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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투 battu Feb 16. 2022

첫 워케이션을 망친 사람이 있다?

02년생의 제주 피난기

월드컵 못 봤고요. 대학 안 다닙니다!


2002년에 태어나 올해 스무 살인 사람. 벌써부터 1번의 퇴사와 2번의 취업을 맛본 사람. 전 직원 재택근무를 하는 회사에 들어간 사람.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 지루한 사람. 야밤에 컴퓨터 앞에서 한 시간째 고민하고 있는 사람. 위 문장들에서 '사람'이 가리키는 인물은 모두 한 사람. 바로 '나' 되시겠다.


짧다면 짧은 20년의 인생을 수식하는 말들이 나름 스펙터클한 나는, 또 새로운 수식어를 붙일까 말까 하며 컴퓨터 앞에서 한 시간째 고민 중이다. 그 수식어가 무엇인고 하니, 바로 '제주도에 2주 동안 워케이션 다녀온 사람'이다.


재택근무의 달콤함도 한 3개월 동안 맛보니 혀가 마비될 지경이다. 비록 내가 사람을 만나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는 않지만, 매일같이 출근, 퇴근, 식사, 수면. 이 네 가지 단어가 전부인 일상은 질릴 때가 되기도 한참 전에 됐다.


그래서 떠올린 수가 바로 '워케이션'이다. 워케이션이란? 일(Work)과 휴가(Vacation)의 합성어로, 원하는 곳에서 업무와 휴가를 동시에 할 수 있는 새로운 근무 형태를 말한다. 사실 여행에 대한 로망은 오래전부터 차고 넘쳤으나 취업-역병-가난 쓰리콤보로 인해 조용히 숨만 쉬면서 살아왔다. 그런데 스무 살 불타는 청춘을 매일 반복되는 일상 속에 묵히고 있기엔 눈물 나게 서럽고 아까웠다.


에라 모르겠다, 이러려고 돈 버는 거지! 그냥 가자! 가서 엄청난 깨달음을 얻고 오자. 내 월급의 절반을 가뿐히 넘는 이 돈이 아깝지 않을 만큼 재밌게 다녀오자.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일하면서, 모든 것에 영감을 받아보자. 고민할수록 더 크게 부풀어온 기대감과 함께 제주로 향하는 항공권을 구매했다.



협재? 청춘이다!

2021년 10월 14일, 홀로 제주행 비행기를 탄 날. 나의 큰 덩치와는 비교되는 이코노미 좌석에 내 몸을 욱여넣었다. 여행초보인 것을 티 내듯 미리 다운받아 놓지 못한 음악. 그래도 이어 플러그 삼아 에어팟을 끼고 약 한 시간 동안의 망상을 시작했다. 미스테리한 인물이 나타나는 상상. 나에게 엄청난 디자인적 영감을 주는 공간을 운명적으로 찾는 상상. 평생을 괴롭히던 고민을 단숨에 해결해 줄 깨달음을 얻는 상상. 더 나아가 만약 비행기가 불시착한다면 평영과 배영 중 어떤 영법을 구사할지 고민하다 보니 어느새 안전히 제주 국제공항에 도착했다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공항 게이트를 나온 시간은 대략 오후 여섯 시, 택시를 타고 기사님께 나도 잘 모르는 숙소 위치를 최대한 상세히 설명드렸다. 그리고 '저 피곤하니 대화는 힘듭니다' 눈빛을 장착하고는 차창에 기대 생각에 잠겼다. 흠, 반복되는 일상이 지겨워서 훌쩍 떠난 나, 생각보다 멋있네? 그래, 내가 궁금해하고 바라왔던 것들 분명 이곳에 있을 거야. 절대 놓치지 않도록 두 눈 크게 뜨고 즐기자.



협재에서의 첫 이틀은 여행이었다. 일과 휴가, 그중 휴가를 먼저 제대로 즐겨볼 심산이었다. 미리 협재에 도착해있던 친구들과 함께 온갖 식당과 카페들을 도장깨기 하듯 찾아다녔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협재에서 가장 핫하다는 재즈 바 '싱싱잇'에 가려고 시도했던 우리다. 차도 없이 제주도의 거친 바람을 뚫어가며 도착한 '싱싱잇'은 이미 만석에 웨이팅 한 시간이었다. 거지꼴로 그 핫한 곳을 들어가려 한 우리의 모습이 정말이지 '청춘'이었다. 다시 돌아오는 길에도 굴하지 않고 노래를 부르며 걸어온 것도 굉장히 '청춘'이었다. 조금 힘이 들 때마다 남발했던 말 '청춘'. 아마 우리의 청춘의 조각 몇 개는 아직도 협재에 남아 젊음을 골탕 먹이고 있을 것이다.



행복했던 친구들과의 여행을 마치고, 나는 본격적으로 워케이션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오라! 내 인생의 전환점이여!


워케이션, 이게 맞나?

협재 바다가 잘 보이는 카페에 자리를 잡고 일을 시작했다. 그러다가 점심시간이 되면 근처 맛집을 찾아가 식사를 했고 다시 카페에 돌아와 일을 했다. 시간이 되면 사내 메신저에 퇴근 인사를 남기고 어찌어찌 숙소에 돌아오면 일곱 시였다. 이게 내 하루 루틴이었다.



확실한 건 정말 일이 잘된다. 처음으로 매일 보던 풍경이 아닌 낯선 풍경, 게다가 시원한 바다를 보며 일을 하니까 열정이 과하게 샘솟았고 일에 완전히 몰입하게 되었다. 특히 영감이 중요한 디자이너나 예술가들, 그리고 참신한 아이디어가 필요한 기획자들에게 워케이션을 강력 추천한다. 또 맘 편히 조용한 곳에서 코딩하고 싶은 개발자들에게도 추천한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모든 직장인이 최소 한 번씩은 다녀왔으면 좋겠다.


다만 워케이션 동안 가장 아쉬웠던 점은 바로 이동수단이다. 면허를 딴지 얼마 되지 않아 차를 렌트할 수 없었지만, 버스와 도보로도 충분히 여행할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다. 어렵지는 않았으나 결코 쉽지도 않았다. 협재는 은근히 시골이라 도시로 가려면 버스를 타고 거의 한 시간을 가야 했다. 현실에 순응하고 나는 협재에서만 돌아다니기로 마음먹었다.



워케이션 3일 차, 일을 마치고 숙소에 돌아오자 덜컥 겁이 났다. 이렇게 살다가 집으로 돌아가게 되는 건가? 풍경이 아름다운 거 말곤 집이랑 다를 게 없는 거 같은데, 난 좀 더 대단한 걸 기대했단 말이야. 그리고 워케이션 경비로 꽤 큰돈을 썼는데, 본전은 뽑아야 되지 않나?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은 긴 여행에서 인생의 멘토가 되어줄 인물을 만나기도 하고, 인생의 전환점이 될 깨달음을 얻기도 한다는데, 내가 얻은 거라곤 맘 편히 먹기만 해서 얻은 약간의 지방뿐. 그리고 나에게 말을 건 낯선 사람은 버스 막차 시간을 묻던 어느 커플이 유일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새로운 도전을 준비했다. 이름하여 깨달음의 길. '올레길' 되시겠다.


올레길아 부탁한다!

나름의 성취감을 위해서 스탬프를 찍을 여권도 구매했다. 내가 완주할 올레길은 10코스. 송악산과 알뜨르 비행장이 유명한 코스이다. 시작점에서 스탬프를 찍고 천천히 길을 걷기 시작했다. 평소에 운동을 즐겨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걷는 거 하나는 잘하는 나에게 올레길 10코스는 생각보다 걸을 만했다. 힘들다 싶으면 바다가 나타나 응원해주고, 포기할까 싶으면 맛집이 나타나 나를 배 불려주었다.


중간지점인 송악산에 들어서자 장관이 펼쳐졌다. 마음이 맞는지 전부 같은 곳을 바라보던 억새들과 이름값을 하는 듯 가깝지만 분명 떨어져 있던 형제섬. 줄에 묶이지 않고 자유로이 풀을 뜯던 하얀 말까지. 감탄을 내뱉으며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슬슬 도착지에 다와 가는 것 같았다. 이때 이미 예상한 건데 출발지의 나와 도착지의 나의 모습이 크게 다를 거 같지 않았다. 광활한 풍경을 감상했고, 몸은 조금 더 튼튼해졌으며, 올레길을 완주했다는 자부심이 생겼다는 것 정도? 내가 기대했던 것들은 아무래도 여기엔 없다는 사실을 슬슬 체념해야 했다.


마침내 도착지 스탬프를 찍었다. 드디어 완주했다는 뿌듯함과 왠지 모를 허무함이 나를 채웠다. 나에겐 큰 도전이었지만 이 동네 주민이 보기엔 그저 수많은 올레길 완주자 중 한 명인 거겠지? 과하게 넘치던 자의식이 바닷바람을 맞아 조금은 수그러든 느낌이었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내 몸은 천근만근이었다. 샤워를 마치고 푹신한 침대에 누웠다. 노을이 지는지 빨간 햇살이 방을 채웠다. 올레길을 걸으며 찍은 사진 중 잘 나온 것들을 골라 부모님께 보냈다. 운동을 그렇게 싫어하던 아들이 올레길을 완주했다는 사실에 부모님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기지개를 켜며 나 자신을 놀리듯이 뱉은 말.


"워케이션 망했네~"


하지만 노을이 빼꼼히 훔쳐본 내 얼굴에선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상상 그 이상으로, 망한 워케이션

망함의 기준이 무엇일까, 계획대로 되지 않거나 기대한 것에 미치지 못한 것이 '망함'이라면 이번 협재 워케이션은 대폭망이었다. 나의 멘토가 되어줄 미스테리한 인물도 없었고, 이렇다 할 업무적인 성과도 없었으며,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될만한 깨달음 또한 당연히 없었다. 처음 생각한 것에 비하면 별거 아닌 워케이션이 되어버렸으니, 충분히 '망한 워케이션'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럼 당연히 후회하냐고? 아니! 전혀 그러지 않다. 절대 그럴 수 없다. 망한 협재 워케이션은 내 가치관을 정립해주었다. 단 한 번의 여행으로 내 인생이 드라마틱하게 바뀌길 바란다면 분명 큰 욕심이다. 나는 그저 가끔 협재에서의 친구들과 행복했던 기억, 아름다웠던 풍경, 편안했던 숙소 침대와 박수를 치게 만들던 음식들을 곱씹어 보기로 했다. 작지만 푹신했던 행복을 느껴볼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이 망한 협재 워케이션, 충분히 만족한다.



당신도 떠나보면 좋겠다. 워케이션을 통해서 나 자신의 속도를 찾고, 그에 맞춰 천천히 행복을 느껴보았으면 좋겠다. 다들 빠른 게 좋다고는 하지만, 우리는 말이나 차도 아닌데! 남들의 이야기만 듣다 보면 아쉽게도 출발시간을 놓치고 말 것이다.


나는 이제 다음 워케이션을 계획해보려고 한다. 어디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준비는 되어있다. 이번처럼 초조해하지 않고 낯섦과 새로움을 충분히 음미하며 소소한 행복을 찾을 준비.



일상이 지겨운가. 잠깐이나마 새로운 삶을 살아보고 싶지 않는가. 어느새 떠날 때가 되었다.

비로소 당신의 마음이 향하는 곳의 티켓을 끊고, 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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