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내 환자들이 아이들이라는 건.
정말 웃긴 우리 아이들.
망해가는 집구석의 대표주자인 소아응급이지만, 그래도 내가 보는 환자들이 어리고 귀엽고 티 없이 해맑다는 것은 참 좋다. 워낙에도 웃기면 반은 먹고 들어간다고, 세상에서 웃긴 게 최고인 사람인데 아이들은 참 생각지 못한 구석에서 나를 웃게 만들어준다. 소아 보는 의사들마다 선호하는 연령대가 조금씩 다른데, 신생아 중환자실에서 일하는 내 친구는 꼬물거리는 쪼꼬미들이 세상에서 제일 귀엽다고 하고, 한 돌 전후가 제일 귀엽다는 사람들도 많은데 나는 말을 하기 시작하는 연령대의 아이들을 좋아한다. 아이들이 덜 완성된 서툰 발음으로 자기 주장하는 것 보면 귀엽기 그지없다. 아니, 세상에 몇 년 살았는데 자아가 있구나!
문진 하면서 보호자에게 '아가는 언제부터 열이 났나요?'라는 질문을 했을 때, '나 아가 아닌데?'라고 받아치는 아이들은 정말 귀엽고 웃긴다. 응 아가 맞아, 너 아직 인생 5년밖에 안 살았잖아. 아마 너희 부모님께 너는 평생 아가일 거야. 나도 그렇거든. 웃음을 삼키면서 다음 문진을 이어가기도 한다. 초등학생 정도 되면 이제 자기는 다 컸다고 생각하는지, 응급실에 들어오면서 '저기 애기들이 있네'같은 말을 하는 친구들도 있다. '너도 아가야'라고 말해주면 토라지기도 한다. 이 나이대 친구들은 본인 증상을 어느 정도 설명할 수 있어서 아이들에게 물어보는 것도 중요하다. 열이 났는지 등의 시기까지는 기억을 하기 어렵지만, 두통이나 복통 등은 어느 정도 표현을 할 줄 알아서 '네가 한 번 이야기해 줄 수 있어?' 하고 기회를 주는 게 좋다.
그래도 아이들은 아이들이라, 진술이 정확하지 않은 때가 많은데, 검진하면서 아이들을 주의 깊게 관찰하는 건 언제나 중요한 법. 문진이 정확하게 안 되면 짜증이 날 수도 있는데 아이들은 좀 웃긴다. 복통으로 와서 어디가 가장 아프냐 물으면 애매모호하게 전체적으로 아프다고 하는 친구들이 많다. '다 아파!' 그럼 다음 단계는 한 군데씩 만져보는 일이다. 아프다고 하는 곳을 짚어 보게 하고, 안 아픈 곳부터 한 군데씩 만지는 것이 검진의 정석인데 그렇지 않다면 한 군데씩 만져보며 물어볼 수밖에. 그런데 여기서도 말과 얼굴이 따로 노는 일들이 있다. "아파?" "응"이라고 대답하는데 얼굴은 아픈 얼굴이 아니다. 그럼 다시 물어본다. "안 아파?" "응". 아니 이게 뭐람. "아파, 안 아파?" "몰라". 심각한 얼굴로 온 보호자들이 갑자기 웃기 시작한다. 너는 아픈 거야 안 아픈 거야. 대개 이 정도는 많이 아픈 것은 아니란 뜻이기에 조금 안심을 하시는 분위기다. 살살 아이의 긴장을 풀어주면서 배를 조심스럽게 만지다 보면 아픈 곳은 힘을 빡, 주는 곳이 있다. 아프니까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가는 것이다. "너 요기가 아팠구나?" "응!" 어른들처럼 자기 스스로 정확하게 표현을 못 해서 시간이 많이 걸리기는 하지만, 그래도 귀엽고 웃기니까 괜찮다.
애들 앞에서는 찬물도 못 마신다는 말들을 하는데 정말 맞아. 친구 딸이 열이 오래 나서 내가 일하던 응급실에 왔었는데, 친구가 항생제 안 먹어도 되냐는 물음에 "에이 항생제 먹는다고 나을 상황 아니야"(바이러스 감염이 대부분이며 바이러스 감염에는 항균제가 굳이 필요하지 않다. 낫기까지 시간이 필요할 뿐)라는 말을 지극히 평범하게 해 주었다. 친구 딸이 그날부터 내 말투 어디에 꽂혔는지 계속 따라 하고 있다고 하는데 상당히 부끄러웠다. 봉인해 두었던 대구 사투리가 튀어나온 것인가, 높낮이가 이상했나. 무엇에 꽂힌 것인지 모르겠지만, 좀 더 모범적인 성인 여성의 모습을 보여줄 것을 그랬다.
조금 더 큰 애들은 가끔 나에게 학교 다닐 때 시험 몇 등 했냐고 물어보는 애들도 있다. 나의 의국 후배 중 수능 만점자가 있었는데, 놀러 갔다가 머리 부딪혀서 두피 열상으로 찢어진 아이가 봉합을 받으면서 묻더랬다. "선생님, 수능 몇 점 맞으면 의대 가요?" 후배는 "난 다 맞았는데?"라고 담담히 대답했고, 아이는 하필 어머니가 옆에 계실 때 물어봤다가 잔소리를 엄청 들었다나 뭐라나. 하필 왜 그 친구한테 물었나 모르겠다, 보호자들이 가끔 립서비스로 아이들 진료를 볼 때 "예쁜 선생님 왔네~" 하고 말씀하시면 아주 단호하게 "아니야 안 예뻐" 하는 아이들도 있고(나도 알아 이 녀석아), 가끔 내 나이를 궁금해하는 아이들도 있다. 몇 살이냐고 물으면 칠십 살이라고 말해주면 그게 뭐가 웃기는지 깔깔 웃으면서 자기 할머니보다 많다고 진짜냐고 한다. 응 진짜야, 진짜 칠십 살이야. 언젠가는 진짜 칠십 살이 될 거니까.
내가 보는 환자군이 아이들이라는 건, 때로는 많은 부담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나빠질 때는 손쓸 틈도 없이 나빠지고, 보호자들을 대하는 것도 쉽지만은 않다. 하지만 진료를 보면서 웃을 수 있는 순간이 가끔이라도 있다는 건 제법 괜찮은 일이다. 웃긴 게 밥 먹여주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잠깐의 시름을 덜어주는 데는 충분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