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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드해리 Jul 24. 2023

12. 내 안에 죽은 언어를 되살리고 있습니다.

만 나이로 어려진 지금 ‘잿더미’를 뒤지고 있습니다.

얼마 전 공식적으로 만 나이 시행되며 어려졌습니다. 매일 16시간 이상 일만 하며 지냈습니다. 기적 같은 일들도 많았지만 아주 사소한 일상에는 자극을 느끼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날카로운 송곳은 둥글둥글해졌습니다. 일에서 보람을 느끼는 동시에 점점 일만 하는 좀비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일 무서운 건 내 안에 있던 불씨들은 사그라진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이제는 외부 자극에도 무뎌지는 기분이 들더니 이렇게 만 나이를 불쏘시개로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나이가 어려졌다. 여하튼 한 살이라도 줄었다. 만 나이 시행은 아주 작은 불씨지만 나름대로 부채질만 좀 해주면 마른 낙엽이라도 불을 붙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좋아, 기회는 지금이다!


몇 주간 더 열심히 하얗게 불태웠습니다. 바람에 흔들리지만 흔들흔들 살아있는 불씨를 살려내는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밀어붙였습니다. 덕분에 초인적인 힘을 내서 책임감을 요구하는 일들은 거의 마무리되었습니다. 차츰차츰 지금까지 살려둔 그 작은 불씨를 돌아볼 여유가 생기더군요.


그렇게 오랜만에 맞이한 아침의 여유. 첫날에는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시간은 좀 생겼는데 좋아요 싫어요 뭐 이런 것도 없고, 무엇을 먹고 싶다 하고 싶다 이런 생각도 없었어요. 그때 떠오르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우리 동네 피부과 원장님이었습니다. 그동안 제가 봐온 선생님 중에서는 조금 특이한 분이세요.


몇 개월 전이었는데요. 원장실에서 상담을 받고 있었습니다. 한참 대화를 주고받을 때 원장님 자리 뒤편 책장에서 의학서적이 아닌 책들이 쌓여있는 걸 발견하였습니다. “선생님, 무슨 책들이에요?” “아, (병원에) 사람이 없을 때 보려고 산 책이에요.” “오호 이런 장르 소설을 좋아하시는 줄 몰랐어요!” 한때 책 구매비 좀 내 본 사람으로서 반가웠습니다.


이 기억이 떠오를 때 그냥 손에 잡히는 책을 집어서 아무 페이지나 펼쳐 읽었습니다. 시간이 좀 필요하겠더라고요. 좀비처럼 일하던 내가 서열 2위로 가려면 기다려야 했습니다. 억지로 밀어낼 수 없어요. ’오늘부터 다시 진짜 나 자신으로 살아갈 거야‘ 이렇게 말한다고 그 즉시 살아나지 않다는 걸, 이번에 배우고 있습니다.


그렇게 첫째 날이 지나가고 둘째 날이 되었어요. 이 날은 종이에 무엇이든 쓰느라 바빴습니다. 그냥 생각나는 대로 썼습니다. 소거법을 이용했죠. 예를 들어, 하고 싶은 일을 찾기 위해서 ‘하기 싫은 일’들을 적었습니다.

그리고 현재 나의 모든 것을 파악하려고 손에 잡힐 정도로 구체적으로 적었습니다. 그러니까 저한테 하는 질문도 조금씩 달라졌습니다. ‘아무 생각도 안 나. 아무 감정도 없어.’에서 ‘현실은 이렇고 저렇고 그러니, 어떻게 이것도 저것도 챙기면서 할 수 있을까?’ ‘내가 놓치고 있는 게 있을까?‘ ’ 머리가 팽팽 돌아가고 있을 때는 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하지 않는 건 뭐지?‘


이런 식으로 며칠이 지나고 7월 24일 월요일이 되었습니다. 이미 죽은 언어를 살리고 있습니다. 만 나이 시행으로 어려졌지만 ‘나’라는 잿더미를 뒤지는 일은, 기업 광고에나 나올 법한 희망찬 멜로디보다, 현실은 오글거리고 부끄러울 때가 훨씬 많습니다.


내 안에 죽은 언어를 되살리며 어디쯤 왔냐 하면, ‘몇 년 전 하고 싶었던 것’ 가까스로 떠올린 수준입니다. 모두 잿더미인 줄 알았더니 막대기로 뒤적뒤적 휘젓고 있으니까 아주 아주 작지만 살아있는 불씨도 있었네요.


그래서 나는 좀비처럼 살았던 시간을 헛되게 날린 걸까요? ‘하고 싶었던 것’만 있을 때랑 달라진 게 있다면, 지금까지 관련이 없어 보였던 것들이 전문가 수준은 아니지만 ’하고 싶었던 것’을 시작할 수 있는 기초는 되어 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세상에. 아주 관련이 없던 건 아니었다는 거죠. 이 글을 쓰면서 불을 키울 수 있는 나무장작을 발견한 것 같아 기쁩니다.



지금은 결과를 낸 것이 아니고 내 안에 죽은 언어를 살리는 과정에 있으니, 구체적인 무언가를 말씀을 드리기는 어렵지만 한 가지 확실하게 배운 것은 있습니다.


내 안에 죽은 언어를 살리는 작업은 절대 빨리 해낼 수 없습니다.

심지어 몇 년이고, 꽤나 오래 걸릴 수 있겠다 싶습니다.


이거 하나 (내 안에 죽은 언어를 되살리는 일은 굉장히 오래 걸릴 수도 있다) 확실히 알겠습니다.

저는 지금 내 안에 죽은 언어를 되살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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