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시에서 이야기하듯이, 사람이 온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의 일생 자체이자, 결코 가볍지 않은, 아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중대하고도 크나큰 그 무언가이다. 그러니까 그 무언가를 들쳐메고 떠나는 모험은 분명 고되고 험난할 것이다.
이 모험은 출발하고 난 뒤에는 함부로 그만둘 수 없으며, 결코 그래서도 안된다. 그렇게 행동한다는 것은 스스로의 감정에 대한 자기기만이며, 상대방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줄 수도 있는 굉장히 무책임하고도 비인간적인 것을 뜻하니까.
나는 이 모험에 응당 자유와 책임이 공존해야만 한다고 믿는다. 여기서 자유란 내가 그 사람 안에서 온전히 나의 모습 그대로 존재하며, 나에 대한 그의 신뢰와 사랑 안에서 더 많은 것들을 나의 의지와 바람대로 할 수 있다고 느끼는 기분 좋은 설레임 같은 것이다. 책임은 내가 이 사람을 거대한 나의 일부로 받아들임으로써 내가 마땅히, 그리고 기꺼이, 행복한 마음으로 그에게 다해야 하는 의무와 본분을 의미한다.
그러나 책임은 부차적인 것이다. 본질적으로 우선, 나는 그를 만남으로써 자유롭다고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감정으로부터 말미암아 그에게 책임을 다하고자 하는 마음이 내 안의 깊은 곳에서부터 진실되게 우러나야 한다고,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나란 사람은 자유로부터 비롯되는 책임에 대해서는 늘 망설일 수 밖에 없는가보다. 책임은 자유보다 자신하기 어려운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책임이 결여된 자유만을 추구하는 관계는 오히려 서로를 옭아매고 구속하며, 상대의 마음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워지게 한다는 것을 이전의 삶을 통해서 너무나도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에. 게다가 솔직히 나는, 이제는 괜찮은 척, 아무렇지 않은 척 하며 살아가지만, 여전히 과거의 상처로부터 온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말자고 스스로에게 수없이 되뇌었다. 어쩌면 그래서 겁쟁이가 되어버렸고, 더욱 조심스러워졌으며, 본성보다는 이성의 힘을 믿으며 살고자 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스스로에게 온갖 울타리를 만들어 놓고 그 속에 나의 삶을 가두며 유적(流謫) 중인 것은 아닐까? 마르틴 부버가 말했듯이, '나-그것'의 관계로부터 벗어나 '나-너'의 관계로 나아가야만 한다.
근원어 '나-너'는 오직 온 존재를 기울여서만 말해질 수 있다.
온 존재에로 모아지고 녹아지는 것은 결코 나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나' 없이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나'는 '너'로 인하여 '나'가 된다.
'나'가 되면서 '나'는 '너'라고 말한다.
모든 참된 삶은 만남이다.
<나와 너, 마르틴 부버>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