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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dam Nov 19. 2022

가장 아름다운 인생의 한 순간

-추억과 힐링의 장소 홍콩의 영화 배경지를 가다


제1화 스텁스 로드 전망대 

(영화-영웅본색 2 배경지)          

                    

내가 초등학생 시절이었던 1980년대의 우리나라는 늘 매캐한 최루탄 냄새와 자유를 향한 어른들의 갈망으로 인해 나라 전체가 조용할 날이 없었다. 학교에서는 선생님들이, 집에서는 부모님들이 내게 늘 하지 말아야 하는 것들, 조심해야 하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고 나는 무슨 이유 때문인지 너무 어려 잘 알지 못했지만 그냥 마음 한 구석이 어딘지 모르게 불안정하고 불편한 마음을 가지고 살았던 것 같다.


힘든 이 시기에 나의 유일한 낙은 하굣길에 부모님 몰래 빌려오는 비디오테이프였다. 지금은 좀처럼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비디오테이프는 내가 초등학생 때만 해도 지금의 아이패드나 최신식 스마트폰을 능가하는 신문물 영역에 속했고 집에 비디오가 있다는 것은 부의 상징까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친구들에게 자랑할 만한 대상이기에 충분했다. 지금처럼 유튜브나 OTT같이 다양한 영상매체가 없던 1980년대는 오로지 TV로 만화영화나 드라마, 연속극을 보는 수밖에 없었는데 비디오테이프로 TV에서 보여주는 영화가 아닌 녹화된 영상을 한 번도 아닌 여러 번 볼 수 있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상당히 파격적이고 획기적인 일이었다. 당시 우리나라에서 가장 인기가 높았던 영화는 홍콩 영화였는데 주윤발, 유덕화, 장국영, 양조위, 여명, 금성무 같은 홍콩배우들의 인기가 정말 많았다. 워낙 잘생기기도 했지만 이들은 연기뿐만 아니라 노래도 잘하는 경우가 많아서 나같이 사춘기를 직전에 둔 초등학생들이나 중고등학생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기에 충분하였다. 


이런 이유로 나는 문지방이 닳도록 날이면 날마다 하굣길에 비디오테이프를 빌려왔고 정말 비디오테이프가 녹아서 늘어날 정도로 홍콩영화를 보고 또 보며 홍콩의 매력에 빠지게 되었다. 당시의 홍콩도 1997년 중국 반환을 앞두고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불안정한 시기를 겪고 있었고 그런 홍콩 사람들의 정서가 그 시절 홍콩 영화 속에 그대로 묻어난 경우가 많았다. 


영화 영웅본색 2는 1987년에 개봉했던 영웅본색 1의 폭발적인 흥행에 힘입어 이듬해 1988년도에 개봉한 영화이다. 이미 1987년도에 개봉한 왕조현, 장국영 주연의 또 다른 히트작 천녀유혼을 보고 장 국영이란 배우에 대해 완전히 빠졌던 나는 영웅본색 2가 나왔다는 비디오 가게 사장님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예약까지 해놓고 친구들 중에 거의 처음으로 보게 된 것 같다. 영웅본색 시리즈는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홍콩영화의 대명사로서 내용을 모르더라도 작품 제목까지는 한두 번이라도 다들 들어 봤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때 암흑가를 주름잡는 보스였으나 손 씻고 새 삶을 시작한 자호(적룡), 경찰의 길을 걷는 자호의 동생 아걸(장국영), 자호와 함께 암흑가의 화려한 나날을 보냈으나 몰락한 채, 때를 기다리며 과거의 영광을 되찾고자 하는 소마(주윤발). 세 남자의 뜨거운 형제애와 브로맨스를 그린 영화로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오 우삼 감독의 히트작이다. 영웅본색은 1편 흥행 후 총 4편의 시리즈를 만들게 되는데 나는 개인적으로 1편도 좋지만 2편을 가장 좋아한다. 이유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배우 장국영이 나의 최애 야경 스폿 홍콩의  스텁스 로드 전망대 공중전화 박스에서 죽는 장면이 나오기 때문이다. 


스텁스 로드 전망대

스텁스 로드 전망대는 홍콩의 완차이에 위치한 곳으로써 홍콩의 매력적인 야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환상적인 야경 포인트이다.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홍콩의 백만 불짜리 야경을 바라다보며 갓 태어난 딸의 이름을 지어주면서 생의 마지막을 맞게 된 영화 속 장국영..!!


너무 아름다운 곳에서의 마지막이라 더욱 아쉽고 가슴 아팠던 그때 그 영화 속 장면이 30년도 훨씬 지난 지금까지도 영웅본색의 주제곡 당년정(當年情)과 함께 내 머릿속 아련했던 추억으로 남아있다. 




제2화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

(영화-중경삼림 배경지)  

   


어릴 때부터 홍콩영화를 좋아해서였을까? 

나는 중국어가 좋았고 중국문화가 좋았다. 게다가 성적대로 가게 된 고등학교에서는 제2외국어로 중국어를 가르치고 있어서 자연스럽게 중국어를 배우게 되었고 중국어 노래반에 들어가 좋아하던 장국영이 부른 노래들을 부모님의 눈치를 보지 않고 실컷 듣고 부르게 되었다. 


아직도 장국영이 부른 중국어 버전 노래들은 광둥어든 북경 표준어든 30-40년이 지난 지금까지 줄줄 외워 따라 부를 수 있을 정도니 당시 내가 얼마나 홍콩과 중국문화에 빠져 살았는지 쉽게 알 수 있다.


중문학과를 가고 싶었으나 좀 더 넓은 세상을 보고 배우고 싶어 관광경영학과에 진학하게 되었고 졸업 후 어엿한 여행사 직원이 되었다. 능수능란하진 않았지만 영어와 중국어가 가능하고 홍콩과 중국문화에 익숙했던 나는 신입사원 시절부터 주로 중국 팀에서 일하게 되었고 어릴 때부터 그토록 가고 싶어 했던 홍콩을 첫 출장지로 가게 되었다. 


대학 졸업 후 가장 예쁘고 꽃다웠던 내 나이 25살 때 가게 된 홍콩은 내 인생 최고의 시절에 가게 된 꿈의 낙원이었다. 홍콩에 도착하자마자 가장 처음 간 곳은 바로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가 있는 홍콩의 소호 지역이었다. 이곳은 1995년에 한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왕가위 감독의 영화 중경삼림의 주요 배경지로서 우리나라 관광객들이 홍콩에 가면 잊지 않고 꼭 가는 관광지였다.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 (영화 중경삼림 중에서)


사진 속 여주인공이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쭈그리고 앉아 에스컬레이터 바로 옆 건물에 살고 있던 짝사랑 경찰 남자가 있는지 없는지 살펴보고 있다. 짧은 쇼트커트의 머리와 노란색 크롭티를 입은 왕페이의 모습이 발랄하면서도 청순한 20대의 첫사랑을 잘 나타내고 있다. 


1993년도에 완공된 세계에서 가장 긴 에스컬레이터인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는 1997년도로 예정되어 있던 홍콩의 중국 반환이라는 어두운 사회 분위기와는 대조적으로 발전된 홍콩의 위상을 대변하는 곳으로 그려진 곳이기도 하다. 영화 중경삼림이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끈 이유는 1990년대 세기말, 미래를 알 수 없는 불안정하고도 어두운 분위기를 몽환적인 영상기법과 화려한 영상미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또한 추운 겨울 뉴욕에서 따뜻한 캘리포니아를 그리워하면서 부른 노래 ‘캘리포니아 드림’이라는 OST는 이 영화의 인기를 더욱 부각하는데 많은 역할을 했다. 


극 중 남자 주인공이 실연의 아픔을 잊어보고자 운동장 트랙을 계속 돌면서 “ 이렇게 열심히 뛰어 몸 안의 수분을 다 빼버리면 더 이상 흘릴 눈물이 없겠지”라는 대사라든지 “사랑의 유통기한이 있다면 만년으로 하고 싶다”라고 말했던 장면은 아직까지도 내 머릿속에 잊지 못할 장면으로 남아있다. 시린 사랑의 상처 끝 따뜻한 햇살로 새롭게 설레는 홍콩의 청춘들과 그런 4명의 청춘들의 아련한 그때 그 추억들이 바로 이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를 통해 내 기억 속 추억의 장소가 되어 남아있다.

영화 중경삼림은 청춘들의 방황이 잘 드러나면서도 그들 내면의 억압된 감정을 겉이 아닌 속으로 표현한 작품인 것 같다. 


수필 같은 편안함을 주면서도 1990년대 세기말의 불안하면서도 혼재 그 자체인 홍콩의 당시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혼란스러운 20대의 청춘과 사랑을 뛰어난 영상기법을 통해 보여준 명작이다. 

나 역시 당시 20대였고 나 자신의 정체성과 불안정한 미래에 대한 고민 때문에 힘들어했었는데 영화 중경삼림을 보고 많은 위로와 위안을 받았던 것 같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 돌이켜 보면 힘들었던 그때 그 시절이 가장 빛났던 내 인생의 순간이었던 것을 그때는 왜 몰랐을까?


그런 빛나던 20대의 내 인생에 홍콩이란 곳은 늘 함께 있었다.



제3화 골드핀치 레스토랑

(영화-화양연화 배경지)     



왕가위 감독이 어느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움직이는 것은 바람도 깃발도 아니다, 바로 그대의 마음이다’

무슨 일이든 내 마음의 상태가 중요하다는 뜻이다. 

나는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았고 사명감과 자부심을 가지고 열심히 일했다. 하지만 무슨 일이든 좋아하는 일을 생업으로 삼으니 좋아하는 일이 아니라 살기 위해 하는 일처럼 되어 버리는 순간이 종종 생기게 되었다.

그때마다 나는 휴가를 내고 홍콩을 갔다. 

20대 꽃다운 시절부터 내 인생 빛나는 순간도, 방황했던 순간도 늘 함께 했던 홍콩이기에 난 홍콩이 좋고 마치 고향처럼 느껴졌다. 그 마음의 고향인 홍콩에서 나는 충분히 충전하고 마음을 되새기며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곤 했다. 

영화 화양연화가 개봉된 2000년도 한국의 상황은  세기말 증후군에서 벗어나 2002년 월드컵을 기대하고 사회 전체적으로 새롭고 활기찬 기운이 느껴지는 듯했다. 하지만 그런 우리나라의 분위기와는 달리 1997년도에 결국 중국으로 반환된 직후의 홍콩의 모습은 아직까지도 혼재된 분위기와 불안감으로 혼란스러운 분위기였다.

화양연화(花樣年華)는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라는 뜻이다.

왕가위 감독은 영화 화양연화를 통해 과거 1960년대 홍콩의 화려한 전성기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한다. 그의 수많은 작품들 중 최고의 작품이라는 평이 있을 정도로 뛰어난 영상미와 작품성을 보여주지만 한편으로 화려한 도시 홍콩의 이면에 자리 잡은 외로움과 고독을 인간 내면의 깊은 성찰과 쓸쓸한 정서를 통해 담아내고 있다. 


골드핀치 레스토랑 (영화 화양연화 중에서)


나 역시 여행사를 다니면서 또래들에 비해 해외출장을 자주 나가게 되었고

그런 나를 친구들은 몹시 부러워하였다. 하지만 단순 해외여행이 아닌 업무 출장이었고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을 만나는 서비스업이다 보니 거기서 오는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사진 속 두 남녀 주인공들은 각자의 남편과 아내가 서로 바람을 피우고 있다고 생각했고 그 관계의 시작이 궁금해진 두 사람도 비밀스러운 만남을 이어가고 그 둘 만큼은 감정이 깊어지지 않기 위해 노력하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서로에게 점점 빠져들기 시작한다. 사진 속 영화 배경지는 골드핀치 레스토랑으로 두 남녀가 데이트했던 장소이다. 영화 전반부에 흐르는 나지막한 OST와 어두운 조명, 거울에 흔들리는 듯한 영상이 불안한 두 주인공들의 심리를 잘 묘사하고 있다. 


‘내 마음은 어디로 향하는 것일까’ 


전하지 못한 진심을 가슴속 한편에 깊숙이 숨겨둔 채 둘은 이별하고 만다.

나 역시 황금처럼 빛났지만 미래를 알 수 없어 불안하기만 했던 20대를 지나 30대가 되자마자 결혼을 했고 최근까지 여행사 직원으로 일을 하다가 50대를 목전에 둔 지금 새로운 일을 하면서 동분서주하고 있다. 


과거라는 것은 객관적으로 보여주기 힘든 주관적인 일이다. 누군가의 머릿속에 남아있는 기억이라는 것은 자기가 원하는 것, 기억하고 싶은 것만 남기는 거라서 어떤 것들은 짧은 일이었지만 긴 기억으로 남아 있고 반대의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결국 지금이 중요한 게 아니라 남아있는 기억이 중요한 것이란 얘기 일수도 있다. 


인생의 가장 찬란했던 순간이 과거였든 아니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다만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의 머릿속에 찬란한 순간이 되어 영원히 기억되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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