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남연 Oct 22. 2024

폭우 속 달리기

일상 에세이 / 문체 연습

 연재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습작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한 것 같아서 매거진을 만들게 됐습니다. 앞으로 이 공간에는 일상 에세이, 엽편 소설, 그외 여러 습작들을 올릴 계획입니다.


 첫 글은 '레몽 크노'의 <문체 연습>이라는 책에서 형식을 빌려왔어요. 하나의 사건을 수십여 개의 문체로 달리 표현한 책인데요. 저처럼 다양한 표현 방식으로 글을 쓰는 연습을 하고자 하는 습작생들이 있다면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추천해봅니다. ^^


1. 약기(略記)

 지난주 금요일, 폭우가 쏟아지는 날씨, 마흔 언저리의 여자 하나, 단발머리, 운동용 흰 티셔츠와 파란색 조거팬츠, 호수공원, 달리기, 우산을 쓰고 산책을 나온 사람들을 스쳐감,

 흠뻑 젖음, 시원함, 고양된 상태, 눈물.

 돌아오는 길에 집 앞 횡단보도 앞에서 한 여자가 우산을 권함. 일부러 나왔다고 대답. 때마침 신호가 바뀌고 무안해진 여자가 황급히 사라짐.

 화장실에서 가볍게 샤워를 마친 뒤 욕조에 따듯한 물을 채워 입욕제를 풀고, 몸을 담금.

 빌 에반스의 ‘Autumn Leaves’를 들음.


2. 당사자의 시선으로

 바야흐로 10월이다. 가을의 선선한 공기를 체감한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요 며칠 사이 기온이 뚝 떨어져 벌써 계절의 가장자리를 지나고 있는 듯하다.

 지난 금요일, 나는 서재에서 안 에르보의 그림책 「파란 시간을 아세요?」의 도입부를 막 노트에 필사한 참이었다. 후두둑. 빗방울 소리가 거세게 들려왔다.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을 바라보니, 과연 폭우에 세상이 온통 젖어 있었다.

 기회인가? 얼마 전부터 이상하게도 나를 충동질 했던 생각 하나가 자연스레 고개를 들었다. 비를 흠뻑 맞으며 공원을 달리고 싶다는 생각. 내 안에 고여 있는 어떤 감정들의 발산을, 원하고 있었다.

 곧장 운동용 흰색 반팔 티셔츠와 푸른색 조거 팬츠를 입고, 우산을 챙기지 않은 채로 밖으로 나왔다. 살갗에 닿는 빗방울이 예상보다 차가워 잠시 주춤했지만, 금세 몸이 푹 젖어서 아무래도 상관없는 상태가 되었다.

 아파트 후문을 벗어나 횡단보도 앞에 섰을 때 60대 전후로 보이는 남자 하나가 나를 보고 흠칫 뒤로 물러섰다. 어쩌면, 그는 나를 미친 여자라고 생각하고 있을까? 아무렴 어때. 나는 지금껏 너무 지나치게 사람들의 평가와 비난을 의식하며 살았다. 이제 정말로 움츠러들지 않아도 괜찮다고 느끼자, 모종의 해방감이 들어 엷은 웃음마저 흘러나왔다.

 공원 입구에 이르러 여느 때처럼 이어폰을 끼고, 러닝앱을 열어 달리기를 시작했다. 비에 흐려진 호수를 오른 편에 두고서 갈색과 초록빛이 한데 섞인 나뭇잎과 억새풀들을 스쳐 지나가는 동안 차츰 감정이 고양돼갔다. 그러다가 목표 지점인 호수의 끝에 거의 이르렀을 때 갑자기 눈물이 터져 나왔다. 상처받았다는 사실조차 의식하기를 꺼려한 채 두려움 속에서 보냈던 지난 시간들에 대한 슬픔이었다. 나는 눈물이 따듯하다고 느꼈다.

 하늘에는 회색 구름이 자욱하게 깔려 있었다.


 “어디까지 가세요? 제가 우산 씌워드릴게요.”

 달리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횡단보도 앞에서 나보다 연배가 조금 더 많아 보이는 여자가 우산을 씌워주며 다정하게 말을 걸어왔다.

 “아, 너무 감사합니다. 근데 제가 일부로 나온 거라, 우산은 괜찮습니다.”

 마침 신호등이 초록색으로 바뀌었다.

 “알겠어요.”

 그녀는 대답을 마치자마자 재빨리 횡단보도를 향해 걸어갔다. 무안을 줄 의도는 전혀 없었지만, 결과적으로 그렇게 돼 버렸다. 살다 보면 이런 상황들이 생각보다 흔하게 벌어지곤 한다.


 집으로 돌아와서는 재빨리 샤워를 하고 온수에 물을 받았다. 입욕제를 풀자 상쾌한 향이 은은하게 올라왔다. 나는 욕조 안에 몸을 푹 담근 채로 휴대폰에서 흘러나오는 빌 에반스의 ‘Autumn Leaves’를 들었다.


 지금 나의 시간은, 계절은, 어느 지점을 지나고 있는 걸까.


3. 다른 이의 시선으로

 들어 봐. 지난 금요일 저녁에, 나는 장을 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어.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는데 내 옆으로 어떤 여자가 폭우를 맞으면서, 우산도 없이 서 있지 뭐야? 그야말로 비 맞은 생쥐 꼴로 말이야.  

 보아하니 미친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혹시 우산을 미처 챙기지 못하고 나온 걸까. 아니면 어떤 속사정이라도?

 어쨌거나 그 추운 날씨에 말이야. 도저히 그 모습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겠는 거야. 살며시 다가가 우산을 씌워주며 말했지.

 “어디까지 가세요? 제가 우산 씌워드릴게요.”

 내 예상과 달리 상대는 좀 난감해 하는 듯한 눈치였어. 얼굴에 애매한 미소를 띠고서 글쎄, 이렇게 대답하는 거야.

 “아, 너무 감사합니다. 근데 제가 일부로 나온 거라, 우산은 괜찮습니다.”

 그 순간에 내가 얼마나 민망했을지, 충분히 상상이 되지 않아?


 아, 정말. 마침 신호가 초록불로 바뀌어서 다행이었어. 세상엔 참 별난 사람들이 많다니깐.




 < 필사 노트 >


 파란 시간을 아세요?

 불을 켜기엔 아직 환하고

 책을 읽거나 바느질을 하기엔 조금 어두운 시간

 읽던 책을 그대로 펼쳐놓은 채

 생각에 잠기고, 꿈을 꾸는 시간

 펼친 책장이 희미한 어둠 속에서 하얗게 빛나는 시간


 땅거미 질 무렵의 어슴푸레한 시간

 그림자는 빛나고 땅은 어둡고, 하늘은 아직 밝은 시간

 온 세상이 파랗게 빛나는 시간

 세상 모든 것들이 조용히 밤을 기다리고 있는 시간

 하늘  끝자락이 붉어지고, 태양은 멀리 어딘가로 자러 가는 시간


 늘 같은 모습으로 다가왔다가

 돌아갈 때만 조금 달라지는,

 슬프고 아름다운 시간


 그런 파란 시간을 정말 아세요?


(안 에르보, '파란 시간을 아세요?' 중에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