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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예 Dec 23. 2022

오늘도 참 고맙습니다.

나의 이웃, 그리고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나에게는 오래된 인연의 동네 언니가 있습니다. 시현이 만 두 살에 처음 어린이집을 보내며, 어린이집 동기 엄마로 만났으니 벌써 십 년이 넘은 사이입니다. 내가 워킹맘으로 눈 코 뜰 새 없이 바쁠 때에도 틈틈이 사진으로 놀이터 소식도 전해주고, 축하할 일이나 괴로운 일, 남편 흉

자식 흉 서로 나누며 그렇게 쌓아온 세월이 진짜 우정이 되었습니다.


아이들이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어 한동안 사이가 소원했을 때도 오히려 엄마들끼리의 관계는 더욱 돈독해져 이제는 아들 친구 엄마가 아닌, 진짜 친한 언니 동생이 되었습니다. 원래 유망한 웹 디자이너였던 언니는 미적 감각을 손뜨개에 쏟고 있습니다. 가끔 동네 친한 지인들에게 언니의 솜씨를 맘껏 발휘합니다. 아이들 보내놓고 쉴 틈 없이 뜬 손가방을 내게도, 또 우리 어머님께도 몇 개나 주었을 정도로 마음 따뜻한 언니입니다.


지난 11월 어느 날 저녁. 언니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평소 같으면 서로 얼마나 바쁜 시간인지 알기에 연락하지 않을 시간이었습니다.

언니가 수화기 너머로 물었습니다.

“지예야, 너 혹시 은우(*) 엄마 알아?”

“아니요?”

“응……. 우리 수현이 친구 엄마인데…….


수현이는 내년에 5학년이 되는 언니의 둘째 아들입니다. 은우는 수현이와 1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친구라고 했습니다. 지금 은우의 엄마가 생의 마지막 시간을 보내기위해 호스피스 병동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심각한지는 몰랐거든. 못본지 오래 됐어……. 가끔 카톡으로는 좋아졌다고 했는데…….


마음 따뜻하고 착한 언니, 본인의 아픔에 솔직하고 유쾌한 언니는 동네에서 유명 인사입니다. 여기저기 언니를 찾는 사람이 많습니다. 언니의 지인을 내가 다 알지 못했고, 언니에게 그렇게 아픈 시간을 보내는 친구가 있었나 봅니다.

은우 엄마가 암투병으로 오랜 세월을 고생하다 호스피스 병동에 들어간 다음 날, 언니를 보고 싶다며 찾았고, 언니는 또 다른 지인과 함께 병원을 다녀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내 목소리를 들으니 왜 이렇게 눈물이 나냐며 수화기 너머로 한참 울었습니다.

……그냥 네 목소리를 듣고 싶었어.”

나도 아이들의 밥을 먹이다 말고 수화기를 든 채 한참을 먹먹하게 앉아 있었습니다.


얼마 전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다시 읽었습니다. 권선징악 주제의 전래 동화 같은 글이 왜 세계적인 고전이 되었는지 어릴 때는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아이 셋을 키우고, 생의 질곡을 어렴풋이 알고 이웃의 아픔을 보아서일까요.  또 삶은 고통이기도 하지만, 한편 축복이라는 것을 알기 시작하는 어른이 되어서 일까요. 책의 내용이 전혀 다르게 다가왔습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의 이야기의 핵심인물은 이방인, 사실 하나님의 벌을 받고 땅에 내려온 천사입니다. 천사는 이제 막 쌍둥이를 낳은 여인의 애원을 외면하지 못하고, 여인의 영혼을 바로 거두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벌을 받습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일화를 통해 하나님이 내준 세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사람의 마음에는 무엇이 있는지, 사람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지에 대해.


……혹시 생각해 보신 적 있나요?


요약해서 말하자면 답은 이렇습니다. 사람에게는 약하고 아픈 이를 안타깝게 여기는 사랑의 마음이 있다. 사람은 어떤 지위 여하에 관계없이 본인에게 일어날 어떠한 일도 알지 못한다. (그만큼 사람은 나약한 존재다.) 사람은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아는 능력을 얻지 못했다.


“그렇지만, 사람은 공동체의 힘과 사랑으로 살아간다.”


사람은 나의 한치 앞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내일 본인이 어떤 일을 당할 지도 모르고 오늘을 사느라 아등바등하는 사람들은 간혹 애잔하고 슬픕니다. 한때는 세상의 아픈 뉴스들을 보며 왜 이렇게 하나님은 모두를 공평하게 해 주지 못하셨는지, 왜 누군가는 고통을 당하고 그 고통의 반대편 누군가는 행복한 저녁을 갖게 하시는지, 사람을 왜 이토록 잔인한 존재로 만들어야만 했는지 묻고 싶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원망을 글에 담은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작품에서 톨스토이는 하나님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혼자 살지 않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누군가의 위로를 받을 수 있게 하셨고, 서로 안아주라 하셨고 공동체 안에서 삶의 의미와 행복을 느끼기를 원했습니다.


며칠 전에 언니가 우리 집에 와서 점심을 먹었습니다. 언니가 휴대폰을 들고 단톡방의 대화에 빠져 있었습니다. 언니가 은우 엄마를 비롯해 둘째의 친구 엄마들과 함께 하던 단톡방에 이제는 은우 아빠가 함께 있습니다. 어느 추웠던 날, 새벽 발인을 다녀와서 한참 울었던 언니를 알기에 짐짓 명랑한 목소리로 무슨 얘기 중이냐고 물었습니다. 이제 사춘기에 접어든 두 딸에 대한 고민을 은우아빠가 단톡방에 가끔 터놓는다고 언니가 말했습니다.

단톡방 화면 속에 은우가 제 언니에게 쓴 크리스마스 카드 사진이 있었습니다.


“언니야, 나와 함께 늘 있어줘서 고마워, 언니 너무 사랑해.”


은우 아빠는 ‘나와 함께’ '늘'이라는 단어에 가슴이 아려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은우아빠와 이야기를 나누는 언니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해 있었습니다.


언니의 마음에 분명히 이웃을 향한 사랑이 있었고, 하나님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톨스토이의 작품 속 천사가 깨달은 그것이 나에게도 어렴풋이 와 닿았습니다. 이웃의 아픔을 보았을 때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구나. 그냥, 지금 내가 할 일은 아픈 이웃을 보듬어 주는 것. 사랑을 느끼게 해 주는 것. 이 세상에 혼자 남지 않았다고, 그렇게 알려주는 것.

그것이 사람이 사는 의미구나.


사람들의 삶은 빛나지만 언젠가는 저물고 맙니다. 간혹 사람들은, 그 짧은 생애를 살아가며 의미를 찾으려 평생을 분투하고 애씁니다. 열심히 산 것 같은데 아무 것도 되어 있지 않은 내가 가끔은 서럽고 슬프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이웃에게 사랑을 느끼게 해주고 온기를 전해주는 날이 많았다면 그것만으로도 어쩌면 훌륭한 삶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꼭 무엇이 되지 않아도 돼. 그저 이웃의 아픔에 손 잡아 줄 수 있는 사람으로 산다면, 그리고 우리 아이들이 그런 따뜻한 사람으로 큰다면 나는 꽤 잘 살고 있는 걸지도 몰라." 언니를 바라보는 나의 마음이 뭉클했고 따스해졌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에 사람과 삶의 의미가 있다고 언니가, 그리고 톨스토이가 새삼 전해주었습니다.

당신의 별것 아닌 위로에 내가 오늘 하루를 행복하게 살아갈지도 모릅니다. 그 안에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참, 고맙습니다.




*은우, 수현이는 모두 가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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