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비정한 폭군이다. 그것은 불수의적인 한계상황을 맞닥뜨리게 함으로써 우리에게 인간 존재로서의 유한성에 대한 자각을 강제한다. 내가 도저히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실존적인 벼랑 끝에 서게 되는 것이다. 마치 느닷없이 나의 가족 가운데 누군가가 몹시 아프게 된다던지, 나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사람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게 된다던지. 그럴 때마다 '내가 그래도 꽤 단단하고, 그럴싸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오만이었구나. 언제든지 허무하게 무너질 수도 있겠구나.'와 같이 낙담하며 느꼈던 쓸쓸함이 제법 크다. 백지 상태로 돌아간 것만 같은 무력과 공허. 적어도 모호함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인 채 살아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었으니 모든 것이 무의미했던 것은 아니라며,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현한 삶에 대한 명징한 인식을 얻기 위한 노력은 계속되었다. 이전의 것과 비슷한, 아니 전혀 다른 시련이 찾아오더라도 그 전만큼은 흔들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혼자서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기도 했고, 책 속에서 해답을 찾아 헤메기도 했으며, 누군가를 붙잡고 토해내듯 가슴 속에 있는 것들을 내뱉기도 했다. 이러한 인고의 시간 끝에 결국 느낀 것은, 나를 든든하게 지켜줄 것이라 믿었기에 그토록 애집하던 것들이 실상은 그렇게 소중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이었다. 재물과 명예, 병적 자부심, 그릇된 신념, 인간관계에의 집착 등. 더 큰 세계를 향해 나를 개방하기 위해서는 바로 그러한 것들과 결별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즈음부터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내 안의 무엇을 떠나보내고 무엇을 맞이해야 하는지, 나는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기록하고 싶었다. 깊은 산 중에서 길을 잃지 않으려면 지도와 나침반을 자주 들여다보아야 하는 것처럼, 삶의 여정 속에서 길을 잃지 않기 위해 고뇌한 것들에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고자 애썼다. 그리고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쓰기란 행위를 통해 스스로에게 다짐한 것들을 삶 속에서 살아내고자 이렇게, 또는 저렇게 노력했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산다는 것은 결코 농담이 아니니까. 삶은 진심을 다해 살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니까.
듣거나 말거나 자꾸 외치고 글을 쓰는 까닭은 무엇인가? 스스로 길을 찾기 위해서다. 세상에 설득당하지 않기 위해서다. 어딘가에서 길을 찾는 이들에게 여기도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다.
<버릴수록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들, 김기석> 中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은 거친 파도가 지배하는, 속을 알 수 없는 검은 바다같다. 이 곳에 아무런 생각없이 나를 내던졌다가는 영혼의 존엄을 잃어버리기 십상이다. 그래서 나는 이 곳에 글쓰기라는 삶의 닻을 내리우기로 했다. 스스로의 삶을 근본에서부터 수시로 돌아보는 훈련을 하자는 것이다. 삶을 더욱 크고 넓은 세계 속에서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이 필요함을 깨닫고, 새로운 눈을 떠야만 한다. 이전에 바라보던 방식이 아닌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위함이다. 그래서일까. 나는 무심한 듯 반복되는 삶 속에서 끊임없이 고민한 사유의 흔적이 촘촘히 박혀있기에, 강렬한 한줄기 섬광을 번뜩 발할 수 있는, 그런 글을 쓰고 싶다.
내가 소설을 쓰는 이유를 요약하자면 단 한 가지입니다. 개인이 지닌 영혼의 존엄을 부각시키고 거기에 빛을 비추기 위함입니다. 우리 영혼이 시스템에 얽매여 멸시당하지 않도록 늘 빛을 비추고 경종을 울리자, 이것이 바로 이야기의 역할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曰
산다는 것은 농담이 아니다.
진심을 다해 살아야 한다.
한 마리 다람쥐처럼
사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을 만큼
산다는 일이 가장 중요한 일이 될 만큼.
산다는 것은 농담이 아니다.
진심을 다해 삶에 다가가야 한다.
두 손이 뒤로 묶이고
등은 벽에 밀쳐진 것처럼 절실하게,
어느 실험실 같은 곳에서
흰옷과 보안경을 걸치고
전에 한 번도 만난 적 없고 얼굴도 모르는
그 누군가를 위해 죽어야 하는 것처럼 절실하게,
비록 살아 있는 일이 가장 사실적이고
가장 아름다운 일임을 잘 안다 해도.
진심을 다해 살아야 한다.
일흔 살이 되었어도 올리브 나무를 심을 만큼,
후손을 위해서가 아니라.
죽음을 두려워하긴 하지만
죽음을 믿지 않기 때문에
살아 있다는 것이
죽음보다 훨씬 소중한 일이기 때문에.
<산다는 것에 대해, 나짐 히크메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