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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예 Jan 21. 2023

두 개의 달

난 두 개의 달을 보았다.


스물두 살,


한빛 고시원 202호 나의 방에는 몇 만 원의 창문값이 더 붙어 있었다.

나는 밤이면 손바닥만 한 창문을 열고, 너편에 물거리 아파트 불빛에 손을 뻗어 보곤 했다.

걸으면 몇 분도 안 걸리는 거리였지만, 결코 닿을 수 없어 보였다.


나는 그때 이런 것들을 생각했다.


부동산 벽에 붙어 있던 서울의 집 값,

나의 아르바이트 시급 1,600원

그리고 살던 집에서 쫓겨나 찜질방을 전전하고 계신 대구의 부모님,

아픈 내 배를 쓸어주던 할머니의 주름 많은 손등

.

.


온몸에 닭갈비 연기를 묻히고 돌아오는 길

나는 고시원에 사는 것이 창피해 한참을 둘러오곤 했는데,

별이 보였는지, 반짝였는지는 생각이 나지 않지만

서울의 달은 꼭 내 머리 위에 있었다.

몸을 떨며 보던 달.

찬 날씨가 아니었음에도 한기를 느꼈던 것 같다.


녹초가 된 몸으로 누웠다가도, 한밤 중에 갑자기 잠에서 깰 때가 있었다.

빛 한 점 없는 방이었는데  

나는 왜 낯선 이곳에 혼자 누워 있을까, 고독감에 눈물이 차 올랐다.

내일 내야 할 방 값을 걱정해야 하는 나의 가난함 때문이 아니었다.

까짓, 이십 대에 고시원에 사는 것이 무에 대수라고

학비 걱정, 방 값 걱정하는 것이 뭐가 부끄럽다고

내 처지를 털어놓고 이야기할 동기 하나 없다는 것,

그리고 내가 힘들고 외롭다는 걸 부모님께 말할 수 없다는 것,

나의 마음을 스스로에게조차 까보이지 않고

외롭게 만든 것은 결국 나였다.

.

.



세월이 흘렀다.

나는 그 사이 두 번의 실연을 했고,  

다니던 직장에서 두 번 뛰쳐나왔다.


그리고 스물여덟, 늦깎이 신입인 나를 받아주는 회사에 입사했다.


1년 후 정식 직원이 되는 인턴이었고

당장은 외판원처럼 집집마다 들러 10분 수업을 하며 뛰어다니고,

직접 회비도 받고 영업도 해야 하는

그래서 신입 직원의 퇴사율이 50%가 넘는 학습지 회사였다.


나중에 누가 그랬다고 들었다. '지예는 3개월도 못 버틸 거 같아.'


재개발 예정 지역이었던 달동네 교실을 인수인계받았는데

그곳의 아이들이 나를 변화시킬 것이라는 걸,  당시에는 몰랐다.


번지 수가 엉망인 지붕 낡은 집들을 찾아 한참씩 헤매야 하는 일었고

구두굽이 닳도록 산동네를 오르내려야 하는 일, 혼자 해내야 하는 일,

무거운 교재 가방을 들고 뛰어다니는 일이었지만


나의 주눅 들어있는 표정과 왜소한 몸,

자신 없는 말투, 상을 원망하는 시선,

그것을 아보는 아이들은 없었다.

철 지난 짧은 내복을 입고, 세상에서 가장 해맑은 표정을 짓고 있는 그들은

나를 귀한 손님으로 반겨주었고

사랑해 주었고

내 가르침에 목말라했다.


아현역에서 내려 가파른 언덕을 30분은 걸어 올라가야 하는 곳이었다.

서울에 그런 동네가, 그런 집들도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고시원 건너편의 아슴거리던 불빛들만 서울인 줄 알았다.


그 언덕을 오르내리며 많은 날들이 지났다.


구두굽을 수십 번은 갈았을 것이다.


아이들을 안아주기만 했다.

나와는 달리 때 묻지 않은 그들이 예뻐서

정말 예뻐하기만 했다.

어느덧 나는 '보기보다 훨씬 일 잘하는' 신입, 그리고 정식 교사가 되어 있었고,

눈치 빠르고 자기 피알 잘하는 동기들보다는 한참 늦었지만

곧 팀장 발령도 앞두고 있었다.


어느 날, 내가  귀여워하던 지훈이의 수업날이었다.

금요일 교실의 마지막 집.

내가 그날따라 기분이 좋았나 보다.


지훈이 어머님이 살갑게 물었다.


"선생님, 결혼 언제 해? 남자 친구 있지?"


평소 같으면 그냥 웃고 넘겼을 그 질문에

내가 가슴에 품었던 말을 했다.


"사실은요 어머님, 남자친구 성이 우리 지훈이랑 같아요."


어머님은 벌떡 일어나 그 보기 힘든 성, '모씨'성을 가진 남자냐며

오매, 웬일이야! 반가워하셨고,

나도 배시시 수줍게 웃었다.

 

어머님은 말했다.


"모씨 성이 참 착해. 우리 신랑이 돈은 못 벌어도 얼마나 착한데."

"그런 것 같아요. 착하고 자상해요."


돈은 없어도요. 그렇게 말하여 어머님과 함께 웃었다.

그리고 말 없는 지훈이 아버님이 어느새 슬그머니 나와 계셨다.

궁금한 것이 참 많은 표정으로.


배운 것 없고, 가난하지만

그래서 달동네에서 다섯 식구 몸 부비며 살지만,

웃음이 많던 지훈이네를 나와

휴대폰을 열고 남자친구문자를 확인했다.


'나 골목 슈퍼 앞에 있어. 떡볶이 샀어.'


그리고 그날이었다.

남자친구가 기다리는 골목 슈퍼 앞으로 가는 길,

내가 가장 좋아하는 금요일의 별미, 떡볶이를 서 나만 오매불망 기다리는

가난한 내 연인을 만나러 가는 길.


내가 사랑하는, 나의 금요일 교실

어느 낮은 지붕 위로 달이 떠 있었다.

참 둥글고 예쁜 달.

시리지 않은 달.

따뜻한 달.


달은 변한 것이 없었다.

변한 것은 나였다.








최근에 니체의 철학에 빠졌다.

당시엔 부끄러워했던 나의 이십 대를,   

왜 내가 지금은 끊임없이 내 글에서 들춰내는지 알았다.

제자리를 못 찾고 방황하던, 외롭고 고독한 청춘.

가장 나의 남루한 시절이라 생각했는데

이십 대에 겪은 모든 일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내가 경험한 시간들이 없었다면

나는 한 시간 내내 솥뚜껑을 닦아야 받을 수 있는 돈이 1,600원 남짓이라는 걸 몰랐을 것이다.

시급에 매겨진 그 한 시간을 견딘다는 것이 얼마나 길고 지루한 일인지, 결코 알 수 없었을 것이고  

가족과 함께 뒹굴 수 있는 따뜻한 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서울 변두리 그 한 평짜리 공간도

방세 낼 날이 무섭게 돌아온다는 것을 몰랐을 것이다.


그 공간이 작건, 크건, 훌륭하건, 볼품없건,


닿을 수 없는 저 너머의 불빛으로 초라해지지 않고

부자가 되려고 아둥바둥하지 않으면서

행복하게 살고 있는 다정하고 착한 이웃들이 어딘가에 있다는 것을 몰랐을 것이다.


나의 못난 내면, 나의 결핍, 나의 상처를 모두 알고

사랑하고 보듬어 줄 하늘 아래 단 한 사람을 만난다는 것이

기적과도 같은 일이라는 것을 몰랐을 것이고


시부모가 살고 있는 임대 아파트 방 한 칸에

겁도 없이 신혼살림을

차릴 용기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늦은 나이,

약하고 왜소한 몸,

소심한 성격

낮은 자존감,

아버지의 사업 실패,

대기업 퇴사

결혼까지 생각했던 남자와의


인턴 영업직  

모두가 기피했던 달동네 나의 교실

가장 늦은 팀장 발령

.

.

그깟 시련들로 인해


순수한 아이들의 포옹에 온 가슴이 따뜻질수 있음을 알았고

그들이 어렵게 내어주는 몇 만 원의 가치를 알게 되었고

가난한 부모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신의 삶에 당당한, 그의 아름다움을 알아보았다.

30대 이후 나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다.

그리고 나는

나의 힘으로 운명에 맞설 수 있는 지금의 나를 몹시 사랑하게 되었다.


돌이켜보니,

나의 20대가 나의 니체였다.


 



나는 다른 어떤 시기보다도 나 자신의 생애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에 깊이 의지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자주 자문해 왔다.

나의 가장 깊은 내면의 본성이 가르쳐주는 바로는,

일체의 필연적인 것은 높은 입장에서

그리고 거시적인 의미에서 보면 유익한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것을 견디는 것을 넘어서 사랑해야 한다.

'운명애(amor fati)' 이것이 나의 가장 깊은 내면의 본성이다. / 니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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