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노마드해리 Sep 24. 2023

20. 지족 있는 삶 , 사각사각 라이프

새소리 물소리 자연소리 있음 , 컴퓨터 스마트폰 없는 지족 -적 하루

오후 2시


창덕궁 인근 카페에서 글을 쓰고 있습니다. 오전 취재하고 사색하고서 오후 창덕궁 근처 카페에서 한숨을 돌립니다. 사각사각 글자들이 흰 종이에서 춤을 추고 있습니다. 


왼편 맞은편 테이블에서는 외국인 관광객 커플이 보이고, 배낭을 메고 있는 것으로 보아 한국에 배낭여행 왔나 보다 싶은 사람 2명이 뜨거운 머그잔 커피를 마시고 있습니다.


케이크 진열장 뒤로 가려진 테이블에는 업무적 내용이 오갑니다. 창 밖에는 종로 01번 초록색 마을버스가 지나갑니다. 드나드는 손님이 적으니, 또는 각 테이블 손님이 주문 음료를 모두 받았다는 걸 확인하고, 그 테이블에 카페 주인도 합류합니다. 아마도 아는 사이인가 봅니다.


맞은편 테이블에는 헤드셋을 끼고 무언가 열중하는 사람이 보입니다. 스마트폰과 노트북 사이를 오가며 바삐 손이 움집입니다. 웹소설 작가님 이신가? 이 카페에 예술하시는 분들이 많이 오시는 건 알고 있는데..


오후 3시


울창한 숲 한가운데 낡은 한옥이 보입니다. 오늘 오후를 보내야 하는 곳입니다. 동네 아주머니들이 나무 아래 바위 의자에 앉아서 쉬고 계십니다. 가볍게 목례를 드리고 다시 내리막길을 내려갑니다. 


한옥 입구에 다다랐을 때쯤 나무다리가 놓여있고, 그 다리를 넘으니 3~4채 정도 한옥들이 모여 있습니다. 9월 초록초록 나무와 잘 어울립니다. 날씨가 조금 더운 것 빼고는 꽤 마음에 듭니다.


잘근잘근 모래 묻은 운동화를 벗어두고 한옥 마룻바닥에 발을 올립니다. 창가 옆 나무 탁상에 짐을 풀고, 물 한 모금 마시고 종이 위에 사각사각 글을 씁니다. 


5줄 정도 쓰고 마침표를 찍었을 무렵 한옥 옆 계곡 물소리가 들립니다. 잠시 나에게 필요한 당을 자연에서 채웁니다. 귀를 기울이니 새로 들어보는 새소리가 들립니다. 눈을 감습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작은 종소리도 같이 들립니다. 


오후 4시


고즈넉한 거리를 걷습니다. 궁궐 담벼락 따라 포인트가 되는 장소에서 사진을 찍습니다. 다시 걷습니다. 내가 서 있는 곳은 꽤나 옛날부터 있었던 곳인데 차갑게 쓰인 현대식 안내판을 보고 바삐 걸음을 옮깁니다. 


무사히 세이브. 정문을 통과해서 오늘의 목표인 곳들을 움직입니다. 요즘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갑니다. 얼추 오늘의 일정이 마무리될 때쯤 잠시 벤치에 앉습니다. 옆에 들고 있는 가방에서 연필과 수첩을 꺼내듭니다. 오늘 내가 느끼고 사색한 것들을 잊어버리기 전에 사각사각 적습니다. 


10줄 정도 적고서 서서히 배가 고픕니다. 직장인 퇴근 시간에 걸려서 아마 지금 집에 가려면 한참 걸릴 것 같습니다. 오늘은 근처 전통 맛집에서 저녁 한 끼를 먹고 들어가야겠습니다. 


근황


사각사각 아날로그 종이와 연필, 어두운 밤을 비추어주는 스탠드 아래 노트북과 일들 사이를 오가는 하루입니다. 달라진 것이라고는 정말 제가 좋아하는 걸 하는 시간을 조금씩 늘리고 있습니다. 


핑계도 이제 그만, 취재에 필요한 수첩 연필, 녹음기, 가방 모두 있어요. 몇 년째 입고 있는 청바지와 조금은 낡은 운동화가 있습니다. '이게 있어야 하네' '저게 필요하네' 핑계는 접어두고 시간을 내서 내가 좋아하던 것들을 취재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한때 돈이 안 되네, 그건 부모가 바라는 길이 아니네 ~ 이런 소리를 들었던 모든 자아를 꺼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시간 순서대로 일어났던 것인데 이제는 동시에 모두 꺼내서 다시 살리고 있습니다. 


질문 잃은 오늘날


그동안 피로가 쌓였는지 오늘은 잠을 제대로 잤습니다. 많이 피곤했나 봅니다. 근데 꿈에서 개꿈을 꿨습니다. 귀신이 나오거나, 무서운 악몽은 아니었는데 깼을 때 '휴, 다행이다' 싶은 꿈이었죠.


꿈에서 저는 대학교 4학년이자 말년 병장이었어요. 군대에 있으면서 대학을 다니고 있었죠. (저는 대학교 1학년 끝나고 군대를 현역으로 다녀왔고, 4학년 졸업한 지 꽤 지났습니다) 꿈에서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려니 헉헉 숨이 막히더랍니다. 마침 담당 교수가 '자네는 논문도 써야 하고, 곧 있을 기말고사도 치러야 하며' 동시에 옆에서는 부대장이 '이보게, 자네는 대학 수업이 끝나면 얼른 부대로 복귀해서 유격 훈련을 받아야 하네. 참 불침번도 있으니 잠자지 말고 이어서 준비하고 있게나' 이런 말을 하더군요. 


한 마디로 개꿈이었어요. 잠에서 깼을 때 내가 대학을 졸업한 지 꽤 지났다는 것과, 군 전역한 지 10년도 넘게 지났다는 사실에 감사했습니다. 이 모든 숨 가쁜 것들을 다 하지 않아도 되니까요. 


잠시 물 한 컵 마시며 그때 생각해 봤는데 참 이것저것 다했어요. 취업하고 싶은 회사 앞 담배 피우는 곳에 가서 정보 좀 얻어보려고 어슬렁 거려보기도 하고, 이것도 저것도 해야 한다니까 할 수 있는 건 다 했었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저녁이나 주말이면 아르바이트를 하러 갔었죠. 


백 투 더 퓨쳐


그때 나도 모르게 내가 좋아했던 모든 것들을 다시 되살리고 있는데, 그때랑 지금이랑 다른 게 한 가지 있습니다. 좋은 질문을 가질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 


오후 2시, 오후 3시, 오후 4시 이 일과들은 사실 고백하자면 하루에 있지 않았습니다. 모두 다른 날에 있었고요, 이렇게 어떤 질문에 따라 편집을 했을 뿐입니다. 


악몽 아닌 악몽을 꾸고서 일어나 보니 SNS 알림들이 몇 개 있습니다. 잠시 보니까 여전히 세상에는 월 100, 월 1000, 월 1억 벌어본 사람이 추천하는 어떤 내용의 콘텐츠들이 올라와 있었습니다. 


그분들이 '대단하시다' '감사하다' 생각이 들면서, 동시에 이 모든 게 사실 이미 '답'을 정해두고,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왜'라는 물음이 결여되어 있는 것 같아 아쉬움도 좀 있습니다. 


화면 너머 저 역시, 한껏 욕심이 나기도 하지만 지금 내 삶을 불행하게 바라보려는 마음을 조절합니다. 


지족


오늘 내가 해야 하는 걸 스스로 해냈다면 욕심을 최대한 내려두고 만족하자. 요즘 제가 이런 마음으로 하루를 살고 있습니다. 


저는 모든 게 다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카페 프랜차이즈 블로그 활동도 일종의 결과를 내기까지 2년, 처음 접하는 일이 숙달되어 퍼포먼스가 좋아질 때까지 수개월, 대학교 다음 학기 장학금을 받기 위해 이번 학기를 거진 꽉꽉 다 채워서 살아야 하는 삶을 반복.


심지어 온 국민이 거의 다 본다는 토익 시험조차, 목표한 점수를 넘기 위해 밤낮으로 시간을 들여서 결과를 이루고.


나는 무엇이든 시간이 걸리는 편이었습니다. 진짜 잘하시는 분들이 알려주는 루틴대로 한다고 해도 저 같은 경우에는 평균 소요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가성비, 연비만 보면 정말 좋지 않은 케이스이죠. 


그럼에도 이런 사람이 저라는 걸 잘 알기 때문에 남들처럼 해내려면 시간이 배로 걸릴 수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에게 통용되는 극약 처방보다 '지족' 마인드가 정말 필요합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느리지만 이렇게 살아갈 때 좋은 질문이 잘 생각나고, 나에게 도움이 되는 더 많은 영감을 얻곤 합니다. 오늘 하루 이만큼 내가 올 수 있는 만큼 와보고, 누군가 훨씬 짧은 시간에 훅 지나갈 때면 괜히 욕심이 나는 날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럴 때 내가 하기로 했던 것들을 모두 해냈으면 '지족' 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면 그다음 날에도 탈 없이 일할 수 있습니다. (가끔 불꽃 같이 튀어나오는 생각이 있으면 놓치지 않고 바로 조금 더 하기도 합니다)


도각도각 역시 사각사각


마침 아이패드에 알림이 울립니다. 지난주 대비 78% 사용시간이 줄어들었다 합니다. 업무용으로 자주 사용하는 편이라 이렇게 시간이 줄어들어도 무슨 창고에 아이패드를 방치하는 수준은 아니지만, 어쨌든 사용시간이 많이 줄었다고 합니다.


사각사각 나를 잘 알고 나를 파악한 속도로 길게 보고 천천히 갑니다. 키보드 도각도각 소리도 사각사각 소리 속도로 조절합니다. 유명한 분들이 1년 걸린다는 것도 1년 반~2년 보고 결국 해냅니다. 


며칠 전 장대비가 내리고 (아직 낮에는 좀 덥지만) 벌써 9월입니다. 2023년도 10월, 11월 12월이 남았습니다. 이번 주 추석 연휴가 다가오는데요, 풍성한 한가위 보내시고 '힘 있는' 사각사각 하는 마음으로 또 뵙겠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19. 철야 , 도망가지는 말자. 달려 나갈 수 없다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