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데리크 쇼팽(Frédéric Chopin, 1810. 3. 1 - 1849. 10. 17)은 폴란드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음악에 재능을 보였고 7살 때 폴로네이즈를 작곡할 정도였다. 피아노도 아주 잘 쳤다고 한다. 당시 폴란드 언론은 "천재는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에만 태어나는 줄 알았으나 드디어 우리나라에도 천재가 태어났다!"라며 쇼팽을 치켜세우는 글을 썼을 정도였다.
프레데리크 쇼팽, 사망한 해인 1849년에 찍은 사진.
쇼팽의 첫 스승인 지브니(Wojciech Adalbert Żywny)는 쇼팽의 연주 실력을 보고 아주 열성적으로 가르쳐주었고 쇼팽이 8살 때인 1818년에는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다."라고 쇼팽에게 말하며 쇼팽의 음악 스타일과 연주 스타일을 존중해주고 응원해주었다.
1822년에는 바르샤바 음악원에 입학해 정식으로 음악을 배웠다. 1825년에 음악원을 졸업하고 1828~1829년에는 오스트리아 빈과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연주를 했는데 이때 청중들의 반응이 폭발적으로 좋았다고 한다.
1830년에 다시 오스트리아 빈으로 가게 된다. 그때 쇼팽은 자신이 사랑하던 여인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 여인을 위해 쓴 곡이 연습곡 3번 "이별의 곡"(Etude No. 3, Op. 10)과 피아노 협주곡 1번과 피아노 협주곡 2번이라는 설이 있다. 어찌 됐든 쇼팽은 빈으로 떠났고, 살아생전 다시는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다.
빈에서 연주를 했으나 청중들의 반응은 그렇게 좋지 않았다. 하지만 쇼팽을 눈여겨보고 있던 작곡가 로베르트 슈만(Robert Schumann, 1810 - 1856)이 쇼팽을 "모두 모자를 벗어라. 천재가 등장했다."라고 평하며 극찬했으나 정작 쇼팽은 "슈만이 나를 바보 천치로 만들고 있다."라며 좋아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1831년 빈에서 파리로 여행하던 중 조국 폴란드의 봉기가 진압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당시 폴란드는 러시아의 지배를 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쇼팽은 울분을 터뜨렸고 이때 쇼팽이 연습곡 12번 "혁명"(Etude No. 12, Op. 10)을 작곡했다는 설이 있다.
쇼팽은 파리에서도 힘든 일상을 보냈다. 연주회를 열어도 반응이 그다지 좋지 않아 '피아노를 다시 배울까'라는 생각도 했지만 친구들의 만류로 생각을 접게 된다.
1836년 쇼팽은 독일 드레스덴에서 자기가 사귀었던 친구의 여동생과 약혼까지 했으나 쇼팽은 이 당시에 이미 결핵에 걸려 몸상태가 좋지 않았던 시기였기에 이를 눈치챈 약혼녀의 부모와 친척이 반대해 결국 파혼한다.
그러다 마리 다구 백작부인(Marie D'Agoult, 1805~1876)이 연 파티에서 훗날 자신의 연인이 되는 여인을 만나게 된다. 그 여인은 조르주 상드(Georges Sand, 1804~1876). 당대에 소설가로 이름을 날렸던 사람이자 당시 그리 좋지 않았던 여권 신장을 위해 노력했던 사람이다.
쇼팽은 처음엔 상드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조금씩 상드에게 마음을 열게 되고 그렇게 상드와 사귀게 된다. 하지만 그들도 일반 사람처럼 싸우기도 하고 토라질 때도 많았다. 그렇게 9년에 걸친 연애 생활을 하다 헤어지게 된다.
이후 쇼팽은 제자 제인 스털링의 주선으로 영국에서 연주를 했으나 그리 좋지 못한 반응만 듣고 돌아오게 된다. 그리고 쇼팽의 결핵은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성 십자가 성당에 안치된 쇼팽의 심장. 출처 poland4 weekends
그렇게 계속 힘든 투병 생활을 이어오던 쇼팽은 1849년 10월 17일, 향년 39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쇼팽은 죽기 직전에 누나 루드비카에게 자신의 심장을 폴란드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프랑스 성 마들렌 성당에서 장례식을 치른 후 쇼팽이 폴란드를 떠나면서 은잔에 담아온 폴란드의 흙을 쇼팽의 몸이 묻혀있는 묘에 뿌려주었다. 그리고 유언에 따라 쇼팽의 심장은 따로 적출해 누나 루드비카가 폴란드로 가져오게 되고 바르샤바에 있는 성 십자가 성당에 묻히게 된다.
그렇게 쇼팽은 그토록 그리워했던 고국에 심장이라도 돌아오게 된다.
쇼팽은 다른 작곡가들과는 다르게 거의 모든 음악을 피아노를 위한 곡만 작곡했다. 남들 다 쓰던 교향곡은 한 곡도 없고 오페라도 없다. 하지만 그가 남긴 피아노 음악은 후대의 작곡가들에게 귀감이 되고 피아니스트들에게도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위대한 작곡가를 '피아노의 시인'으로 부른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우는 곡, 피아노 소나타 2번.
쇼팽이 1839년에 완성한 곡으로 발라드 4번과 피아노 소나타 3번과 함께 쇼팽 작품의 정점에 위치해있다고 평가받는 곡이다.
출판되자마자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지금도 쇼팽의 곡들 중에서 잘 알려져 있는 작품이 2번 소나타다. 하지만 음악 전문가들은 그렇게 좋게 평가하지 않았다고 한다. 형식적으로 파격적인 부분이 많아 이해가 잘 되지 않고 악장과 악장이 잘 어울리지도 않다는 평도 있었다. 그래서 쇼팽은 소나타 형식을 잘 다루지 못한다는 평도 받았으나 쇼팽은 걸작 피아노 소나타 3번을 내면서 그러한 의견들을 없애버린다.
총 4개의 악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소나타는 곡의 분위기가 전반적으로 어둡고 침울하다. 3악장은 대놓고 장송 행진곡이니 죽음이라는 테마가 이 곡을 지배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1악장 Grave - Doppio movimento.
2악장 Scherzo. (스케르초, 3박자 계열의 익살스럽고 빠른 춤곡.)
3악장 Marche funèbre: Lento (장송 행진곡)
4악장 Finale: Presto
아마 대중적으로 가장 유명한 악장은 바로 3악장 장송 행진곡일 것이다. 유명인사들의 장례식에서 3악장이 쓰이기도 한다. 그리고 마칭밴드용이나 오케스트라 연주용으로 편곡해 연주하기도 한다.
처음부터 느릿느릿 관을 따라가는 사람들을 표현한 것처럼 슬프고 침통한 주제가 나온다. 중간에 장조로 바뀌며 부드럽고 아름다운 멜로디가 나오나 얼마 가지 못하고 다시 우울하고 슬픈 주제가 나오는 대비 효과를 느낄 수 있다.
나의 평
필자가 이 곡을 처음 들은 건 초등학교 6학년.7년 전에처음 들었다. 그때는 이 장송 행진곡 악장만 엄청 돌려 들었던 기억이 난다. 초6이 살아봤자 얼마나 살았냐고 할 수 있겠지만, 그때까지 살면서 이렇게 슬픈 음악을 들어본 적이 없었기에 세상에는 이렇게 슬픈 음악도 있구나 하면서 장송 행진곡의 매력에 빠졌었다.
그리고 중학생 때부터 전 악장을 듣기 시작한 이후부터 지금까지 전 악장을 듣는다. 그때나 지금이나 1 · 2 · 3악장은 진짜 귀에 잘 들어왔는데 4악장은 예나 지금이나 귀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4악장은 유독 조성적인 느낌이 덜 든다고나 할까? 매우 혼란스럽고 어지러운 분위기의 음들이 정처 없이 방황하다가 마지막엔 강렬한 화음으로 끝나는데, 이게 도대체 뭔가 싶다. 이 곡을 비하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정말 그냥 순수하게 '이게 뭘까?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라는 생각이 든다. 아직까지도 나는 4악장은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쇼팽과 동시대를 살았던 러시아의 음악가 안톤 루빈스타인은 4악장을 두고 "무덤가에 깔린, 울부짖는 바람."이라는 평을 남겼는데 꽤 그럴듯한 평이다.
과연 이 4악장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쇼팽은 이미 무덤 속에서 영원한 잠에 빠져 우리는 그의 해석을 들을 수 없다. 그리고 필자는 아직까지 이 4악장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만약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이 4악장을 이해했다면, 당신의 기억 한 구석에 쇼팽 피아노 소나타 2번이 완벽한 모습으로 자리 잡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