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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현 Sep 13. 2024

설거지와 호흡 수련

숨을 쉬자. 천천히, 길게...

“네 글에서 슬픔이 묻어나.” 아침에 받은 한 통의 전화.

"내 글에서 슬픔이 느껴진다고? 대체 어디에서?" 나는 되물었다. 그러자 그 친구는 "글 그 너머에서.. 너 혹시 무슨 일이 있니?" 하고 내게 말했다.

한국에 다녀와 다시 일상을 살며, '참 잘 다녀왔어. 즐거운 여행이었어.' 하며 스스로에게 이야기하던 중이었다.

그러다 무슨 이유에서였는지 한동안 숨이 잘 안 쉬어진다는 느낌이 들었다. '여기가 너무 뜨거운 나라라서 그럴 거야.' 아니면 '아이들 일정에 맞추느라 숨 가빠서 그럴 거야.' 하며 하루하루를 지냈다. 그러다 어느 날은 숨이 턱 막혀 밥 숟가락을 놓게 되고, 또 어떤 날은 가슴 정중앙 한 곳이 저릿하게 아파왔다.

처음 겪어보는 일이었다. 겁이 나기보다 숨이 안 쉬어지는 이유는 뭘까? 하는 의문부터 들었다.


매일 설거지를 한다.

설거지 자리를 이제는 '설거지 수련'자리라고 부르고 싶다. 그릇을 닦으며 호흡을 하고 또 머릿속을 가득 채운 생각들도 하나씩 씻는다. 그러고 보면 설거지 수련을 한지는 꽤 오래되었다. 매일 밥은 먹고살아야 하니 설거지를 안 하는 날은 거의 없다고 보면 되겠지.

지난날을 돌이켜보면 설거지는 그저 집안일 중하나라 여겼고, 빠르게 해치워야 하는 임무였다. 몇 년 전 친구가 식기세척기를 사라고 할 때까지만 해도 설거지는 그저 나에게 하나의 일거리, 그것도 유독하기 싫고, 놔두면 누군가가 해줄 것만 같은 골칫거리였다.

하지만 식기세척기를 사지는 못했고  나는 매일 싱크대 앞에서 한 시간은 기본으로 서있었다.  누군가가 해주지 않는 온전한 내 몫의 일. 설거지는 '내 일'이었던 것이다.


어제도, 오늘 아침에도 설거지를 했다.

오늘 아침 받은 그 전화. 내 글에서 슬픔이 느껴진다던 그 친구에게 요즘 내 상황을 조금 이야기했다. 아주 조금...

요즘은 누가 물어오지 않는 이상 내 이야기를 잘하지 않는 편이다. 사실 사람들은 타인의 일상이나 슬픔, 행복 등에 그리 큰 관심이 없는 듯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SNS로 타인의 일상을 엿보기는 해도 그것이 나의 삶과는 크게 연관이 없다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

여하튼 오늘 친구에게 나의 ‘숨’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는 내 주변 친구들이 겪고 있는 아픔에 조금 공감할 수 있었다고도 이야기했다. 마음의 힘듦에 우울증이나 공황장애라는 이름표를 붙여 그 병명에 맞는 약을 받아먹고 있는 친구들이 내 주변에 적지 않다. 마음의 병에 맞추어 먹는 약이라니... 그 친구들에게 조금만 여유가 있다면 함께 지내며 제대로 숨 쉬어보자고 권하고 싶다.


살아있다는 증거인 숨, '호흡'이라 부르는 이것을 잘 다루어야 하겠다. 사람은 죽을 때 숨을 내쉬며 죽는다. 숨을 들이쉬며 죽는 사람은 없다는 뜻이다.

들이마시고 내 쉬는 호흡을 길게 해 본다. 더 천천히 내쉰다.

며칠 째 웃짜이 호흡과 나디쇼다나 호흡을 수련 중이다. 그리고 며칠 전에는 루브르에 갔다. 렘브람트의 그림 앞에 서서 깊은 호흡을 했다. 빛과 어둠을 표현한 그의 그림 앞에서 밝은 빛을 보며 들이마시고 어둠을 향해 날숨을 쉬었다. 누군가가 내 쉰 숨을 나는 들숨으로 맞이한다. 오래전 석가모니가, 예수가 내 쉰 날숨은 지금 내게 들숨이 된다. 그렇게 숨은 오래도록 남아 공기 중에 맴돌다 누군가에게 스며든다.

렘브란트의 그림 <명상하는 철학자> _루브르 아부다비 소장


내 글에서 슬픔을 느꼈다는 친구도 숨을 쉬고 있겠지. 멀리 우주에서 보는 지구의 한 점 같은 존재들은 자기의 몫을 다하며 오늘도 숨 쉬고 살아가고 있을 거다. 유난히 삶이 참 무겁다고 느낀 한 주였다. 설거지하며 씻어낸 감정들의 찌꺼기가 아직도 내 폐부의 어딘가 남아 있다보다. 긴 호흡으로 내보내야 할 찌꺼기들. 천천히, 조금씩 버려야 할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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