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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마귀소년 Feb 21. 2022

새 술은 새 부대에

낡은 가죽 부대를 버리지 못하는 미련함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마9:17)


    '52주의 기록'이라는 글을 쓸 때까지만 해도 운동 수첩에는 적당한 여분 매수가 남았었는데 지난 주말에 살펴보니 마지막 한 매가 부쩍 가까워져 있었다. 기록지의 갱신이 필요한 시기가 닥쳤다.


  문구점으로 갈까 대충 집에 있는 것을 재활용할까 궁리하던 차에,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는 문장이 떠올랐다. 출처가 삼국지였나? 아니면 로마인 이야기? 포털 창에 검색했다가 의외의 결과에 놀란다.


   포도주와 가죽 부대는 인용한 대목 외에도 성경 곳곳에서 맥락에 따라 다른 의미로 쓰이는 단어였다. 각주 없이 세부에 이르는 내용까지 이해할 순 없었으나 어찌 됐든 와인이 내용이요, 부대가 형식이라는 관계만큼은 확실하다. 새로운 내용에는 그에 걸맞는 새 형식이 필요하다는 명제는 나에게도 적용할 수 있을 터였다. 


  때마침 수첩을 다 썼으나 그 외에도 형식을 갈아치울 좋은 명분이 있었다. 2021년의 연간 운동 목표였던 '초급자 수준 벗어나기'달성한 일이었다. 파워리프팅에서는 벤치프레스, 스쿼트, 데드리프트를 한 번씩 들 수 있는 무게의 합계로 그 수준을 가늠하는데, 중급자 수준(3가지 종목 중량의 합 400kg)까지는 특별한 신체의 문제가 없이 건강한 남자라면 대체로 도달 가능한 것으로 본다. 2월 첫째 주에 400kg를 넘김으로써 나는 중급자의 초입에 이제 막 들어섰다.


  작년 11월부터 올해 11월까지는 경력으로 3년차에 해당하며, 연간 목표는 완숙한 중급자가 되어 고급자의 문턱(3가지 종목의 합 500kg)을 넘보는 것이다. 앞으로 갈 길이 지나온 길의 몇 갑절로 멀고 넘어야 할 봉우리는 구름에 가리어 보이지도 않는다. 해가 넘고 나이를 더 먹었다고 해서 기가 막힌 계획은 없다. 지금까지 그랬듯 일단 나아가고 볼 일이다. 멈추지 않고 밀어붙이다 보면 어떻게든 될 거라고 믿는다.




  새로운 52주분의 운동 일지를 담을 새 기록지는 혁신적으로 달라졌으면 했다. 무엇이든 한번 정한 것을 쉽게 바꾸려들지 않는 성정으로 수첩을 한 권 채웠으나, 요새 들어서는 외양뿐 아니라 그 속에 이르기까지 완연히 낡은 부대가 되었다는 아쉬움을 지울 수가 없다.


1. 운동 종목별 중량이 향상되는 추이를 한눈에 파악할 수 없음
2. 본 세트의 중량이 향상됨에 따라 달라지는 워밍업 세트의 중량을 매번 계산해내야 한다는 번거로움
3. 어떤 종목을 얼마나 잘하거나 못하고 있는 것인지 타인과 비교하는 일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함
4. 휴대전화를 타이머로만 활용하고 있어 비효율적임


  현대 문명의 집약체인 전화기는 이 모든 아쉬움일소할 능력을 갖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래서 내린 방침은 적당한 어플리케이션을 찾아 활용하자는 것이었다. 구글 앱 스토어에서 '파워리프팅 기록'이라는 검색어를 넣었더니 즉시 수백 개에 이르는 운동 기록 앱이 높은 평점 순으로 정렬되어 나타났다. 목적에 맞는 앱을 찾을 때 으레 하던 습관 대로 그 중에서 상위에 노출된 앱의 다운로드 횟수, 스크린샷, 사용자의 리뷰를 빠르게 훑어보았다. UX와 UI가 나의 다운로드 목적에 적합할지 대강 파악한 뒤에 5개를 추려 다운 받았다.


  5개를 비교해 본 끝에 가장 직관적이고 가장 광고에서 자유로우며 가장 동기를 확실하게 부여해줄 것 같아보이는 앱 하나만을 남기고 나머지를 삭제했다.


앱 FLEEK의 홈 화면. 달력 형식이라 주별/월별 운동 주기를 확인하기 편하다.


  나는 새로운 가죽 부대를 찾았다는 환희에 차서 1월 첫째 주부터 2월 셋째 주에 이르는 싱싱한 운동 기록을 즉시 옮겨 담았다. 한 방울도 밖으로 흐르지 않고 새 부대로 빨려들어간 새 포도주는 즉시 숙성을 시작했다.      


운동을 마치고 나면 뜨는 브리핑 화면1. 어떤 프로그램을 수행했고 어떤 부위를 운동했는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브리핑 화면2. 워밍업 세트부터 본 세트의 무게, 세트별 운동 횟수, 한번 들 수 있는 최고 무게, 상위누적백분위에 이르는 알짜 정보들이 제공된다.



   

  한 차례 정리가 끝난 새 부대를 낡은 부대 옆에 나란히 놓고는 살펴본다. 어플은 거의 모든 면에서 우위를 점한다. 처분을 기다리는 양 얌전히 누운 수첩을 지그시 내려다보다가, 책상 서랍에 넣고 소리가 나도록 닫았다. 일년이 넘도록 손에서 떨어질 줄 모르던 그것이 한참이나 멀어졌다. 이로써 낡은 것과는 완전히 결별인가? 아니. 왜인지 당분간 그러지 못할 것이란 예감이 나를 강하게 사로잡는다. 언젠가는 깨끗이 돌아설지라도 아직은 아니다.


  누가 부르는 것도 아니건만 시선이 자꾸 책꽂이로 향한다. 눈길을 모았다가, 이내 거두었다가, 엉뚱한 곳으로 돌리기를 여러 차례. 끝끝내는 책꽂이 하단에 손을 뻗쳐서 사 년쯤 먼지를 쓰고 있던 스프링 노트를 빼냈다. 그것을 펼쳤다. 기억도 나지 않는 앞 부분을 북 찢어냈다. 수첩에서 앱으로 막 이관이 끝난 데이터를, 다시 노트에 옮겨쓰는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꾹꾹 시간을 들여 가장 최신의 기록까지 다 옮긴 것을 확인하고 펜 끝을 집어넣으니 비로소 직성이 풀린다.


  기껏 새 부대를 찾아 와인까지 담아놓고는 낡은 부대를 즉시에 버리지 못하는 이 성미를 무엇이라 바꾸어 쓰면 좋을까. 그저 미련함. 비효율의 극치. 개선이 없는 답습. 이상한 강박. 구태로의 전락. 일보 전진 후 이보 후퇴... 아날로그와 디지털 세상 중 어느 쪽에도 완벽하게 속하지 못하는 태생적 한계다.


  아니면 두 세상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도록 한 하이브리드신神의 축복이자, 한 세상이 완전히 결딴나도 살아남을 구석이 있다는 희망으로 볼 여지도 있다. 내친 김에 저울의 왼팔과 오른팔에 각각 미련함과 희망올려놓았다. 손을 떼기가 무섭게 접시는 현저히 왼쪽으기울었다. 


  그래, 달아보지 않아도 내 미련함의 증거는 차고 넘친다. 전자책으로 소장한 소설을 종이책으로도 사려고 서점을 기웃거리는 일, 핸드폰에 딸린 전자펜을 내버려두고 책꽂이에서 메모지와 볼펜을 찾아 메모하는 일, 브런치 고를 노트북으로 쓰면서도 필기감이 좋은 볼펜과 대학 노트를 탐색하는 일, 그렇게 사들인 볼펜과 노트로 글감을 하나 하나 적어보고 글씨가 마음에 들지 않아 몇번이고 고쳐쓰는 것과 같은 일, 일,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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