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직카펫 매거진 Vol 6. 오혜재 님
오혜재 님의 인터뷰는 'Part2. 시스템 밖 독학 예술가'에서 이어집니다.
https://brunch.co.kr/@piuda/26
우리는 여러 개의 자아를 가지고 있잖아요. 혜재 님은 스스로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제가 얼마 전에 석사과정을 마쳤어요. 이화여대에서 영문학으로 학사를 받았지만 석사는 다문화상호문화협동과정이라는 곳에서 밟았어요. 제가 지금 일하는 곳이 국제기구고 거기가 문화다양성이라던가 상호 문화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올 수밖에 없기 때문에 저는 그쪽에 또 관심이 갔고 더 공부하고 싶었어요.
그 학과에서 항상 강조하는 게 뭐냐면 제가 외국인이 아니라 한국에서 나고 자랐다 하더라도 나는 정체성이 굉장히 많다는 거예요.
예를 들면 제가 학교에 있음 학생이고 회사에 있음 회사원이고 집에 가면 딸이 될 수도 있고 내가 외국에 가면 외국인이라는 정체성도 있을 거고요. 정체성은 수시로 바뀌고 굉장히 다양하고 그건 가변적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그걸 너무 모르죠.
저희 과에서 항상 배우는 게 한국은 굉장히 폐쇄적인 사회라는 거예요. 남한테 열려있지 않아요. 외국인이 아니라 한국인들끼리도 정체성을 못 받아들이는 경우도 있고요. 그 정체성의 다양성 요인은 다양하죠. 정치, 종교, 출생지역처럼 다양한데 그런 면에서 볼 때 저의 정체성도 수시로 바뀌기도 하고 스스로 만들 수도 있고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도 발전시킬 수 있다고도 생각해요.
그럼 현재 시점의 혜재님에게 중요한 자아는 무엇인가요?
가장 중요한 건 제 첫 번째 전시회의 제목이기도 했던 'Ms. Worldwide’.
그 말인즉슨 제가 한국사람일 뿐만 아니라 세계 속 구성원이라는 것. 어떠한 편견이나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이 지구라는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 일부분으로 살아가는 생명체라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런 제목을 뽑은 것이기도 해요.
전 그 정체성이 저에게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게 제 어떤 작품에도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고 석사과정을 문화적 다양성에 대해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고요.
만약 문화적 관점에서만 말하자면 저는 동양인이지만 제가 서양의 것을 충분히 수용하고 동양과 접합해서 또 하나의 새로운 문화를 창조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요즘 제 인생에 있어서 그 정체성이 가장 중요하게 부각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렇기 때문에 제가 미술작품 외에도 지금까지 책을 두 권 냈는데 그중 하나가 다양한 정체성으로 인해 시너지가 나오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책이에요. 그것도 지금의 저의 이런 생각에서 비롯한 거죠.
그럼 'Ms. Worldwide’라는 정체성을 다양한 방법으로 표출하는 중인 거군요. 그럼 이야기가 나온 김에 글에 대해 이야기해볼까요? 글 쓰는 사람이라는 것도 언니의 직업리스트에 넣을 수 있을까요?
그렇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글 쓰는 걸 좋아해서 어디에 기고하는 건 많이 했던 것 같아요. 학생 때도 학보사에 신청해서 글을 쓴 적도 있었고 기자를 꿈꿀 때는 인턴기자로서 기사 쓰는 것도 즐거웠고요.
그러나 고 나서 한동안은 보고서 같은 글 외엔 쓸 일이 별로 없다가 어느 순간 제 생각을 좀 글로 정리할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던 찰나에 아는 분이 전자책 출판사를 하는데 그곳에서 유네스코와 관련된 책을 써보자 해서 첫 번째 책 <유네스코 70년사: 23가지 키워드로 읽는>을 발간했어요.
그때는 특별한 생각 없이 썼는데 그걸 쓰고 나니까 글에 대한 욕심도 많이 생겼던 것 같아요. 왜냐면 그림이랑 마찬가지로 글도 자기의 정체성이나 생각을 표현하는 중요한 수단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리고 제가 영문학을 전공해서 글이 주는 힘, 표현 하나하나, 문장의 구성, 단어를 어떻게 선택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그 힘을 저도 충분히 경험했기 때문에 글에 대한 애착도 많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석사과정 중에도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다가 조그맣게 소논문처럼 써놓은 글이 있었는데 그걸 발전시켜서 올해 초에 두 번째 책이 나왔어요.
그게 북저널리즘에서 나온 <미국의 우상이 된 쿠바인, 핏불>이죠?
네. 한국 사람들이 핏불(Pitbull)을 많이 알지는 잘 모르겠지만 음악을 들으면 다 알 거예요. 그분 자체를 모른다고 해도요.
부모님이 쿠바 이민자라 그분은 쿠바계 미국인이에요. 이분은 자기가 쿠바를 가보진 못했고 들어서 아는 것밖엔 없었어요. 부모님이 어릴 때부터 가르쳐서 스페인어는 하죠.
솔직히 이 사람 입장에서 쿠바에 갈 일도 없고 미국인으로 살면 그만인 건데 쿠바인의 정체성을 단 하나도 버리지 않았어요. 이 사람은 미국인, 쿠바인으로서의 정체성 비중이 똑같다는 거예요. 자신의 음악으로 그 정체성을 풀어내는데 아주 탁월한 사람이라고 전 생각해요.
저는 이 사람의 음악이 담고 있는 철학과 마케팅 전략에 대해서 분석했고 그게 책으로 나온 거죠.
중요한 건 한국도 이주민이 늘어나고 다문화사회가 되어가고 있다는 거예요. 그런 상황에서 내 정체성, 이제 외국에 나가 사는 경우도 많으니 그런 경우 나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나는 누구이고 내가 이 자리에서 어떤 사람으로서 어떤 정체성을 가질 것인가는 어떻게 보면 현대인으로서 평생 동안 해야 되는 고민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 정체성에 대한 고민의 결과를 어떻게 도출하느냐에 따라 핏불처럼 엄청난 부를 거머쥘 수도 있는 거죠. 단순히 그 사회에서 잘 사는 정도가 아니라 아이콘, 거부가 될 수도 있는 거죠.
이 책의 내용을 하나 이야기하자면 핏불은 항상 노래를 영어 버전, 스페인어 버전을 내요. 물론 제니퍼 로페즈 같은 라틴계 가수들도 그렇게 했지만 핏불은 더 나아가서 한 곡 안에 영어와 스페인어가 섞여 있고 우리로 치면 추임새로 나오는 말들이 모두 자기 삶을 함축적으로 담고 있어요.
예를 들면, 쿠바계 이민자들이 사는 빈민가 중에 예를 들어 305번가에 살았다면 305를 계속 음악 중간에 외친다던가 스페인어 추임새를 한다던가. 그리고 이 사람이 자기를 'Mr. Worldwide'라고 표현해요. 제가 추구하는 'Ms. Worldwide’랑 비슷하잖아요. 저도 이 분에게서 영감을 많이 받았어요. 쿠바에서 난민들이 탈출하는 항구 이름을 쓴다던가 굉장히 부모님, 할머니, 할아버지의 역사도 담아내요.
더 나아가서 다른 나라의 정체성도 십분 활용해요. 협업을 잘하는 가수로도 유명한데 라틴계 외에도 인도나 모로코 가수처럼 우리가 잘 모르는 국가의 가수들과도 해요. 아랍계 가수와 협업을 하면 그 노래 자체를 모두 아랍계 노래로 만들고 가사도 로컬을 그대로 담아요. 상대 가수가 영어가 아니라 자기 나라 말로 노래하도록 하고요.
음악에 대해 호불호는 있을 수 있어요. 제가 음악평론가가 아니니 그 부분에 대해 깊이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이 사람의 가치관 사고방식, 음악적 스타일로 봤을 때는 충분히 높게 평가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혜재 님 졸업사진 촬영 때 인도에서 사 온 옷 입고 찍었던 것 기억나요? 미대에서 그런 친구들을 보긴 했는데 인문대에선 혜재 님이 최고라고 생각했어요
대학 때 인도 다녀오고 나서 2-3년간은 인도에 빠져 지냈던 것 같아요.
예전부터 한국인이라는 카테고리가 이 사람을 설명하기엔 부족할 수 있다고 생각했었어요. 어릴 때부터 'Ms. Worldwide’라는 정체성을 의식하고 살았던 거예요?
네. 항상 저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아이러니한 건 전 외국에서 산 적이 없다는 거예요.
전 그 부분이 예전부터 늘 신기했어요.
한국에서 살았고 영어도 정규과정으로 배웠고요. 물론 지금 회사가 영어를 많이 쓰고 국제교류 관련된 일을 하긴 하지만 적어도 제가 교육을 받는 동안 해외를 경험할 기회는 없었어요. 대학교 3학 때가 인도를 간 게 저의 첫 해외 경험이었어요.
하지만 그냥 한 마을, 지역, 국가에 속한 사람으로만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강했던 것 같아요. 아버지 영향이 컸던 것 같은데 아프리카를 상대로 무역을 하셨는데 아프리카로 나간 우리나라 사람 1세대셨어요.
지금도 쉬운 길은 아니지만 그때는 비행기를 세네 번 갈아타야 갈 수 있는 곳이었고요. 아버지가 다녀와서 해주신 이야기도 많았고 그곳에서 사오신 것도 많았어요. 그러면서 아프리카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씀하신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어요. 아버지 이야기를 들으면 아프리카는 너무나 이국적인 곳이고 내가 가보지 않았지만 신비로운 세상, 또 다른 세상이란 생각이 들었고 막연한 동경이 생겨서 굉장히 긍정적으로 제 머릿속에 남아있어요.
제 그림도 보면 아프리카의 자연, 패턴에서 영향을 받아서 강렬하면서도 아름다운 색깔로 표현한 그림들이 있어요. 그런 부분도 어릴 때 기억의 영향을 받아서가 아닐까 해요. 확실히 그런 어릴 때의 추억이 있었기 때문에 회사에서 아프리카로 출장을 갔을 때도 아프리카가 굉장히 긍정적으로 다가왔던 것 같아요.
혜재 님에겐 그렇게 영향을 주는 사람들이 명확히 있는 것 같아요. 예를 들면 안젤리나 졸리. 예전에 혜재 님 미니홈피에 엄청 많은 안젤리나 졸리의 사진이 올라왔던 기억이 있어요.
그분도 사실 편하게 살 수 있는 사람이었어요. 아버지도 유명하고 어머니도 모델이셨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집안은 아니었어요. 물론 부모님의 이혼 같은 문제는 있었지만 어떻게 보면 특혜를 많이 받은 사람인 거죠.
본인도 많은 돈을 벌었지만 거기에서 만족하지 않고 굉장히 힘든 곳에 가서 사람들을 만나고 부대끼고 힘들지만 험한 도전을 하면서 본인의 가치를 찾아나갔던 사람인 거 같아요. 그렇기 때문에 그분한테 영감을 많이 받았고요.
스스로 정체성을 찾기 위해, 내가 누구인지 알기 위해서 사람들을 만나고 도우면서 자신을 완성해간 사람이라고 기억해요.
앞으로 더 해보고 싶은 것 있어요? 본인을 표현하는 수단을 많이 가진 사람이잖아요.
제가 전시회는 세 번, 책은 두 권을 냈는데 어떻게 보면 이제 시작인 것 같아요. 지금 가장 손쉽게 이용할 수 있는 수단은 그림과 글인 것 같아요. 앞으로 매체란 건 계속 발전하고 새로운 게 나오니까 다른 도구를 활용할 수도 있겠지만 결국 저의 생각과 감정, 지식을 남들과 더 많이 공유하는 게 목표인 거 같아요.
제가 특별한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나도 평범하게 사는 사람 중 하나인데 그래도 내가 스스로에 대해 생각하고 고민하는 것을, 저랑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들에게 공감을 할 수 있도록 전하고, 괜찮다면 위로도 될 수 있는 그런 기회가 생기면 너무 행복할 것 같아요.
대학 시절, 광화문역 안의 긴 환승통로를 함께 걸으며 보았던 언니의 빠른 걸음걸이를 기억한다. 2015년 첫 전시회 이후 지금까지 언니의 4년을 보아도 그렇다.
그렇게 빠른 걸음으로 직접 갤러리를 돌며 자신의 도록을 전했을 언니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주어진 시간을 좀더 열심히 사는 사람. 그런데 이 바쁨이 난 보기 좋다. 생명력 같기도 하고 혼잡한 세상 속에 자신을 더 선명하게 지켜내려는 마음 같기도 해서.
첫 전시회 이후로는 이런저런 이유로 전시회를 못 들렀지만 다음 전시회는 꼭 챙겨야지. Ms. Worldwide는 그때쯤엔 또 어떤 그림세계를 보여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