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책방 I 게으른 정원
서로를 완전히 떠나보내도
무언가는 남아요.
사랑이란 늘 그래요.
최유수 <사랑의 목격>
오늘 무슨 날인가?
왜 이렇게 차가 막히지?
도로에 주차된 이 많은 차들은 또 뭐래?
수많은 인파 속에서 귓가에 스치는 단어, 오일장.
그렇다. 오늘은 이 동네에 오일장이 서는 날이라고 한다.
대형마트와 인터넷 쇼핑에 이미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우리에게 오일장은 그야말로 신선한 충격이었다. 어렸을 때, 할아버지 댁에나 가야 볼 수 있었던 그 오일장을 이렇게 마주하고 있으니 말이다.
아무리 봐도 이상하다.
도대체 여기에 서점이 있긴 한 걸까?
지도 앱을 따라 걸어가는 거리에는 시간이 멈춘듯했다.
영업 중인 상점보다, 임대라는 안내문이 부탁되어 있는 빈 가게가 더 많아 보이는 이곳은 바로 김포의 구시가지 북변동이다.
궁금해졌다.
많고 많은 곳 중에, 왜 이 북변동이었을까?
머릿속에 물음표가 하나씩 더해질 때쯤,
남편은 말했다.
"도착! 여기!"
그리고 내가 답했다.
"응?! 어디??"
그렇다. 여기는 간판이 없다.
도대체 사람들은 이런 숨은 가게를 어떻게 알고 찾아오는 걸까?
당연히 서점은 1층에 있을 거란 나의 고정관념이 깨지는 순간. 올라가는 계단 모퉁이에서 한 문장을 만났다.
"누구나 자기만의 정원이 있다.
내 마음을 빼앗고,
나를 기분 좋게 만드는 것들로 가득한 곳.
그곳에서 우리는 홀로 조용히 상상하고,
생각하고, 마음을 들여다보고 답한다.
현실에서 잠시 벗어나 내면으로 산책하는 공간.
그곳에서의 쉼이, 일상을 살아가게 하는 힘이 된다."
백은영 <다가오는 식물>
아무 생각 없이 왔다가, 한방 제대로 먹은 느낌.
게으른 정원이 그랬다.
현실에서 벗어나, 내면으로 산책하는 공간이라니.
와... 너무 근사한 문장이다.
어느새 이 문장 하나로 기분이 들떴다.
별생각 없이 남편 손에 이끌려 왔지만, 이 공간에서 어떤 경험을 할 수 있을지가 매우 기대됐다. 그리고 이곳의 주인은 어떤 사람일지 상상하며 계단을 하나씩 올랐다.
은은하게 퍼지는 인센스틱의 향 때문인지 몰라도,
한 것 들뜬 기분이 차분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사람으로 따지자면 첫인상이 결정되는 곳.
여기에도 빠지지 않는 것이 있다면, 바로 식물과 문장이다.
계단에서 책방 입구까지 이어지는 공간의 일관성이 꽤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하얀 종이 위로 꾸밈없이 써 내려간 문장에 또 한 번 마음을 빼앗겼다.
"있잖아요.
때때로 사는 게 별로 재미도 없고,
나를 미워하는 사람 때문에 속상하기도 하고,
일은 뜻대로 되지 않고,
되게 팍팍하고 그렇기는 한데요.
그래도 좋은 책을 만나면요.
아내, 내 마음에 드는 한 문장이라도 만나면요.
그래도 마음이 따뜻해져요.
그래서 저는 문장을 나누는 일이 좋아요."
@lazy_garden_
책방을 찾아온 낯선 사람에게 자기 마음을 다 꺼내 보이는 이 사람. 바로 책방의 주인이자, 이 문장의 주인 정원사 차차다. (본인을 정원사 차차라고 소개한다.)
문장을 읽는 것만으로도 그 사람의 이미지가 그려졌는데, 왠지 모르게 소설 속 빨강머리 앤이 떠올랐다. 상상하는 것을 좋아하고, 아름다운 것에 이름을 붙여주는 감수성이 풍부한 소녀 앤.
책방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완전히 다른 공간에 들어온 느낌을 받았다.
생기를 잃은 거리와는 완전히 다른.
그래서 더 빛이 났다.
곳곳에 자리 잡은 크고 작은 식물들은 처음부터 이 공간에 있었던 것처럼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녹아있다. 거기에 따뜻한 느낌을 주는 전구색의 높고 낮은 조명까지 더해져 아늑하고 편안해지는 기분 마저 든다.
20평 남짓 작은 책방이지만, 편히 앉아 책을 볼 수 있는 의자도 제자리에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책을 배치하고 남은 자리에 억지로 끼워 만든 것이 아닌, 자연스럽게 책과 함께 이 공간 전체에 스며들도록 만들어놓은 디테일이 남다르다.
거기에 구도심 뷰를 마음껏 구경할 수 있는 통 창문 자리는 또 다른 재미를 주는 요소다.
동네서점의 가장 큰 매력은 스토리가 있다는 것.
그리고 각 서점마다 제안하는 책이 다르다는 점이다.
대형서점은 어딜 가도 베스트셀러가 비슷하지만, 동네서점은 그렇지 않다.
선택지가 너무 많은 대형서점은 목적을 분명히 하지 않고 가면, 오히려 책을 고르기가 쉽지가 않다. 하지만 동네서점은 그와 반대로 책을 발견하는 재미가 있다. (물론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다.)
그래도, 사랑
따뜻한 말의 온도
나의 밤을 조금 더 따스하게
나의 하루에 시를 한편 엮으면
일을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
정원사 차차가 제안하는 북 큐레이션 문구들이다.
차차가 쓴 문장들을 찬찬히 읽다 보면, 게으른 정원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가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다.
바로 '사랑'이다.
게으른 정원이라는 공간을 만들 때, 가장 큰 영향력을 준 책의 주제 또한 '사랑'이라고 한다.
"책방을 오픈하기 전 일인데요.
이별에 대한 상실감으로 힘든 나날을 보낸 적이 있어요.
이별 앞에서 모든 게 허무하게 느껴졌는데,
이 책에서 그런 말을 하거든요.
서로를 완전히 떠나보내도, 무언가는 남는데요.
사랑은 그런 거래요.
사랑은 남녀 간의 사랑도 있지만,
사랑의 모습은 정말 다양하잖아요.
처음 책방에 오신 분들이 책을 추천해 달라고 하시면,
저는 가장 먼저 이것부터 여쭤봐요."
"혹시, 사랑을 좋아하세요?"
낯간지럽고 부끄러운 사랑과 꿈 이야기를 마음껏 나눌 수 있는 공간의 탄생은 최유수 작가의 '사랑의 목격'으로부터 시작됐다. 그러고 보니 화이트보드에 깨알 같은 글씨로 적어둔 문장도 '사랑'에 대한 글이다.
사랑에 이렇게까지 진심인 공간.
그곳에는 사람이 있었다.
책뿐만 아니라,
책을 든 사람들의 풍경마저도 사랑한다는 정원사.
그래서일까.
게으른 정원의 인스타그램에는 책을 읽는, 책을 고르는 손님들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 종종 올라온다.
"손님들이 이곳저곳에서 책을 꼽아 들어 손에 쥐여 주는 것만으로도요. 이미 영화 속 한 장면이 돼요.
그 모습들이 어여뻐서 저는 카메라를 들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진에 담긴 그들의 모습은 제 각각이지만, 애정을 담아 찍은 사진이라는 것쯤은 누구나 금방 알 수 있다. 누군가를 관심 있게 지켜보고, 그들의 모습을 오랫동안 간직하기 위해 카메라에 담는 것은 모두 사랑의 행동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랑의 행동은 게으른 정원 벽면 곳곳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벽면 한 곳을 가득 채운 문장들은 모두 책방을 다녀간 손님들의 흔적이다.
이름 모를 이들의 낯간지러운 고백과 게으른 정원 그리고 차차를 향한 감사와 응원으로 가득한 문장들. 마치 팬레터를 훔쳐보고 있는 느낌마저 든다. 그리고 그들의 문장은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게으른 정원과 닮아 있음을 느낀다.
"단골손님이 건넨 쪽지에 '제가 갈 곳이 있다는 게 참 행복했어요.'라고 적힌 문장을 보며 뭉클했어요. 제가 외롭다고 생각했던 김포에서 이제는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워가고 있음을 느낍니다."
- 게으른 정원, 김포신문 인터뷰 중 -
누군가에게 마음을 준다는 것은 어쩌면 내게 가장 소중한 공간을 내어주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좋은 책과 문장으로 가꾸어진 정원을 아낌없이 내어주는 일. 참 근사한 일이지 않은가!
이 공간을 오래 기억하기 위해, 개인적으로 게으른 정원을 대표하는 키워드를 선정하여 세 권의 책을 고르고 책방을 나왔다.
#사랑, 최유수 <사랑의 목격>
#성장, 헤르만헤세 <싯다르타>
#다정, 김혼비 <다정소감>
역시나, 사랑이다.
모두 다른 키워드를 가진 책이라고 생각하고 읽었지만, 싯다르타의 성장을 그린 고전소설도 김혼비 작가의 에세이 다정소감도 모두 '사랑'이라는 키워드로 관통할 수 있으니 말이다. (최유수 작가의 사랑의 목격은 말해 뭐해)
참 신기한 경험이었다.
결국, 남은 건 사랑이었으니 말이다.
게으른 정원(@lazy_garden_)
✑운영시간: 금-일요일 12시부터 20시까지
(주3일만 운영해요)
✓ 참고사항
- 인스타그램에서 책방 소식을 확인하고 방문하세요.
- 북토크, 독서모임 등 현재 진행 중인 다양한 프로그램을 확인할 수 있어요.
- 음료가 필요하신 분은 옆 건물 해동 1950 카페를 이용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