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책을 찢고 나온 듯한 근육질, 네온 페이스 페인팅, 상대를 거칠게 몰아붙이는 호전성. 나는 링에서 포효하는 마지막 인디언 전사에 완전히 매료됐다.
1994년 여름 방학의 어느 날이었다. 500원 동전을 들고가서 프로 레슬링 비디오 테이프를 대여해 왔다. WWF 최고의 슈퍼스타 헐크 호건과 파죽지세의 인디언 전사 얼티밋 워리어가 타이틀을 걸고 펼친 메인 이벤트 경기가 녹화된 것이었다. 난 비디오 대여점에서 둘이 손을 맞잡고 힘겨루기를 하는 스틸샷과 유치한 비디오 홍보 문구를 보았을 때부터 껌벅 죽어 있었다.
콘텐츠의 선택에 나의 기호가 반영된 최초의 기억은 아마 그즈음이 아니었나 한다. 90년대 초는 TV에서 한국 만화의 히트작들이 줄줄이 방영될 때였으니 그것들도 당연히 즐겼지만 내용이나 주제 면을 상기해보면, 지금의 나를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고는 생각되지는 않는다.
당해 개봉한 액션 영화들도 기억에 남는다. 스피드나 마스크, 트루 라이즈 등 블록버스터 무비들은 비디오 가게에 들여놓기 무섭게 대여되는 최고의 인기작이었다. 그것들은 우리 가족의 취향을 폭넓게 아우르는 데는 성공했어도, 내 마음을 그리 긴 세월 동안 붙잡아두진 못했다.
링 위에 오른 사내들끼리 힘겨루기를 하는 쇼는 누군가로부터의 중개가 없는 오로지 나만의 취향이었다. 국민학생의 시각으로 경기 내용을 분석한 당시의 일기장을 보면 프로 레슬링이 일반적인 스포츠와는 성격이 다른 오락물이란 것도 대충은 짐작한 듯하다.
자, 헐크 호건과 얼티밋 워리어의 빅 매치가 시작됐다. 누구의 등장이 더 멋있는가? 누구의 근육이 더 거대한가? 누가 더 청중을 휘어잡는 제스처와 멘트를 하는가? 누가 더 위험한 스킬을 구사하는가? 당대의 레슬링 스타들을 모두 동경했지만 내게 둘 중 한 명을 꼽으라면 거칠고 야만적인 워리어가 언제나 우위였다.
얼티밋 워리어의 가장 큰 승리는 토론토 스카이돔의 WrestleMania VI에서 발생했습니다. 67,000명의 광포한 WWE 유니버스 회원들 앞에서 워리어는 WWE 명예의 전당 헌액인 헐크 호건을 꺾고 자신의 첫 번째이자 유일한 WWE 챔피언십에서 우승했습니다. 그날 밤 그는 인터컨티넨탈과 WWE 타이틀을 동시에 보유하는 드문 위업을 달성했습니다. -출처: WWE
비디오에서 두 명의 전사는 혈투를 벌였다. 그리고 워리어는 헐크 호건으로부터 벨트를 받고 새로운 챔피언에 등극했다. 수십 개의 비디오 테이프와 그보다 훨씬 많은 녹화 경기 중 단연 최고였다.
1980년대의 워리어와 헐크 호건, 그리고 시대를 조금 달리하여 1990년대의 걸출한 슈퍼스타였던 더 락과 스톤 콜드는 나를 열렬한 레슬링 사랑에 빠지게 만들었다. 그들은 사랑해 마지않던 드래곤볼이나 터미네이터와는 한참 다른 결이었다. 손오공과 T-800은 애니메이션과 영화계의 불멸하는 아이콘이라 할 수 있지만 비디오가 돌아갈 때에만 그리 느껴졌다.
90년대 레슬링 무대를 주름 잡은 아이콘 스톤콜드 오스틴. 출처: WWE
반면에 레슬러들은 비록 지구의 저 멀리 떨어져 있어도 실재한다는 믿음이 있었다. 그들은 비디오 테이프 플레이어의 불빛이 꺼졌을 때에도 순수한 표상으로서 밝게 빛나고 있었다.
희한한 것은 인간의 신체적 능력이 어디까지인지를 가장 현실적으로 보여주는 분야, 가령 종합격투기나 올림픽 레슬링 경기 같은 건 예나 지금이나 그다지 흥미롭지 않다는 점이다. 전설로 회자되는 명경기들을 편집해 놓은 영상을 봐도 조금 감탄이 나오는 정도다. 아무리 엘리트 체육인이라 해도 화면 속에서 그들이 보여주는 힘의 크기는 레슬링 쇼의 그것에 비하면 좋게 말해 정직하고 솔직하자면 시시하다.
현실을 초월한 힘에 대한 숭상은 비단 나만의 유아기적인 취향은 아닐 것이다. 인간이 향유하는 문화에서 그런 판타지적인 요소를 모두 제한다면 뭐가 얼마나 남을까? 모든 인간 창작물의 근원인 건국 신화부터 이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인간의 육체적 한계를 뛰어넘는 힘에 대한 공포와 갈망은 사피엔스의 공통적인 관념은 아닐까 한다. 내가 조금 그쪽으로 경도된 편임은 인정하지만.
2000년대 초를 기점으로 레슬링의 인기가 차츰 식어갔다. 외양은 나날이 커졌을지라도 엔터테인먼트로서의 본질은 예전에 비해 거의 모든 면에서 별 볼 일 없어졌다. 걸출한 슈퍼스타들이 현역에서 은퇴하고, 각본이 재미 없어지고, 이전 세대를 이을 아이콘들이 등장하지 못하는 동안 나의 관심도 입시나 취직으로 완전히 기울어갔다. 내가 어렸을 때 그들이 건네던 열등감에 대한 위로와 힘에 대한 판타지도, 현실의 무게 앞에서는 일거에 짜부라졌다.
그렇게 한참 잊고 지내다가 얼마 전 유튜브에서 '프로레슬러와 약물'이라는 이름의 동영상을 시청했다. 요는 프로레슬링계에서 활동하던 선수들이 스테로이드의 오남용과 약물 사용으로 이른 나이에 돌연사하거나 심각한 부작용을 겪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제시된 사례만으로도 10건이 훌쩍 넘었고 돌연사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60세를 채 넘기지 못하였다.
무척이나 생소했다. 보디빌더도 아니면서 비정상적으로 거대한 근육에, 또 그런 거구로 붕붕 날아다니고 신체를 구조물에 과격히 부딪치는 경기를 수없이 보면서도 '현실에서 저런 경기를 펼치는 게 자연스러운가?'를 단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었기 때문이었다.
영상은 화려한 허울에 감춰진 추악한 진실을 연달아 폭로하였다. 레슬링 업계는 오로지 쇼의 오락적 재미를 위해 선수들을 과도하게 혹사(끊임없는 운동과 경기, 장거리 이동, 식단 조절, 적은 휴식 등) 시키고, 또 레슬러들은 무대에서 살아남기 위해 스테로이드와 온갖 약물을 몸에 주입하면서 그 일정을 소화한다. 그러다가 어느 날, 펑! 사고가 난다.
왕년의 슈퍼스타들은 아주 운이 좋은 소수를 제외하고 이미 별세했거나 쇠약해져 있다. 나는 한때 그들을 현실에 존재하는 표상으로서 동경하고 우상을 숭배하는 마음까지 지니었으나, 동영상을 보고 나서는 그 우상을 강물에 띄워 멀리 떠나보냈다. 링에서 내려온 그들은 헤라클레스가 아니라 그저 연약한 신체를 가진사람들일뿐이었다.
은퇴한 그들 중 일부는 왕왕 스페셜 매치, 드림 매치라는 이름으로 링으로 소환되기도 한다. 그리고 대체로는 옛날만 못한 신체와 녹슨 경기력으로 팬들 앞에 선다. 등이 작아진 그들을 차마 나는 옛날과 같은 마음으로 응원하지 못한다.
그들이 더 이상 오락거리를 위한 혹사에 내몰리지 않았으면 한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지극히 사소하고 평안한 일상을 보내다가길에서 그를 알아보는 나이 먹은 팬들에게멋들어진 제스처를 보내거나, 아니면 완전히 새로운 익명의 한 사람으로서 천수를 누리기를 바란다. RIP WARRI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