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프로 Oct 22. 2023

여행이야기 6. 공항

# 히드로 다이어리와 함께

만약 화성인을 데리고 우리 문명을 관통하는 다양한 주제들을 깔끔하게 포착된 단 하나의 장소에 데려가야  한다면, 우리가 당연히 가야 할 곳은 공항의 출발과 도착 라운지밖에 없을 것이다.
-알랭드 보통, "공항에서 일주일"을 중에서-


늘 여행을 꿈꾼다.


어디를 갈까?


여행지를 선택할 땐, 예기치 않은 상황과 계기가 최종 목적지 결정에 영향을 미치지만 어디든 좋다.

캐리어에 짐을 싸고, 환전을 한다. 공항으로 간다.


공항이라는 단어 자체가 미지의 뭔가에 대한 흥분을 준다. 특히 인천공항은 설렘이고, 외국의 공항은 아쉬움이다.


비행기 이륙시간을 역산해 공항 도착시간을 계획한다. 공항에 가는 것부터 고민이다. 대중교통을 이용할지, 자가용을 이용할지, 미리 올라가 공항 근처에서 숙박을 할지.


그렇게 공항에 도착하면, 고생스러움에 대한 불만이 안도감으로 바뀌고, 터미널 안내스크린을 보는 순간 스파클링 와인처럼 가슴이 톡톡 튀기 시작한다.


(터미널 안내스크린) 우리가 전혀 모르는 언어를 사용하는 나라, 우리가 누구인지 아무도 모르는 나라로 떠나는 일이 얼마나 쉬운지 보여주기 때문이다. 목적지의 세부정보가 없다는 사실 때문에  오히려 초점이 맞지 않은 노스탤지어와 갈망의 이미지들이 흔들리며 떠오르기 시작한다.


이 문단에 격하게 공감한다. 진짜 노스탤지어와 갈망의 이미지들이 흔들리며 떠오르기 시작하니까.


안내스크린을 확인하고, 수하물을 부친다. 이 필수불가결한 것들은 여행지에서 인간으로서 존엄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지만, 최대한 빨리 현실의 무게를 덜어내고, 흥분을 유지하고 싶다.


기내반입물품과 아닌 것들에 대한 안내가 수없이 이어지고, 인당 1개 캐리어 23킬로를 맞춰야 추가요금을 내지 않지만, 그런 것들은 이미 손이 기억하기에 관심밖이다.


하지만 수하물을 부친 후, 다음 단계인 출국심사를 위한 게이트로 들어가는 순간 안내문이 저절로 되새겨진다. (뭐... 빠뜨린 건 없겠지?) 그 순간 우리 모두는 항공기 폭파나 항공기 납치의 잠재적 용의자가 되어, 허리벨트까지 풀어내고 샅샅이 스캔된다. 혐의 가능성 없음이 확인되는 순간, 보안구역을 통과한 나와 나의 가방이 합체된다.


자국민과 외국인을 구분하는 심사대에서 다시 한번 여권과 지문, 그리고 얼굴을 스캔당해야만이 출국장 마지막 문을 열 수 있다. 아마 자신의 모든 결백이 확인된 쾌감 같은 것을 느낄 수도 있다.


비행기를 탈 게이트로 가기 위해선 온갖 명품브랜드가 가득한 쇼핑공간을 지나야 만 한다. 한 때 이 공간에 오기 위해, 여행을 가고 싶었을 때도 있었다. 눈으로만 봐도 행복할 수 있었던 그런 시간. 지금은 무덤덤하게 스쳐간다. 게이트로 고고.


28번 게이트 앞. 내가 탈 비행기 이륙준비가 바쁘다. 통로가 붙여지고, 승무원들의 움직임이 빨라진다. 이제 출국공항에서 마지막 순간이다. 티켓을 게이트 앞에서 확인하고, 비행기 안으로, 거대한 물체에 삼켜지듯 자연스레 흘러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


여행을 떠나기 전, 아들 녀석이 농담 삼아 말했다. 혹시 비행기 사고로 두 분 다 돌아가실 수도 있는 것 아니냐고, 재산목록을 자기에게 알려주시고 가야 는 것 아니겠냐고. 풋.


사실, 비행기를 탈 때마다 그런 생각을 하기된다. 이 비행이 나의 마지막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실제 비행기 사고발생률은 굉장히 낮다. 그 사고강도가 너무나 크기에 인류의 모든 지력이 결합된 최첨단 이동수단이 비행기다. 오죽했으면 알랭드 보통은 외계인에게 우리 문명을 관통하는 장소로 공항을 보여줘야 한다고 했을까?


그럼에도 만 피트 고도에 이르기까지 굉음과 진동을 내며 솟아오르는 비행기에서, 죽음의 공포를 경험한다. 이상하게도 착륙할 때는 죽음의 공포보다 사고정도의 낮은 불안감이 들뿐, 이륙할 때의 공포는 없다.


아들의 농담에 걱정 말라고, 살아 돌아오겠다고 했으나... 내심 아이들이 걱정되었다. ㅎㅎ.


비행기를 타는 것은 우리 자신의 해체를 앞둔 마지막 순간을 어떻게 가장 잘 보내느냐  하는 문제를 제기하곤 한다.

이 감정이 나만의 것은 아니었나 보다. 보통씨도 같은 마음을 글로 남겨두었다.


그렇게 다시, 여행지의 공항에 도착하면 입국심사를 받고 짐을 찾는다. 외국의 공항에서 수월한 입국심사를 위해서는 잘 보이고 싶은 비굴한 미소와 천연덕스런 눈망울로 읍소하여야 한다. ㅎㅎ 


무난히 입국심사를 마치고 나면, 거추장스럽지만 필수불가결한 캐리어를 다시 만나게 된다. 특히 수하물 컨베이어 벨트가 돌아가기 시작하면, 먹이를 노리는 맹수의 눈으로 수하물들을 쳐다본다. 내 수하물이 보이는 순간 즉시 낚아채고 안도의 한숨을 쉰다. 수하물이 도착하지 않거나 분실될 경우, 혹시 다른 공항으로 날아가버린 경우, 소중한 여행의 며칠을 버려야 할지도 모르니까.


마지막, 입국장 출구 게이트가 열리는 순간 레드카펫을 건너는 배우처럼, 캐리어를 우아하게 밀면서 새로운 미지의 세계로 들어간다.


공항은 내게 천국의 문과 같은 것인지 모른다. 천국이 아닐지라도, 미지의 세계로 떠날 때 반드시 열고 지나야 하는 문. 모르기 때문에 설레고, 긴장되고, 행복한 그런 공간.


그런 그곳에서 영구적으로 일하고 계신 분들은... 안 됐다. ㅋㅋ 


내가 여행을 해야 하는 이유를 보통씨의 글로 대신한다. 그러하기에 난, 공항으로 다시 돌아가 그 교훈들을 배워야만 한다.


우리는 모든 것을 잊는다.

우리는 점차 행복을 이곳이 아닌 다른 곳과 동일시하는 일로 돌아간다.

우리는 짐을 싸고  희망을 품고 비명을 지르고 싶은 욕구를 회복한다

곧 다시 돌아가  공항의 중요한 교훈들을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만 하는 것이다.

-알랭드 보통, 공항에서 일주일을 중에서-


슬로베니아 블레드 호수에서
작가의 이전글 여행이야기 5. 언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