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기 전과 후의
바나나를 가지고 왔다. 점심으로 바나나를 먹을 것이다.
며칠 전 마트에서 바나나를 구입했을 때, 바나나는 꼭지에 푸른빛을 띠고 있었고, 초승달 같은 몸뚱이는 병아리색으로 고왔다. 지금 내 눈앞에 놓여있는 바나나는 꼭지는 말랐고, 몸뚱이에는 갈색 반점들이 무리 지어 피어있다. 나는 바나나를 좋아한다.
어릴 때에는 국산 과일이 아닌 바나나를, 거기다 시골 촌구석에서 살았던 나로서는 쉽게 먹을 수 있는 과일이 아니었다. 내가 바나나를 처음 본 것은 예닐곱 살 때였던 것 같다. 누구의 제사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 아마 할아버지의 제사였을 것이다 - 제사상에 올려 있던 바나나를 보았다. 무슨 일 때문이었는지 나는 제사상을 앞에 놓고 서럽게 울고 있었고, 엄마는 나를 달래느라 진땀을 빼고 있었다. 나는 고집이 센 아이였다. 고집도 세고 무서운 것도 잘 모르는, 자식이 여섯이나 딸리고 시어머니와 남편이 있는 가난한 아낙이 감당하기에는 힘든 넷째 딸이었다. 이런 내게 바나나 송이를 내민 사람이 고모할머니였다. 억지를 부리며 엄마를 힘들게 하는 나를 달래기 위해 고모할머니는 제사상에서 바나나를 들고 오셨다.
“이게 뭔 줄 아냐, ‘바나나’라는 거다. 한 개 먹어 볼래?”
고모할머니는 손에 든 화투처럼 펼쳐진 바나나 송이에서 바나나 한 개를 쭉 뜯어내 내게 내미셨다. 나는 울음을 그치기는커녕 더 크게 울어댔다. 어째선지 노란 바나나가 맛있을 것 같다는 생각보다 무서운 생각이 먼저 들었다. 왜 그랬을까. 아마 어린 마음에도 아직 제사를 지내지도 않았는데 제사상에서 음식을 가져온다는 것은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바나나와 맺은 첫 인연이다. 그 이후에는 바나나를 어떻게 먹게 되었는지 모른다. 꾸준히 좋아했다는 생각만이 남는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바나나를 좋아했다. 여전히 좋아한다. 덜 익은 바나나는 서걱서걱 씹히고 달지 않아서 싫고 익은 바나나, 적당하게 익은 후부터 좀 더 푹 익어도 좋다.
내게 바나나를 처음으로 주셨던 고모할머니 댁에서 나는 야간 고등학교를 마쳤다. 1, 2학년은 상고 선생님 댁에서 일을 하면서 다녔는데, 그곳을 그만두고 시골집에서 학교를 다니려고 하니 저녁에 학교가 늦게 끝나는 바람에 버스가 끊겨서 다닐 수가 없었다. 고모할머니 댁도 학교와 거리는 멀었지만, 버스는 끊기지 않았다. 1시간 이상의 시간을 버스 안에서 시달려야 했지만, 그나마 다행인 셈이었다.
고모할머니 댁에서 지낸 그 시절, 열여덟 살의 내 모습이 기억나지 않는다. 1년을 몽땅 지내지는 않았을 텐데, 얼마의 시간을 고모할머니 댁에서 지냈던 것인지도 생각나지 않고, 어떻게 지냈는지도 생각이 전혀 나지 않는다. 학교 수업이 4시 정도부터 시작되었는데, 아침에 일어나서 오전 내내 나는 무엇을 하며 지냈을까. 2시에 학교에 가려고 집을 나섰더라도 그 많은 시간 동안 무엇을 했는지 도무지 기억해 낼 수가 없다. 벌써 30년이 지나서일까. 아니다. 그전에도 고모할머니 댁에서의 일들을 생각해 보면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이 없었다. 생각나는 건 고모할머니가 방생을 자주 가셨다는 것.
승복 바지를 입고 방생을 가시던 고모할머니와 그 시절 내가 좋아했던, 내가 꽃이 시들기 전에, 책상에 꽃병을 두고 꽃집에 들러 예쁜 꽃들, 장미, 안개, 소국, 달리아를 골라와 꽃을 꽂아 드렸던 선생님의 결혼식에 맞춰 천 마리 종이학을 접었던 것을 기억한다. 일상의 기억이 없이, 밥을 어떻게 먹었고 잠은 어떻게 잤는지, 무엇을 하며 오전을 보내고, 학교에서 돌아와 밤을 보냈는지는 한 장면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 시절 내 영혼이 척박했던 탓일까. 그 시절, 아름다웠어야 했을 열여덟의 나는 죽어 있었던 것, 일까.
황량하기 그지없던 내 마음에 빛을 주었던 종이학 접기, 천 마리 종이학을 투명한 유리관에 넣고 어둠 속에서도 볼 수 있게 전기선을 연결했다. ‘천 번을 접어야만 학이 된다.’는 종이학 천 마리를 열심히도 접었더랬다. 천 마리 종이학을 넣기 위해 유리집에 가서 유리관을 맞추고 전기선을 연결하여 꽂아 보았던 날, 환하게 불이 밝혀진 유리관 속의 날개가 펴진 종이학들은 날고 있다는 착각이 들게 했다. 그걸 선물하고 나는 그 선생님과 함께 처음으로 레스토랑이라는 곳에 가서 밥을 먹었다. ‘애너벨리’라는 레스토랑에서 선생님과 마주 앉아 새우볶음밥을 시켰다. 난생처음으로 갔던 레스토랑은 피아노 음악이 흐르고 어둠침침하면서도 뭔가 내가 지금까지 알지 못하는 분위기 때문에, 나는 다소 의기소침했다. 나의 촌스러움이, 내 초라함이 그대로 보일 것 같아 두려웠고, 한편으로는 선생님과 함께 식사를 한다는 것에 마음이 들떠있었다. 내가 다 먹지 못한 밥을 선생님이 덜어가서 드셨던 것이 내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선생님의 소박함이 오래 가슴에 남았다.
선생님은 영어를 가르치셨다. 1학년 때 무등산으로 봄 소풍을 갔는데, 내려가는 길에서 앞에서 걸어가던 선생님의 손을 얼결에 잡았다. 내리막길에서 중심을 잡기가 힘들었던 내 손을 선생님은 뿌리치지 않고 다정하게 잡아주셨다. 그것이 인연이 되었다. 선생님이 학교를 그만두기까지 나는 선생님의 책상에 꽃을 자주 꽂았고, 자그마한 선물을 자주 했고, 처음 담가 본 김치도 가져다 드렸다. 1학년을 마치고 선생님은 학교를 그만두셨지만, 나와의 인연은 계속되었다. 나의 졸업과 선생님의 결혼 그리고 직장생활로 이어지면서 가끔 선생님 댁을 방문하기도 했다. 내가 직장을 그만두고 공부를 하겠다고 경기도로 올라간다고 했을 때도 응원해 주셨고, 내가 딸을 낳아 친정을 가기 위해 내려갔을 때도 기차역까지 나오셔서 점심을 사주셨다. 내가 처음 천 마리 종이학을 접어 선물로 드렸던 사람, 내게 남편과 찍은 사진, 커다란 결혼사진을 주셨던 선생님.
내게 처음 바나나를 보여주셨던 고모할머니는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참 직장생활을 하던, 고모할머니가 70대 중반에 직장암으로 돌아가셨다. 고모할머니는 문병을 갔을 때, 결혼축의금으로 20만 원을 주셨다. 서른이 넘은 나이에 결혼한 내 결혼식을 고모할머니는 보지 못하셨다.
고모할머니의 삶은 한마디로 기구했다. 남편이 바람이 나서 새 살림을 차렸던 것이다. 그럼에도 고모할머니는 씩씩하게 잘 지내셨다. 남편에 대해, 사람에 대해 연연하지 않고, 다른 생명을 살려줌으로써 마음의 평화를 얻으셨던 것 같다. 사람이 아닌 무언가를 살리는 기분, 그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 열두 살에 시집을 갔다던 고모할머니는 40대 이후부터는 자식들도 모두 떠나고 혼자 그렇게 마음에 부처를 보시고 생명을 살리는 일에 몰두하셨다. 거의 매일 가셨던 방생에서 고모할머니는 자신의 삶도 꾸준히 놓아주었던 것은 아닐까.
처음 바나나를 먹었던 기억은 떠오르지 않는다. 처음 바나나를 보았던 기억이 너무 강렬해서 맛은 기억하지 못한다. 삶에서 만나는 처음의 기억들, 그 기억들은 다소 순수하고 순진해서 그곳으로 다시 돌아갈 수가 없다. 그 순수함을 기억하지만 다시 순수해질 수는 없다. 너무 많은 가면이 덧씌워져서, 너무 많은 반점이 생겨서 개나리꽃빛의 바나나가 아니라 갈색 반점이 무수한, 탁한 빛깔의 바나나가 내 앞에 놓여 있다.
바나나를 먹는다. 농익은 바나나를 맛있게 먹는다. 달콤하고 쫀득하다. 포만감이 몰려온다. 바람에 나뭇잎이 우수수 흘러내린다. 가을이 익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