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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현 Nov 08. 2024

한국 여행기(4)

<바닐라 집> 이야기



"이리오너라~!" 대문을 힘차게 열고 들어가며 내가 내 뱉은 첫마디이다.

집 문 방충망 사이로 친구의 얼굴이 보였다. 일 년 만에 경주로 돌아와 처음 들른 바닐라집.

역시나 3초 이상 눈빛을 마주치면 안 된다. 3초가 넘어가면 눈시울이 붉어지는 친구가 사는 집에 간 날.

뜨거운 여름날 다시 만난 우리들은 벅찬 가슴으로 인사를 나누었다. 다시 경주의 여름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건 어쩌면 바닐라집과 그 집에 사는 가족들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너른 잔디마당을 앞에 둔 바닐라색의 집. 거기에 친구네 네 식구가 살고 있다.

아이들과 나는 3주가량 2층에 머물기로 했다. 여행 동안 내게 족쇄 같던 커다란 캐리어 가방을 2층에 올려두고 짐을 풀고, 마음도 편하게 내려놓을 만큼 익숙하고 편안한 집. 아무렇지 않게 아이들과 나는 경주의 일상으로 스며들었다.

매일 아침 부스스하게 일어나 1층으로 내려오면 부지런한 친구 부부가 커다란 테이블에 앉아 마실 차를 준비하고 있었다. 보이차, 때론 커피. 매일 혼자 차를 마시던 내게 아침에 이야기 나눌 누군가가 눈앞에 앉아있다는 사실만으로 기다려지는 시간이었다. 각자 바쁜 낮시간을 보내다가도 저녁이면 모여 아이들 밥을 함께 챙기기도 했다. 그 또한 내가 혼자 하던 일이었는데 서로 힘을 보태 밥을 차리고 함께 치우며 왠지 모를 힘 같은 게 생기기도 했다. 네 딸, 내 딸의 경계 없이 씻기고 먹이고 재워가며 그야말로 늘 하던 공동육아를 다시 하는 기분이었다.

하루 종일 뛰어놀던 아이들을 재우고는 친구 부부와 함께 테이블에 앉아 오랜 시간 진득하게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와인 한 병을 놓고 울다가 웃다가 그렇게 하루하루 8월의 날들이 지나갔다.

동네잔치. 공연장이 된 바닐라집.

 

지난날을 돌이켜보았다. 바닐라집은 여러 가지를 함께하는 공유공간 같은 역할을 하기도 했다.

자신의 집을 오픈하여 이웃들과 함께 먹고 이야기 나누는 자리를 만드는 두 부부의 마음. 그 마음이 쌓이고 쌓여 신뢰라는 이름의 관계로 가고 있었다.

봄이면 동네 논길에 모여 쑥을 뜯고, 함께 밥을 지어먹고, 마당에선 아이들이 뛰놀고, 다 함께 모여 김장도 같이 하고, 음악회라는 이름으로 동네잔치를 열기도 했다. 때로는 회의 장소가 되기도 하고 또 가끔은 장구치고 피아노 치며 배움의 자리 역할을 했던 바닐라집.

내 것을 , 내 공간을 타인에게 내어준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나는 당신에게 마음을 활짝 열고 있다.'는 표현은 아닐까?

내 기억 속 바닐라집은 왕년에 잘 나가는 공유공간이었다.

뷰가 끝내주는 강의실이 되기도 했던 바닐라집.
함께 담는 김치. 수다 떠는 중에 침도 튀어 들어갔을 맛난 김치. 함께 하면 뭐든 신난다.


8월 어느 날 밤. 유성이 비처럼 쏟아질 거라고 했던 밤을 기억한다.

친구와 나는 바닐라집 마당에 자리를 깔고 누워 물끄러미 하늘을 보았다. 비처럼 쏟아진다 했던 유성은 구경하기 힘들었지만 우리는 앞다투어 구구절절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를 이어가느라 정신이 없었다. 함께 한 지난날을 이야기하고 앞으로의 날들도 이야기 나누는 긴긴밤이었다.

한껏 센티해진 친구와 나. 그런 우리 곁에 둘째 딸들은 웃통을 벗고 춤을 추었다. 아이들은 순간만 산다고 하더니 두 아이를 보며 우리들도 까르르 웃어댔다.


3주 동안 바닐라집에 머물면서 지난 1월을 떠올렸다.

올해 초. 1월. 바닐라집 식구들은 아부다비 나의 집에서 3주를 지냈다. 멀리까지 와준 친구 가족들이 고마워 무어라도 해주고 싶었지만 정작 우리는 늘 그렇듯 별다를 것 없는 일상. 아침 일찍 함께 차를 마시고, 같이 밥을 먹고, 저녁이면 테이블에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일상을 이어갔다.

이번 여름 경주에서의  3주가 내게 특별하긴 했지만 또 돌이켜보면 바닐라집 식구의 일상에 녹아든 시간이었듯 친구네 식구들도 나의 아부다비 일상에 들어와 같은 루틴의 하루하루를 쌓아갔다. 서로가 머물렀던 그곳에서  3주간 함께 살기의 시간.  가족이 되어가는 시간이었다 여겨진다.


돌아오는 2월이면 바닐라집 식구들이 또다시 아부다비로 온다. 우리는 또 3주를 함께 지내게 된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친구 가족과 3주간 가족이 되어 지낸다는 것은 전통적인 가족의 모습을 넘어선 또 다른 가족의 의미를 상상케 한다. 요즘은 너무나도 다양한 가족의 형태들이 생겨나고 있다 하는데...  국어사전 속 '가족'이라는 단어의 뜻을 새로 고쳐야 하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곧 또다시 우리 집에서 지내게 될  친구와 아이들을 떠올린다. 욕실에는 향이 좋은 비누를 준비해 둬야지. 두바이 구도심에 함께 가보아야지. 루브르 아부다비에서 내가 사랑하는 고갱을 소개해야지. 그리고 내 책장엔 일 년 전보다 더 많은 책이 꽂혀 있다고, 나는 부지런히 읽어내는 사람으로 지낸다고. 검은색 컴포트 체어는 피터 언니를 위해 깨끗이 닦아두었다고 해야지. 2월 어느 날 친구가 아무렇지 않게 "이리오너라!" 하면서 대문을 열고 들어왔으면 좋겠다. 이번에는 3초 이상 눈을 보고 인사해 봐야지.

계절마다 바뀌는 바닐라집 마당 풍경. 그리고 계절마다 자라나는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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