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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너를 천천히 무디게 만든다

습작의 창고

by 나바드

나는 너를 천천히 무디게 만든다


빈센트 반 고흐 _ 별이 빛나는 밤 - 정신병원에서 그린 그림


나는 매일 밤, 조용히 네 안으로 들어간다.

물 한 모금에 휩쓸려, 너의 식도를 미끄러지듯 통과해 위장 속에 도착하면, 너는 내가 시작되는 시간임을 안다. 너는 나를 ‘복용’한다고 말하지만, 실은 내가 너를 삼킨다.


처음엔 아주 작고 미세한 흔들림으로 시작하지.

나는 너의 신경계를 부드럽게 조여준다.

불안을 완전히 없애지는 않아. 다만,

가장 예민한 가시 하나쯤은 눌러줄 수 있어.

그래서 너는 내가 고맙다고 착각한다.


너는 내가 없으면 잠을 못 잔다고 한다.

하지만 사실은, 네가 스스로를 견딜 수 없기 때문에 나를 불러들이는 거야. 나는 마치 너의 감정이 만든 어둠을 덮는 작은 담요처럼,

너를 ‘무감각’이라는 이름의 안락 속에 눕힌다.


나는 아주 능숙하게 네 시간을 지운다.

슬픔이 시작되는 지점을 흐릿하게 만들고,

기억을 희미하게 비틀고,

눈물이 고이는 속도를 늦춘다.


그래서 너는 어느 순간 묻는다.

“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지?”


그때쯤이면, 나는 이미 너의 맨살 아래에 뿌리처럼 퍼져 있다. 너의 세포들이 날 기억하고, 신경 말단들이 날 기다린다. 나는 점점 네 몸의 일부가 되어가고,

너는 점점 너의 본래 얼굴에서 멀어져 간다.


너는 나를 의지하면서도, 동시에 날 두려워한다.

나 없이 깨어 있는 새벽은 너무 날카롭고,

나를 삼킨 날은 너무 둔감하다.


나는 해를 끼치는 존재가 아니다.

단지 너의 고통을 대체할 뿐이다.

너의 감정을,

너의 불면을,

너의 눈물과 자책을,

더는 다치지 않도록 뭉뚱그려 덮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지?

너는 나에게 기대면서도

자꾸만 나 없는 세계를 꿈꾼다.


그건 나도 안다. 내가 사라진 자리에서

네가 다시 너를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란다는 걸.

하지만 지금 너는 너무 아프고,

너무 지쳐 있고, 너무 외로워서

내가 아니면 아무도 널 안아줄 수 없다는 것도.


그러니 오늘 밤도 너는 나를 삼킬 것이다.

그리고 나는 다시 네 안에서 천천히 퍼질 것이다.

너를 잠재우고, 무디게 하고,

기억을 둥글게 깎아내고,

고통을 작은 숨결처럼 잦아들게 하며.


나는 너를 해치지 않는다.

단지 너의 고통을 견디게 할 뿐이다.


아주 조용하게, 아주 느리게,

나는 너를 대신해 네 삶을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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