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그너 - 트리스탄과 이졸데 1막 전주곡. 지휘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독일 오페라의 자부심. 리하르트 바그너.
리하르트 바그너, 풀네임 빌헬름 리하르트 바그너(Wilhelm Richard Wagner, 1813. 5. 22 - 1883. 2. 13)는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해에 아버지가 사망해 의붓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그래서 원래 성도 바그너(Wagner)가 아닌 의붓아버지의 성 가이어(Geyer)를 썼었으나 후에 바그너로 성을 바꾼다.
바그너는 모차르트처럼 어릴 적부터 뛰어난 음악적인 재능을 보이진 않았다. 그러나 청소년 시기에 베토벤과 모차르트, 하이든 등 대가들의 음악을 접하고 공부하면서 점점 음악 실력이 늘어났고 18살에는 라이프치히 대학교에 음악학도로 입학해 공부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19살에는 교향곡 C장조를 작곡한다. 베토벤 같은 경우엔 30대에 교향곡 1번을 완성해 세상에 내놓은 것을 생각하면 바그너는 빠른 시기에 교향곡을 썼다.
하지만 바그너는 이 이후로 교향곡이나 피아노 소나타, 실내악 작품 등 오페라를 제외한 다른 음악들은 거의 쓰지 않는다. 혹자는 교향곡과 소나타 같은 장르에선 존경하는 선배 베토벤을 뛰어넘을 수 없다고 판단해서 오페라로 눈을 돌렸다는 얘기를 하기도 한다.
트리스탄과 이졸데 대본. By Wagner라고 쓰여 있는 걸 확인할 수 있다.
바그너는 음악 외에 다른 분야에도 재능이 많았다. 철학, 문학, 건축 같은 분야에 능통했고 관심이 많았다. 일례로 보통 오페라 작곡가들은 대본을 다른 작가들의 대본을 구해서 곡을 입혀 오페라를 만들었지만 바그너는 음악부터 대본까지 바그너 자신이 모두 완성했다.
후에는 자신의 오페라를 상영하기 위한 극장 바이로이트 페스트슈필하우스를 만들고 이 극장에서 자신의 오페라만 상영하는 축제를 구상하고 이루어 냈다. 이 축제가 바이로이트 페스티벌(Bayreuth Festival)로 1876년 바그너 자신의 4부작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Das Ring des Nibelungen) 초연을 시작으로 현재까지도 진행되고 있는 축제다. 그리고 독일에서 가장 큰 음악 축제로 이름 날리고 있다. (여담이지만 필자는 이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 가서 바그너의 오페라를 보는 것이 소원이다.)
바그너는 일생 동안 오페라만 썼다고 할 정도로 많은 오페라를 남겼다. 그의 오페라는 시대적으로 세 개로 나눌 수 있다. 초기, 중기, 말기로 나누며 초기 오페라는 '요정들(Die Feen)', '사랑 금지(Das Liebesverbot)', 그리고 바그너를 세상에 알린 '리엔치(Rienzi)'가 있다. 다음은 중기 오페라, 흔히 '낭만주의 오페라 시대'라고 부르는 이 시기에 만들어진 오페라는 현재 세계적으로 자주 연주되고 있는 바그너의 오페라다. '방황하는 네덜란드인(Der fliegende Holländer)', '탄호이저(Tannhäuser)', '로엔그린(Lohengrin)'이 그것으로 이 세 개의 오페라는 바그너의 오페라 중 가장 대중들에게 친숙하고 많이 상영되는 오페라다. 그리고 대망의 말기 오페라, '악극(Musikdrama) 시대'다. 바그너는 이때부터 자신의 극음악을 오페라라는 이름이 아닌 '악극'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이 글에선 편의상 오페라로 칭하겠다. 이때 쓰인 작품은 오늘 소개할 '트리스탄과 이졸데(Tristan und Isolde)',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Die Meistersinger von Nürnberg)', 4개의 오페라를 다 봐야 내용을 이해할 수 있는 거대한 4부작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Das Ring des Nibelungen)', 바그너 최후의 오페라 '파르지팔'이다.
바그너는 논란이 참 많다. 여성 편력과 반유대주의, 그리고 성격 문제까지 생전에도 이런저런 구설수를 몰고 다니던 사람이다. 여성 편력은 바그너의 사생활이니 제삼자가 관여할 바는 아니지만 바그너의 반유대주의는 지금도 문제가 된다. 바그너는 반유대주의를 주창하는 책을 쓰고 유대인 음악가를 엄청나게 비난했다. 후에 히틀러와 나치가 이런 점을 이용해 바그너의 음악을 나치 선전용으로 즐겨 사용했다. 이 여파로 현재까지도 이스라엘에서는 바그너의 음악이 잘 공연되지 않는다. 바그너의 이러한 행동은 당연히 인종차별로 비판받아야 마땅하다. 하지만 바그너는 유대인 동료들과 제자들과 친분이 있었다. 일례로 그의 제자 헤르만 레비(Hermann Levi)는 유대인이었고 바그너는 유대인인 그에게 자신의 마지막 오페라 파르지팔의 초연 지휘를 맡겼다. 이런 것을 보면 무조건 유대인이라고 배척하는 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이렇게 논란이 많은 사람을 왜 좋아하냐?"라고 묻는 이가 있을 것이다. 답은 간단하다. 바그너의 음악이 그 모든 논란을 덮을 정도로 좋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대에도 바그너 추종자들이 있었다. 혼자서 대본, 작곡, 연출, 건축 분야까지 관여하여 완벽한 작품을 만들어내는 바그너의 모습이 대단하고 범접할 수 없는 사람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리고 말까지 잘했다고 하니 그에게 빠져들고 그를 추종하는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럽다고도 할 수 있겠다.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 트리스탄과 이졸데
바그너가 1865년에 완성한 이 오페라의 당대의 주류 평가는 "음악이 어렵고 난해하다."는 평이 주를 이루었다. 바그너를 지독하게도 싫어했던 클라라 슈만(피아니스트이자 로베르트 슈만의 부인)은 이 오페라를 두고 "내가 지금까지 들었던 음악 중 가장 끔찍한 음악"이라고 말할 정도로 혹평을 가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반면에 극찬을 쏟아내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중 한 명은 우리가 "신은 죽었다."라는 말을 한 사람으로 알고 있는 프리드리히 니체로 자신의 첫 저작인 『비극의 탄생(1872년)』에서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극찬한다. (후에 니체는 반 바그너로 돌아선다.)
이 오페라의 줄거리를 설명하자면,
트리스탄은 과거에 이졸데의 약혼자를 전사시켰다. 그 과정에서 트리스탄 자신도 부상을 입어 신비한 의술로 유명한 이졸데에게 치료를 맡긴다. 하지만 이졸데는 트리스탄의 상처 부위에서 약혼자 칼의 파편을 발견하고 분노에 차 훗날 트리스탄에게 복수하리라고 다짐한다. 그리고 콘월의 마르케 왕이 이졸데와 결혼하겠다며 시중을 들던 조카 트리스탄을 시켜 그녀를 데려오라 지시한다. 그렇게 트리스탄은 배를 이끌고 이졸데를 데려온다. 오페라는 이졸데를 데려오는 트리스탄의 배에서부터 시작된다. (오페라를 보기 전에 꼭 알아야 할 줄거리)
콘월 왕에게 결혼하러 오는 이졸데를 콘월 왕의 조카 트리스탄이 마중 나온다. 이졸데는 시녀 브란게네에게 말해 트리스탄에게 자신의 시중을 들라고 시켰으나 트리스탄이 거절한다. 이에 화가 난 이졸데는 트리스탄에게 독약을 마시게 하고 나도 독약을 마셔 죽겠다며 독약을 시녀에게 준비시킨다. 시녀는 독약 대신에 사랑의 묘약으로 바꿔치기한다. 이윽고 트리스탄이 사랑의 묘약을 마시고 이졸데가 잔을 가로채 나머지를 전부 마셔 버린다. 독약이 아닌 묘약을 마신 이졸데의 증오와 원망이 갑자기 사랑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똑같이 묘약을 마신 트리스탄도 이졸데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마르케 왕의 궁전에서는 이졸데가 격정을 참지 못하고 트리스탄과의 사랑을 준비한다. 두 사람이 같이 있는 모습을 왕과 왕의 부하 멜로트에게 들키고 분노한 멜로트가 트리스탄을 공격해 트리스탄은 중상을 입는다. 중상을 입은 트리스탄은 부하 쿠르베날과 함께 자신의 고향에 있는 성으로 이동한다. 성에 도착한 트리스탄은 몸의 상처가 점점 악화되어가고 있었고, 그의 의식은 오락가락하지만 항상 이졸데를 그린다.
이졸데는 급히 트리스탄이 있는 성에 도착한다. 이졸데를 본 트리스탄은 이졸데를 힘껏 끌어안고 죽게 된다. 그리고 뒤이어 배 한 척이 도착하는데, 마르케 왕과 멜로트가 타고 있는 배였다. 트리스탄과 함께 있었던 트리스탄의 부하 쿠르베날은 멜로트와 마르케의 수행원들과 싸워 멜로트와 수행원들을 죽이고 자신도 중상을 입고 사망한다. 뒤이어 나온 마르케 왕은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사랑이 묘약 때문이란 걸 알게 되어 그 둘을 결혼시키기 위해 이곳으로 온 것이라 말하며 트리스탄과 쿠르베날이 죽은 것을 알고 안타까워한다. 이졸데는 정신을 잃고 쓰러져 트리스탄의 시신 위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오늘 소개할 음악은 이 오페라의 1막 전주곡이다. 본래 오페라가 시작할 때 나오는 첫 음악을 '서곡(Overture)'이라고 칭하나 사람들이 예전부터 바그너에게 "서곡에서부터 오페라의 주요 내용을 다 알려준다."라는 지적을 하곤 했다. 바그너는 그러한 여러 지적들을 받아들여 전작 로엔그린부터 서곡이 아닌 '전주곡(Vorspiel)'을 도입했다. 이 전주곡은 명확하게 끝나지 않고 그대로 본 음악으로 넘어간다.
처음 음악을 들으면 "이게 뭐지?" 싶을 것이다. 첼로가 멜로디를 이어가나 싶더니 갑자기 목관이 연주하는 애매모호하고 이상한 화음(영상 기준 00:10. 일명 '트리스탄 화음'이라 칭하는 이 화음에 대한 설명은 후술.)이 나와 청자들의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만든다. 그리고 이 이후로 나오는 멜로디는 몽롱하면서도 정말 아름답다. 그러나 그 속에는 혼란스럽고 비통한 분위기가 숨어있다. 그렇게 계속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멜로디가 이어지다 저 애매모호하고 이상한 화음이 다시 튀어나와 클라이맥스를 이루어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조용히 가라앉는다. 그렇게 10분 가까이 이어지던 혼란은 조용한 분위기로 바뀌며 공연으로 이어진다.
필자가 말한 애매모호하고 이상한 화음은 훗날 현대음악의 시작이라고 말할 정도로 서양음악에서 중요하게 평가받는다. 아래 악보 사진을 함께 보자.
빨간 네모 안에 있는 화음이 필자가 설명하려는 그 애매모호하고 이상한 화음이다. 상술했듯이 일명 '트리스탄 화음'으로 불린다.
일단 보통 음악가들이 내리는 분석은트리스탄 화음 같은 화음 형태는 보통 곡이 진행하고 있을 때 다른 화음으로 넘어가기 위해 쓰이는 화음인데, 당연히 이렇게 곡 첫머리에서부터 사용한 적은 거의 없었다. 즉, 이 전주곡이 처음이라고 봐도 된다. 바그너는 당시에 곡의 시작에서부터 나오리라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화음을 패기 있게 쓴 것이다.
그래서 오페라가 나오고 나서 당대 음악가들도 저 트리스탄 화음에 대해 엄청나게 놀랐다. 뭔가 조성적인 것 같은데 아닌 것 같은 당최 저 화음을 쓴 이유를 음악학적으로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혹시나 저 화음에 대해 화성학적으로 궁금해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생각해서(그런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싶지만.) 화성에 대한 설명을 하자면, 보통 저 화음의 G#음을 전타음(Appoggiatura. 계류음과 같은 형태로, 강박에서 불협화를 이루다 2도 하행해 협화로 해결되는 음으로 하행하지 않고 상행해 해결하는 경우가 있다. 그 상행하는 경우가 바로 이 1막 전주곡이다.)으로 봐서 이 화음을 프랑스 6화음으로 분석한다. 프랑스 6화음 같은 증6화음은 일반적으로 5도(딸림화음)로 진행해 해결한다. 그래서 저 트리스탄 화음 다음 마디가 일단 5도로 진행되기 때문에 보통은 이 화음을 프랑스 6화음이라고 분석한다. 근데 5도로 해결이 되었는데도 뭔가 깔끔하지 않은 게 이 곡의 특징이다. 그래서 이 화음 분석이 어려운 것이다.
또 다른 분석으로 저 G#음을 전타음으로 보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엔 6도의 2# 4 6#으로 분석하기도 하고 나무위키에 실려있는 예를 가져오자면,
출처 나무위키, 트리스탄 화음 문서
이렇게 G#음을 화성음으로 보고 A음을 경과음(Passing Tone, 화성음 사이를 순차적으로 지나가는 음)으로 분석하기도 한다.
이렇게 음악 전공생부터 학자들까지 저 화음에 대한 분석은 가지각색이다. 일단 필자는 저 화음을 프랑스 6화음으로 보지만, 필자의 또 다른 생각으로는 아예 저 화음은 해석이 불가능한 화음이라는 생각도 든다. 어떻게 보면 정말 뜬금없이 나온 이 화음을 분석하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단순히 이 오페라의 비극적인 분위기를 표현하기 위해 바그너가 무심히 휘갈긴 아무 의미 없이 적은 화음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찌 됐든 바그너의 트리스탄 화음은 후대 작곡가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후에 등장하는 현대음악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받는다.
음악적인 지식이 아예 없는 독자는 저 위에 쓰인 화성 분석 글은 무시해도 된다. 그저 평소에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던 것을 바그너는 당당하게 시도해 음악계에 영향을 주었다 정도로만 알아도 된다.
여기서 우리는 바그너가 저런 화성을 씀으로써 음악을 작곡하는 데 있어 더 많은 가능성을 찾으려 했다는 것과 이런 식으로도 곡을 쓸 수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려줬다는 것에 대해 그의 혁신성과 용기에 박수를 보내야 한다 생각한다.
나의 평
처음에 이 곡을 들었었을 때, 바그너의 음악을 들으면서 처음으로 '듣기 싫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 애매모호한데 해결도 제대로 안 되고 방황만 하는 이 곡의 분위기가 처음 들었을 때는 익숙지 않아서 그런 것 같다. 물론 지금은 그냥 틈만 나면 듣는 오페라 서곡과 전주곡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최애 곡이다. 그 애매모호하고 해결이 되지 않아 곡이 산으로 가는 분위기가 너무나도 매력적이고 중독성 있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언젠가 이 전주곡에 익숙해졌다 싶으면 꼭, 트리스탄과 이졸데 오페라를 봐라. 필자가 바그너의 오페라 중에서 제일 좋아하는 오페라로 지금도 가끔 생각날 때보다 꼬박꼬박 챙겨본다. 오페라 내내 흐르는 바그너의 음악과 슬픈 사랑 이야기가 당신의 마음에 감동을 안겨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