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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연 Dec 22. 2023

어떤 하루

손바닥 소설

 언제부턴가 창밖으로 가늘게 비가 흩뿌리고 있었다. 이런, 또 일기예보랑은 다르잖아. 바로 전날에 말끔하게 닦아 놓은 유리창 표면에 작은 물방울들이 어지러이 맺히는 광경을 바라보며 수민은 조용히 눈살을 찌푸렸다. 이런 날에는 책방을 찾는 손님들의 발길이 더욱 뜸해지기 마련이었다.

 수민이 K신도시의 골목 어귀에 <계속 해 보겠습니다>라는 간판으로 책방을 연 시기는 작년 여름 무렵이었다. 당시에 그녀의 나이는 서른일곱 살이었다. 책방을 열기 전에는 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쳤었다. 그녀가 일을 그만 둔 이유는 한 마디로 절망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에? 거기에 대한 답은 세상 혹은 자기 자신이 될 것이다. 어느 쪽을 고르든지 결국에는 동일한 의미였다.


 “쯧, 요즘 세상에 책을 돈 주고 사서 읽는 사람이 몇이나 된다구……."

 수민이 책방을 개업하던 날에 그녀의 아버지가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과 지인에게 선물할 책 다섯 권을 계산하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마치 머지않아 망할 게 기정사실이라는 듯이. 한편으로는 그게 걱정의 다른 표현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만을 꼭꼭 씹어 토해내는 것 같은 아버지의 말투가 수민의 오기를 자극했다. 그렇다고 아버지의 옆에서 눈시울을 붉힌 채로 자신을 마냥 안쓰럽게 바라보고 있는 어머니의 시선 역시 달갑잖게 느껴져서 그녀는 차라리 두 사람이 빨리 자리를 떠나주기를 바랐었다.


 오전 11시 반. 아직 책방에 온 손님은 아무도 없었다. 수민은 책장 주위를 서성이다가 아래쪽에서 시집 한 권을 집어 들었다. 슬픔이 없는 십오 초. 원래 시집들은 지금 자리보다 두 칸 위에 배치돼 있었지만, 이제는 자기계발서에 자리를 내어준 상태였다. 그 옆으로 에세이가 책장의 가장 많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서 '지지 않는다는 말'만큼은 판매부수와 상관 없이 늘 눈에 가장 잘 들어오는 위치에 비치해 두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수민 자신을 위해서였다.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슬픔이 없는 십오 초'를 제자리에 두고, 다른 시집을 꺼냈다. 이번에는 '멀리 가는 느낌이 좋아'라는 제목의 시집이었는데, 바깥의 우중충한 날씨와는 다르게 핑크와 하늘빛이 어우러진 표지의 산뜻한 색감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투명한 잔에 거품이 적당히 보이게끔 맥주를 담아 테이블 위에 시집과 함께 올려두고 사진을 몇 장 찍었다. 인스타그램에 올릴 용도였다. 그녀는 게시물을 올리자마자 맥주 한 모금을 들이켰다. 시원하게 톡 쏘는 감각이 지나간 뒤에 씁쓸한 맛이 입안에 가득 퍼졌다.


 수민은 손님이 오기를 기다리며 새로 입고된 신간서적 두 권을 온라인 스토어에 등록하고, 메일함을 열어  십여 개의 스팸메일들 사이에서 술비 작가로부터 온 메일을 찾아 클릭했다. 그녀는 블로그에서 쌓은 인지도를 기반으로 최근 '세상의 모든 맥주'라는 제목의 여행 에세이를 발간하여, 책의 홍보 차 2주 뒤에 수민의 책방에서 강연을 하기로 예정돼 있었다. 수민이 받은 메일에는 정중한 어투로 강연 스케줄을 미루거나 취소해야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공교롭게도 같은 날에 교보문고 측으로부터 북토크 행사에 참여해 달라는 제안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원래 그 자리에는 다른 작가가 설 예정이었으나, 그가 일신상의 문제로 급작스럽게 행사에 빠지게 되면서 그녀에게 연락이 간 모양이었다. 그러나 수민의 입장에서는 이미 한 주 전에 이미 인스타그램을 통해 사전신청을 받아 모객을 끝마친 상황이었다. 다시 일정을 조율하고, 신청자들에게 개별적으로 메시지를 돌리고, 경우에 따라 환불처리를 해야 할 과정을 생각하니 머리가 욱신거렸다. 그녀는 애써 치밀어오르는 화를 누르며 답신을 보냈다.

 - 네, 괜찮습니다. 행사 잘 마무리하시구요:) 다음 번에 강연 가능한 일자를 알려주시면 스케줄을 맞춰보고 회신하겠습니다.


 공교롭게도 그날은 영업시간이 끝날 때까지 책이 한 권도 팔리지 않았다. 아주 드문 일은 아니었지만, 이런 날이면 수민은 온몸에 힘이 쭉 빠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나마 오후에 다녀간 대여섯 명의 손님들 가운데 두 명이 커피를 주문해준 덕분에 매출이 아예 '0₩'을 찍지는 않았으니 최악은 면한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수민이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가게에서 나온 시간은 오후 10시를 넘어서였다. 비는 그쳤지만 겨울철의 밤공기는 잇새가 떨릴 정도로 차가웠다. 문단속을 마치고 그녀가 길을 막 나서려던 찰나였다. 그르릉, 하고 어딘가에서 날을 바짝 세운 고양이의 울음소리가 가느다랗게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니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서 커다란 호박색 눈동자 두 개가 이쪽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길고양이였다. 근방의 어둠을 모조리 삼킨 듯이 온몸의 털이 새까맸다.

 평소에 수민은 고양이를 딱히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날은 추위에 홀로 골목 여기저기를 헤매고 다녔을 고양이의 모습이 유독 안쓰럽게 느껴졌다. 수민이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가게 안으로 들어가서 간식거리를 좀 챙겨가지고 나와야겠다고 생각했을 때였다. 꺼져. 고양이가 서 있는 뒤편에서 갑자기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위협적으로 울려퍼졌다. 고양이는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었다.

 바람이 날카롭게 불어 수민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마음속으로 고양이의 안녕을 바라는 것뿐이었다.



* 책방의 이름인 <계속해보겠습니다>는 2014년에 출간된 황정은 작가의 장편소설 제목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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