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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나두울 Mar 07. 2022

<감정의 혼란>

슈테판 츠바이크

 오랜만에 여유가 생겨 책장 앞을 거닐다가, 예쁜 색감의 양장본 책에 적힌 한 작가의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친구의 추천으로, 그리고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엔딩 크레딧을 통해 '슈테판 츠바이크'의 이름과 그가 예술계에 남긴 커다란 족적을 알게 되었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책 <광기와 우연의 역사>, <어제의 세계>는 언젠가 꼭 읽을 책 목록으로 남겨두고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책을 뽑아들었고, 우연한 계기로 <감정의 혼란>이라는 소설을 그의 책 중 첫 번째로 읽게 되었다.


 소설은 화자가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내용에서 시작한다. 엄격한 교육자였던 아버지에 대한 반항심으로, 방탕하고 충동적인 삶을 살아가던 롤란트는 우연한 계기로 듣게 된 한 교수의 열정적인 수업을 통해 미적 체험의 황홀한 쾌감에 사로잡힌다. 강렬한 지적 체험으로 인해 촉발된 교수에 대한 경외감은 마치 운명처럼 롤란트의 삶을 지배한다. 교수의 관심을 얻기 위해 교수와 같은 건물로 이사하여 그와 일상을 함께하며, 교수의 인정을 얻기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고 교수의 지식을 세상에 내보이는 작업에 열중한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교수는 돌연 사라지기도 하고, 롤란트를 밀어내기도 하며 젊은이의 감정을 혼란스럽게 한다. 혼란스러운 감정의 끊임없는 묘사와, 인물 간 관계로부터 오는 긴장감은 마치 책의 문장들이 평면의 세계를 벗어나 머릿속에 들어온 것처럼 나의 감정까지 헤집어놓았다.


 아직 정체성이 제대로 확립되지 않은 젊은 날의 혼란스러운 감정들을 가감 없이 표현한다는 점에서 이 책은 어쩌면 성장 소설의 일종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1인칭 시점으로 화자가 느낀 모든 감정을 감각적으로 서술하는 소설의 전달 방식은 얼핏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을 생각나게 했다. 강렬한 카리스마로 화자의 열망의 대상이 되었으나, 지속적으로 화자에게 상처를 주고 밀어내면서 화자를 한계로 밀어붙이는 교수의 모습에서는 영화 <위플래쉬>가 연상되기도 했다.


자네를 사랑하고 있네.

책 말미에 나온 한 문장이 책에 대한 모든 생각을 뒤바꿔놓았다.

 감정의 혼란은 강렬한 지적 충격을 체험한 성장기 젊은이만이 겪고 있는 일이 아니었다. 동성애라는 내면적 충동과 교육자로서 갖고 있던 사회적 지위의 부조화로 인한 교수의 혼란. 존경심을 내비치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화자에 대한 사랑과, 그를 밀어내야 한다는 이성의 목소리로부터 오는 교수의 혼란. 남편의 성 정체성을 인지하고 매력적인 화자를 남편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노력하는 교수의 아내의 혼란까지. 앞서 화자를 혼란스럽게 했던 모든 감정의 퍼즐이 단번에 맞춰지는 대목이었다. 


 세상이 가장 혼란스럽던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사이의 시기에 가장 혼란스럽고 위태로운 사랑의 형태를 소재로 소설을 쓴 슈테판 츠바이크의 대담함에 감탄하던 와중에 그가 이렇게 극적인 소재를 사용한 이유에 대한 몇 가지 생각이 스쳤다.


 사랑은 여러 형태로 나타난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동성애'라는 주제를 설정하였지만, 사실 모든 형태의 사랑은 모든 사람에게 '감정의 혼란'을 야기한다. 교수가 진실을 밝혔을 때 그가 '동성애'라는 이유만으로 나나 화자에게 더 큰 혼란이 가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껏 갈피를 잡을 수 없었던 그의 행동들이 굉장한 설득력을 갖게 되었다. 극적인 소재와 미학적 묘사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이 모두에게 일반적으로 이해되고 고전의 반열에 오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결국 모든 사랑의 본질이 같기 때문이지 않을까. 가장 원초적이고 본능적인 인간의 감정을 이토록 공들여서 묘사한 이유도 바로 그것이 아닐까. 이 소설은 그저 일반적인 사랑에 관한 소설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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