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교육과 노동 사이.
교육의 현장에서 느낀 아쉬움.
대학병원 교수의 역할은 크게 3가지. 진료, 연구, 그리고 교육이다. 기본적으로 의사이기에 진료를 해야 하며, 자신의 분야에 대해서 끊임없이 연구하고 그에 대한 성과, 즉 논문 실적으로 내야 한다. 마지막으로 교육. 교육의 대상은 의과대학생부터 인턴, 전공의 및 전임의까지 해당된다. 의과대학생의 교육은 대개 정해진 수업 시간이 있고, 이에 대해서 강의 주제를 준비해서 하는 방식이고, 학교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본과 3학년 이후에 병원 실습을 돌게 되면 환자 케이스를 하나씩 배정받아서 공부하게 하거나, 수술을 참관하거나 회진을 따라 돌면서 어깨너머로 배운 뒤 과제를 받기도 하는 방식이 대부분이다. 학생 시절의 교육은 어느 정도 틀이 정해져 있고, 어디까지나 학생이기에 오롯이 교육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있다.
하지만 피교육자이자 노동자가 되는 인턴, 전공의부터는 교육에 대해 솔직히 아쉬운 순간들이 많다. 일에 대해서 좀 알고 들어가고 싶지만, 그전 달의 인턴 혹은 그전 달의 전공의에게 인수인계를 받은 것에 의존하고, 나머지는 일하면서 부딪혀볼 수밖에 없다.
일단 교육을 할 시간이 너무 없고, 피교육자들의 체력적인 한계도 분명했다. 그나마 전공의 특별법이 생겨서 주 80시간이 되었지, 그 이전에는 주 100시간은 우습게 넘겨가며 일했다. 비교적 온오프 명확한 응급의학과에서 일했음에도 불구하고, 교대 시간에 바빠서 손 하나 더 거들다가 오버타임 한두 시간씩 넘기기는 일쑤였다. 응급병동이나 중환자실 주치의를 하던 시절, 특히 소위 '보릿고개'로 인력이 부족해서 병동 주치의가 1명으로 배정되던 시절에는 당일에 병동으로 입원한 환자 오더를 모두 내고 가야 했기에 빨라야 오후 9시였다. 그리고 다음날 출근은 오전 7시. 당직을 하고 난 다음날에도 중환자실 보호자 면회를 마치는 오후 7시 반까지는 일을 해야 했다. 그런 상황에서 교육은 솔직히 사치였다. 의과대학 시절 수면제로 유명한 수업들에서도 한 번도 잔 적이 없었던 나였는데 피곤 앞에는 장사 없었다. 이미 깡이나 의지로 버틸 상황이 아니었다. 저항 없이 눈이 감겼다. 나는 전공의 교육 때 잘 자는 아이로 유명했다. 솔직히 교육보다는 가서 잠 한숨 더 자고 싶은 시간들이 더 많았다. 감사하면서도 힘들었다.
시간이 없다는 말은 피교육자들 뿐 아니라 교육자들에게도 해당되었다. 교육을 맡은 교수들이 바쁜 것도 있지만, 특히 응급실의 경우에는 항상 누군가는 자리를 지켜야만 하는 곳이었다. 환자들이 시간을 가려서 아파주는 것이 아니기에, 그나마 가장 합리적으로 가장 환자가 적은 요일, 가장 환자가 적은 편이고 밤 근무를 마친 전공의들도, 낮 근무에 출근한 전공의들도 수업을 들을 수 있는 오전시간에 교육시간이 정기적으로 있었다. 전공의들이 교육을 듣는 동안에는 전문의들이 그 시간 동안 전공의들의 역할을 커버했다. 내가 예전에 일했던 병원에서는 그렇게 1주일에 2번, 각 2시간을 전공의들을 위해서 할애했다. 강의 준비를 하면서 이 방대한 내용을 짧은 시간 내에 전달하는 것이 너무나도 어렵게 느껴졌다. 그나마도 중환이 오면 어쩔 수 없이 교육은 뒷전이 될 수밖에 없었다. 확실한 'protective hour' 즉, 교육에만 오롯이 집중해 줄 수 있는 시간이 없었다.
전공의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들은 교육에 목말라있지만 피로에 지쳐 있었고, 수업의 내용이 진료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인상을 많이 받았고 반대로 전문의들은 어떤 식으로 교육을 하는 것이 더 효과적인지에 대한 고민이 부족했다. 아는 것을 다 전수해 주기는 어렵지만, 대신 이 시간에 이것만은 알고 가자는 목표와 전략이 명확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전공한 분야인 소아응급으로 말할 것 같으면, 개개의 질병에 대해서 어떠하다를 말하는 방식보다는 어떤 증상으로 온 환아는 어떤 것을 감별하고, 뭘 물어보는 것이 중요한지에 대해서 강의하자는 전략을 짰다. 소아응급환아의 접근법. 모세기관지염이니 폐렴이니 하는 이야기보다는 발열로 왔을 때 발열 환아에서 어떤 것들이 바이러스 감염에 더 부합한 소견인지, 연령대나 발열 기간에 따라 어떤 것을 감별할 것인지에 대해서 강의했다. 반응이 제법 좋았다. 이런 수업을 듣고 싶었다는 말을 해줘서 반가웠다. 국내외의 저명한 논문을 읽고 내용을 요약하고 발표하는 저널 미팅 시간에도, 연구방법이 어렵고 복잡한 이야기를 하는 것보다는 우리가 실제로 많이 보는 환아들의 케이스, 모세기관지염이나 급성 장염의 치료, 혹은 코로나로 응급실에 내원한 환아들의 경과에 대한 주제를 골랐다. 발표 이후에 최근 진료의 트렌드가 어떤지에 대해서 짧게 덧붙여주는 방식으로 실제 환자의 치료에 접목할 수 있도록 했다. 응급의학과 교과서를 함께 리뷰하는 북 리딩 시간에도 일단 전문의 시험에서 자주 묻는 문항들을 먼저 보여주고, 그다음에 어떤 것이 중요한지 가닥을 잡아주는 식으로 주의를 끌었다. 슬라이드 한 장 정도로 '이것만 알아라'라고 요약을 해 줬다. 한 줄 요약 시대 아닌가.
교육이란 것이 참 하는 것도 받는 것도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예전에 면접 보던 시절에는 진료 교육 연구 중 무엇이 본인의 강점이냐는 물음에 해맑게 교육이라고 답했는데, 그것은 역시 무식한 자의 오만이었다고 생각한다. 할수록 어렵다. 하나 가르쳐서 열을 알기는커녕 하나만 알아도 정말 대단한 것인데, 강의하는 나는 상대가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알기를 기대하고, 상대는 내가 하는 말의 10분의 1도 건져가기 어렵도록 몸도 마음도 피로한 상황이다. 그리고 교육자들이 솔직히 교육에 대한 고민을 좀 더 철저히 할 필요가 있다. 나는 다 아는 내용이라고 답답해할 것이 아니라, 피교육자가 무엇을 어려워하는지, 어떤 것을 알고 싶어 하는지 그 고민에 먼저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가장 잘 전달할 수 있는 방식을 택해야 하며, 본인도 그에 대해서 한번 더 공부해야 한다. 교육의 영역은 아직도 참,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