 욕설로 저장된 이름을 바꿔놓을까 잠깐 고민하다 그냥 놔두기로 했다. 이 사람에 대한 건 뭐든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과거 한때 내 인생을 좌지우지 흔들었던 인물이지만, 미래에는 그의 생각 한 자락조차도 남기고 싶지 않아서다.


‘하도 오래 돼서 잊고 살았는데.’


전남편으로부터 온 문자를 곧장 알아보지 못한 데는, 이름 석 자를 지우고 욕설로 바꿔놓은 내 탓도 있지만, 지나치게 평온한 문자의 내용 탓이 더 컸다. 마치 친한 동네 친구에게 안부 문자를 보내듯, 전남편은 짜증날 정도로 친근한 문자를 보냈다.


「잘 지내지? 모처럼 쉬는날이어서 시내왔는데 점심 같이 먹을래? 안되면 담에 보구~ ^^」


본인이 쉬는 날인 것과 나를 만나는 것 사이에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까? 내가 혹시나 미쳐서 자신도 모르는 새 전남편과 만날 약속이라도 잡았던 건 아닌지 혼란스러웠다. 


스스로에 대한 의심이 일 정도로 지나친 친근함이 잔뜩 묻은 메세지었다. 그러나 그래, 여기까진 적당히 심호흡하며 읽으면 열이 뻗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승오는 안와도 됨. 그냥 너한테 맛있는거 사주고 싶어서 연락했어」


이 대목에서 순간적으로 휴대폰을 집어 던져버릴 뻔 했다. 간신히 충동을 참아낸 나는, 죄 없는 휴대폰을 거세게 붙들고 노려보았다. 


아이의 친부, 친모로만 엮인 사이에 도대체 왜 아이를 빼고 만나자는 건지도 미지수였지만, 불러내는 핑곗거리가 ‘맛있는거’인 부분도 무척 거슬렸다. 가정폭력으로 이혼했다는 꼬리표는 한평생 나를 따라다닐텐데, 폭력 가해자인 전남편이 이런 태도로 가볍게 연락을 해온다는 게 견딜 수 없을 만큼 기분이 나빴다. 


현재의 내가 만족스러운 삶을 살고 있고, 과거를 대부분 기억 속에서 삭제해버렸다 하더라도, 그와 별개로 그를 용서할 마음은 전혀 없다. 그의 주먹이 남기고 간 상처는 아물었을지 몰라도, 나와 아이 마음속의 멍은 쉬이 사라지는 게 아니니까. ‘내 자식을 아프게 한 원수 같은 놈’이라는 평가는 상대가 무덤에 묻혀 백골이 되어도 사라지지 않을 터였다. 


승오라는 존재로 인해 내가 행복해지면서, 전남편은 약간의 반사적 이익을 누리게 되었다. ‘내 삶을 망쳤다’는 죄목에서 ‘완전히 망치지는 않았다(승오를 만나게 해주었으므로)’라는 면죄부가 그에게 주어졌던 것이다. 요즘의 나는 자신이 망가졌다고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남편 없이 혼자 애를 키우면서 생기는 여러 해프닝들이 즐겁고, 기껍기까지 하다. 전남편이 폭력을 꾹꾹 참는 바람에 혹여 이혼에 성공하지 못했다면, 나는 한평생 그의 강박증을 걱정하며 말라갔을지도 모른다. 눈치 보며 벌벌 떠는 삶, 그런 삶이 더 비극에 가까울 것이다. 


허나 내가 나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하게 되었다 한들, 전남편의 모든 잘못이 사하여지는 것은 아니다. 그를 미워하는데 에너지를 쓰기는 싫지만, 두 번 다시 엮이고 싶지도 않다. 꽤 오래 힘을 주고 있었더니 손끝이 저려왔다. 휴대폰을 내려놓고 천장을 올려다 본 나는 천천히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여전히 저린 손가락을 주무르고, 손목을 돌려 스트레칭 하면서. 신기하게도 그렇게 많이 열 받지는 않았다. 


이혼 한 지 6개월쯤 되었을 땐가, 전남편의 엄마에게 전화가 왔을 때 온 몸이 사시나무 떨 듯 덜덜 떨었던 것에 비하면 말이다. 전 남편의 엄마는 수화기 너머로 대뜸 이렇게 말했었다.


“니가 맞을 짓을 했것지.”


대수롭지도 않다는 말투였다. 그 말을 들은 직후 내 몸은 전기 충격이라도 맞은 듯 떨리기 시작했다. 머리 끝 부터 발 끝 까지, 말 그대로 온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간신히 붙잡고 있는 휴대폰을 떨어트리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격하게 떨었다. 이빨이 딱딱 부딪혔다. 한여름이었는데도 냉동고에 들어온 것 마냥 뼛속이 시렸다.


“그, 그러면 애는요. 나는 그렇다 치고 그 어린 애기는 왜 팼대요!”


“내가 그걸 우째 아노. 그것도 뭐 맞을만 하니까 맞았것지.”


자식의 폭력성까지 감싸다니, 대단한 모정이었다. 팔다리가 떨리다 못해 격하게 경련하기 시작해서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 끊기 전에 소리지르며 뭐라고 외쳤던 것 같은데 내 몸에서 나는 소리가 아닌 것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멈추고 싶어 덜덜대는 팔다리를 거세게 붙잡아봐도 그저 떨림에 다른 떨림이 더해질 뿐이었다. 심호흡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헉헉대는 숨을 몰아쉬며 한참을 엎드려 진땀을 뺐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그때에 비하면 놀라울 정도로 아무렇지 않았다. 떨림은커녕 그다지 화도 나지 않았다. 


의자에 털썩 주저앉은 나는 머릿속으로 ‘이놈이 또 무슨 꿍꿍이람..?’하고 곰곰이 생각하다가 ‘아차, 이놈에 대해선 생각조차 깊게 하지 않기로 했지.’하고서 곧장 답장을 보내버렸다.


‘너만 생각 없이 사는 거 아니야, 나도 과거 따위 아무렇지 않아졌다고.’


약간 우월감에 젖어 바쁘다는 식으로 아무렇게나 답장을 보냈는데, 기다렸다는 듯 전남편이 

메시지를 또 보내왔다.


「알겠어. 최근에 폰을 잃어버려서 그런데 승오 최근 사진좀 보내주라~ 좋은하루 보내고^^」


‘아니, 뭐라는 거야, 이 자식이?!’


계속해서 친근하게 답장하는 꼴에 썩 기분이 나빠졌다. 내가 보내 줄 것 같냐, 고 쓰려다가 다음에 보내겠다고 답장을 하곤 휴대폰을 멀리 저편으로 밀어버렸다. 어디 한 번 기다려 보라지, 절대 안 보낼거니까. 그러고 보니, 이혼을 앞두고 전남편의 휴대폰에 있던 아이 사진을 싸그리 지워버린 일이 떠올랐다. 휴대폰에 연결된 클라우드로 접속하여서 모든 사진과 동영상을 삭제했었다. 집안 곳곳 있던 아이 사진도 다 챙겨서 가지고 나왔다. 아마 그는 이혼 후 시간이 꽤 지나서야 이 사실을 깨달았겠지만, 아이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라 조그만 타격조차 받지 않았을거다. 그런 그가 왜 사진을 요구하지?


찬찬히 숨을 고르다 문득 그의 엄마를 떠올렸다. 그녀는 대놓고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이라 외치는 부류의 사람이었다. 늦게 결혼한 전남편의 형에게는 승오 보다 어린 딸이 하나 있었는데, 부인 되는 분 성격이 보통 아니라 시엄마가 아들을 낳아라 마라 간섭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부부의 나이를 고려했을 때 둘째는 어려울 수 있고, 낳는다 하더라도 꼭 아들이라는 보장도 없다.


'아, 그래서. 사진 보내라고 연락 한거구나..'


‘집안의 대’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전남편의 엄마가, 아무리 사진을 요구한들 줄 생각이 없었다. 그녀가 ‘맞을 만 하니까 맞았겠지’라며 폭력을 두둔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그런 일이 있었다니, 내가 미안하다.’라며 약간의 미안함이나 걱정이라도 비쳤다면? 어쩌면 아이 손을 잡고 직접 할머니를 만나러 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전남편은 제 어미의 말이라면 벌벌 기는 천하의 마마보이였고, 늙은 여자는 손주 사진이 필요했겠지. 살짝 열받으려고 하는 타이밍에 또다시 휴대폰이 징징댔다. 남자친구로부터 걸려온 전화였다.


“뭐해? 쉬는 시간이라 전화해봤어.”


친근하게 귓가에 울리는 목소리에 절로 긴장이 풀리고 안심이 되었다.


한숨을 푹 쉰 나는 전남편에게 문자가 왔던 일을 한참 재잘거리다가 ‘너무 열받아! 짜증나!’라고 외치곤, 곧바로 다른 주제로 넘어가 수다를 떨었다. 역시나 남자친구는 '그래, 그래...'라며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나는 마음이 편해질때까지 한참 떠들다가, 아이 일정에 대해서도 공유했다. 승오 다음주에 학교에서 아나바다 행사한대서 준비물 챙겨줘야 해, 그리고 다다음주에 공개수업한대, 이번 겨울 지나고 나면 2학년이 되겠네, 시간 참 빠르다, 그래서 어쩌고 저쩌고... 한참 떠드는 동안 마음은 더없이 평온해졌다. 그는 이따 또 전화할게, 라며 끊었고, 나는 기분 나쁜 문자 따위는 금세 훌훌 털어버리고 내 일상으로 돌아가 바쁜 하루를 이어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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