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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마귀소년 Apr 18. 2022

반복 숙달의 즐거움

나에게서 출발해서 온전히 나에게로 돌아와야 한다


  4월은 옷 입기에 좋음은 물론이요, 운동을 하기에도 썩 좋은 달이다. 새벽이나 밤이나 기온이 10도 전후라서 한기 걱정이 없다. 바로 지난 달까지만 해도 5시에 눈을 뜨는 건 그 자체로 고역이었다. 이부자리를 떨치고 일어나 몇 발자국을 옮겨 난방이 하나도 되지 않은 서재로 들어가는 건 원판을 잔뜩 매단 바벨을 지고 하는 스쿼트보다 몇 갑절이나 힘든 일이었다.


운동을 하면서 가장 어려운 건 체육관에 오는 것입니다.
당신은 방금 그걸 해내셨습니다.
지금부터는 쉬운 걸 해보겠습니다.


  인터넷에서 발견한 어떤 헬스장의 출입문에 부착된 문구를 그대로 옮겨본다. 운동의 요체란, 운동을 하겠다는 의욕을 내는 것, 어쩌면 그것뿐일지도 모르겠다. 안방에서 서재로의 몇 발자국이 없다면 내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일어나지 않음에서 끝나지 않고 필연적으로 잃고 말 것이다. 하루분의 근력 향상 외에도 눈에 보이지 않는 많은 것들을.


  덜 떠진 눈으로 반팔 티셔츠와 컴프레션 레깅스가 달린 바지를 꿰고나서 저항 밴드를 당기는 동안 몸이 적당한 상태로 예열 된다. 잠을 완전히 깰 요량으로 창문을 활짝 열어 바깥 공기를 흠뻑 들이마셨다. 역시 폐부가 시리지 않다. 새벽에 부는 바람이라 해도 봄의 기운이 완연해서 운동하는 동안 흘릴 땀을 적당히 식혀주는 정도로 시원하다.




  시야가 탁 틔자마자 어플리케이션에서 스쿼트의 첫 세트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이제 몰아붙일 차례다! 기구 앞으로 바짝 다가서서 엄지와 엄지 두덩으로 바벨 아래쪽을, 나머지 네 손가락으로 바벨 위쪽을 단단하게 감아쥔다. 빈 바벨 아래로 머리부터 들어가서 반대쪽으로 나온 다음 바벨을 어깨 뒤편에 밀착시키고 다리에 힘을 주어 일어서서, 뒤로 두 발짝 물러선다.  


  워밍업 세트는 이제 맨몸과 마찬가지로 부하가 거의 없다시피 하지만 그럼에도 매우 신중하게 이뤄져야 할 세트다. 몸에게 '이제부터 긴장하라'는 신호를 미리 보내둬야하고 신체 부위별로 컨디션이 어떤 상태인지 점검해야 한다. 귀찮다는 이유로 순서를 건너뛰고 내가 들 수 있는 가장 무거운 무게를 곧장 등에 얹는다면 다리와 허리가 일시에 무너지는 처참한 일이 일어나리라.


  몸에게 귀를 기울이는 마음으로 천천히 앉았다가, 다시 일어선다. 나에게서 출발해서 온전히 나에게로 돌아와야 한다. 창문 바깥의 새소리와 자동차 소리를 잊고 새벽 공기의 냄새를 잊고 가족들의 곤히 잠든 얼굴까지 잊어야 한다. 마음이 바깥에 나가 헤매지 않는 만큼 운동 시간은 단축되고 능률은 올라갈 것이다.


  몇 세트를 거쳐 본 세트로 접어든다. 무게를 등에 얹고 자세를 고르게 잡아 뒤로 물러선다. 지난번 워크아웃에서 다섯 번을 채우지 못하고 아슬아슬하게 실패했던 그 무게다. 숨을 훅 들이마셔 배를 빵빵하게 만든 상태에서 호흡을 멈췄다. 그리고는 짧게 암시를 건다. 잊지마라, 등에 짊어진 것은 나다. 나로부터 출발해서 나로 귀속되는 일이다. 워밍업 세트 때와 같은 자세로 수직선을 그리며 내려간다. 허벅지가 땅과 수평이 될 때까지 고관절을 접었다가 바로 솟구친다. 위에서 짓누르는 부하를 거역하며. 주저앉으려는 내 몸에 저항하며. 앞으로 휘청이려는 나의 중심을 다잡으며.




  새벽녘, 먼 데 샘에서 물을 길어와서 작은 돌 위로 물방울을 하나씩 떨어뜨리는 일을 하는 사람. 낙수 돌멩이에 구멍을 뚫으려는 사람을 생각한다. 처음은, 물방울로 떨어뜨리지 못하고 물줄기를 흘리는 일이 다반사다. 힘들여 보낸 물방울이 곧장 내리지 않고 사선으로 비껴나 땅에 스며드는 일도 있다. 바람이 부는 날에는 물방울이 제멋대로 휘는 통에 한 방울도 돌에 떨어뜨리지 못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물을 길어와 떨어뜨리는 일을 미련스럽게 손에서 놓지 않는 것은, 어떤 식으로든 진전이 있기 때문이다. 단기적으론 진전이라 하기 어렵다. 지난 워크아웃에서 실패한 무게를 이번에도 실패하였으므로. 몸이 몇 배로 커지거나 보기 좋게 갈라지지 않았으므로. 직선을 꿈꾸지만 도는 길로 접어들어 한참이나 헤매는 중인지도 모른다.


  먼 길을 걸은 다음 돌아봤을 때 오직 나만이 알아차릴 작은 나아감이요, 스스로 품어낸 미약한 기척을 내 손으로 끄집어내는 일이며, 내게 마련된 석판에 철필로 바득바득  새기는 일이다. 진전을 염두에 둔 반복과 숙달이 즐거워서 오늘도 일찍 눈을 뜬. , 여기서 깨친 즐거움을 이제 무엇에다 확장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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