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이 득을 보는 직업
어느 모임의 뒤풀이에서였다. 학교 밖 공부 모임이 그렇듯 오래 만났지만 자주는 아니었고 코로나 시국을 겪으면서 더욱 그러했던 사람들과 함께였다. 와인과 안부가 오가는 그 자리는 편하고 수수했다. 요즘 어떻게 지내냐는 의례적인 질문을 번갈아 받았고, 나는 조금 멋쩍어하며 글 쓰며 보낸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똑같이 되물었다.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안 하세요?”
생각해보면 이곳에서만이 아니다. 명절에 만난 먼 친척도, 길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친 지인도 인사 끝에 늘 그렇게 물었다. 아주 말간 얼굴로, “그거 말고 다른 건 안 하시고?” 그들은 모두 내가 소설가라는 사실을 안다.
우리는 의사나 교사에게, 회사에 다니거나 식당을 운영하는 사람에게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안 하냐고 묻지 않는다. 그 일만으로도 시간은 턱없이 부족하고 힘에 부친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부이자 작가로, 그 일 앞에 <전업>을 붙여 따로 부르기도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차치하고라도, 이 두 일을 훌륭히까지는 아니더라도 어쨌든 해내고 있는 내게 왜 ‘다른 그 무엇’을 묻는 것일까.
사람들은 글을 쓰는 일이 몇 시간씩 걸리는 노동이라는 것을 모르는 까닭이다. 적확한 한 문장을 쓰기 위해 얼마나 오랜 시간 구부정한 어깨로 거북이처럼 목을 내밀고 모니터와 씨름하는지를 알지 못한다. 또한, 나는 이것이 거의 결정적 이유라고 생각하는데, 바로 돈이 안 되기 때문이다. 대다수 작가가, 심지어 유명한 작가들조차도 글을 쓰는 것만으로 생계를 해결하기가 힘들다. 그러니 나 같은 변변찮은 작가의 답답한 대답에, 그럼 돈은 무엇으로 버냐는 의미의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글을 써서 버는 수입은 아주 적고, 지인과 친구가 멀어지는 것은 피부로 느낀다. 그렇다면 돈도 안 되고 주변의 충분한 이해도 받지 못하면서까지 소설을 쓰는 이유는 무엇일까. 작가이자 레이먼드 카버의 스승으로 알려진 존 가드너는 이렇게 썼다. 인물이나 장면이 현실로 쳐들어와서 살아 움직이는 것을 바라보는 경험, 높은 단계의 의식 세계로 탈출하는 느낌이 거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창작의 길을 가게 만드는 이유라고 말이다. 그리고 덧붙인다. 비용이 덜 드는 삶을 찾아 익숙한 터전을 떠나고, 흔들리는 자신감과 무명 작가의 설움을 견딘 그 고된 작업으로 이득을 취하는 것은 영혼밖에 없다고.
그 밤, 집으로 돌아와 한참을 소파에 앉아있었다. 깜깜한 거실 구석에 앉아, 이익을 보는 것이 영혼뿐인 이 직업에 대해 오래 생각했다. 바람이 배란다 창문을 거세게 흔들었다. 낡은 창틀이 짐승 같은 소리를 내었다. 다른 계절이 다가오고 있다는 신호였다. 그 소란의 한가운데서 나는 점점 더 고요하고 평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