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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ria Nov 26. 2022

2. 명식

공무원에게 승진은 중요한 문제다. 왜냐하면 30년 가까이 이어지는 공직생활의 유일한 변화이기 때문이다. 아 물론, 호봉제에 따라 월급도 변한다. 하지만 직급의 상승과 호봉의 상승은 전혀 다른 문제다. 우리가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는 것에, 또는 누군가보다 한 살 더 나이를 먹은 것에 은밀한 승리감을 느끼는 것은 아니지 않나. 이것은 본질적인 차이다.

나에게도 이 은밀한 승리감을 느낄 시기가 다가왔다. 아니, 동기들이 한 차례 승진을 마쳤으니, 그다지 은밀하진 않겠지만, 나로서는 그간 보내온 시간들에 대한 ‘정당한 승리감’은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극주가 연락했을 때, 나는 근무성적 명부를 확인하고 한껏 벙긋거리는 중이었다. 올라간 입꼬리도 정리할 겸 기꺼이 1층 민원실로 뛰어 내려갔다. 서로 소 닭 보듯 해온 조카가 웬일인가 싶었지만, 뭐 어떠랴? 이렇게나 기분이 좋은데!

       

큰누나가 극주를 낳은 것은 내가 15살 때였다. 아기가 태어나서, 우리 가족으로 새롭게 합류하게 된 뉴페이스의 꼬물거림을 지켜보는 것은 경이로운 일이다. 강보에 싸인 녀석의 얼굴은 조심스레 빚어놓은 조그만 찰떡같아서 바라만 보아도 어금니 안쪽이 말랑해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당시에 나는 그런 보드라운 감정은 꿀떡 삼켜버리고 주로 거울 앞에서 여드름 짜기에 전념했는데, 북한군도 두려워한다는 중2병에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 다섯 명의 누나들은 어쩔 때는 매년, 때로는 일 년에 두 명씩도 조카들을 꾸준히 낳았고, 온 집안에 진동하는 녀석들의 기저귀 똥냄새는 첫째 조카가 태어났을 때의 경이로운 기억을 희석시키기에 충분했다.

이제 극주는 스무 살이고, 동충하초처럼 버스럭거리는 염색 곱슬머리에 이마에는 아직 붉은 여드름 자국이, 턱에는 대충 깎아놓은 거뭇한 수염이 박혀있다. 내 첫 조카는 더 이상 병아리처럼 귀엽지도, 그렇다고 수탉처럼 늠름하지도 않다. 그저 중닭처럼 못생겼을 뿐이다.

     

커다란 트렁크 가방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사람 구실 못한다는 큰누나의 푸념을 가끔 듣긴 했는데, 이 자식이 설마...? 극주는 내 짐작을 무마시키려 서둘러 멘트를 쳤다.

“아아니, 친구가 며칠 놀다 가라고 하도 그래서... 이 근처예요.”

서울에, 그것도 이 집값 비싼 동네에 니 친구가 산다고?

“아... 그래?”

그래서? 뭐? 눈빛으로 물어본다. 최대한 점잖고 선량한 동공으로. 녀석의 중닭 부리 같은 입술이 우물쭈물한다.

“무슨... 하나뿐인 삼촌이... 오랜만에 조카가 찾아왔으면 요즘 뭐 고민은 없냐 하고 응? 맥주도 한잔 사주고.. 뭐 그런 따사로움이 있어야지. 치.”

어쭈, 치? 너에겐 하나뿐인 삼촌이겠지만 나에겐 너 같은 조카가 여덟 명이다. 설날 세뱃돈으로 두어 장씩 나눠주고 나면 마음이 후덜덜하다고. 따사로움은 무슨.

“음... 어쩌지. 삼촌 오늘 회식이 있는데.”

지갑에서 오만 원짜리 한 장을 꺼내다가 3초간 고민했다. 자연스러운 연결 동작으로 한 장을 더 꺼낸다.

“친구하고 맛있는 거 사 먹어. 갈 때 차비도 하고.”

돈을 야무지게 챙겨 넣으면서도 실망한 듯 고개를 주억거리는 모습이 왠지 쎄하다.

“너... 진짜 뭐 고민 있냐?”     


그런 질문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살면서 한 번도 고민을 나눈 적이 없는 사이라면 더욱, 고민을 나눠 받을 마음이 나에게 없다면 더더욱.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활짝 핀 얼굴을 치켜든 극주는 고민과 고백, 짐작과 질의, 애환과 애원을 마구 뒤섞어 정신없이 쏟아냈다.

극주는 나하고 살고 싶다고 했다. 자기도 음악을 할 거라고, 서울에서 오디션도 보고 버스킹도 할 거라고 했다. 나는 음악과는 전혀 거리가 먼 사람인데 왜 나에게 동질감을 느끼는지 모를 일이며, 서울시 공무원만 아니었으면 이 팍팍한 도시를 진작에 떠났을 거라고 했다. 극주는 어릴 때 삼촌이 기타를 쳐 준 기억이 있다며 무언가 더 말하려 우물쭈물했다. 이 녀석이 머리라도 다쳤나. 갑자기 왜 옛날 기억이 떠오르지? 등을 떠밀어서 돌려보내고 큰 누나에게 전화를 했다. 그제야 오늘이 큰누나가 이사하는 날인 것을 알았다. 엄마가 이삿짐을 싸는 동안 아들은 가출 짐을 싼 것이다. 이런 한심한 놈을 보았나.     


지금 그 한심한 놈이 나를 더없이 한심한 눈으로 보고 있다. 어쩌다 기타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냐는 듯, 엉망으로 깨진 기타와 나를 번갈아 보고 있다. 나는 심문라도 받는 듯 벌벌 떨며 입으로는 계속 취, 취, 취...     


취미...? 아니다. 분명 취미는 아니다. 워라밸, 방구석 자아실현... 그런 안일한 표현도 쓸 수 없다. 나에게 기타는... 통증이다, 그녀가 말했듯. 원하고 또 원해서 가슴이 까맣게 타들어가는 고통의 상징이다. 그리고 그녀는 지금 내 손 안에서, 십 년 전 그날처럼 까맣게 웃으며 유튜브 동영상 속에서 노래하고 있다. 우리가 함께 찍은 그저 그런 동영상 아래로 수천 개의 댓글이 열광하고 있다. 문득, 은밀한 패배감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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