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홍성빈 May 03. 2022

어느 날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다.

이야기의 중심사건

  이야기를 어디서 끝낼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명쾌하다. 이야기는 변화가 발생했을 때 끝이 난다. 첫 포스팅에서 나는 이야기는 곧 변화라고 정의내린 바 있다. 세부요소들을 모두 제거하고 나면 결국 남는 것은 변화라는 중심축이며, 모든 이야기들은 이 변화 한 문장으로 규정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 한 문장’은 곧 이야기의 결론이기에 이야기 진행 상 최후반부에 등장하며, 변화가 발생한 시점에 비로소 이야기는 할 말을 다하고 끝을 맺게 된다. 그런데 변화가 곧 이야기의 끝이라면, 이야기의 시작점은 어디일까. 언제, 어디서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까?

  이에 대해 우선 ‘이야기’라는 용어를 좀 더 구체화할 필요가 있다. 이야기는 ‘스토리’와 ‘플롯’으로 구분된다. 스토리는 이야기를 시간 순으로 배열한 것이다. 한 이야기 속에 묘사된 모든 시점들을 시간 순으로 나열한 타임라인이 스토리이다. 반면, 플롯은 그러한 시점들을 시간이 아니라 의미를 이루는 의도된 인과관계에 따라 구성한 것이다. 바꿔 말해서, 스토리가 사건들의 연쇄적 나열이라면, 플롯은 수용자가 실제 읽어나가는 순서이다. 우리가 접하는 완성된 이야기들은 스토리가 의도된 플롯 구조 하에 배치된 결과물이며, 그러한 배치는 작가들에 의해 임의적으로 선택된다. 수용자가 어떤 순서로 스토리를 경험하도록 조직되었는가. 작가들은 수용자가 가장 효과적으로 스토리를 체화할 수 있도록 순서를 조직한다. 예컨대 추리극의 경우, 살인사건이 벌어진 시점부터 범인이 탐정에 의해 검거된 시점까지가 스토리의 총체라고 한다면, 탐정이 사건을 맡는 시점부터 시작해서 이미 벌어진 사건을 역순으로 추적해나가는 방식을 선택한다. 이야기의 모든 요소들은 중심인물로 귀결된다. 바꿔 말해서, 추리극의 중심이 탐정이라면, 스토리를 만들어내는 모든 요소들은 탐정의 관점에서 재배치되어야 한다. 앞선 포스팅에서 이야기는 중심인물이 욕망을 갖게 될 때 시작된다고 말한 바 있다. 탐정은 살인사건에 대해 의뢰받은 시점에 범인을 밝혀내겠다는 욕망을 갖게 된다. 이렇듯 중심인물에게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어떠한 일’, 이것이 바로 이야기의 사건이다. 나는 이번 포스팅을 통해 사건의 일반적인 성질에 대해 고찰해보고, 이야기적 사건을 만들어내는 방법을 소개해보려 한다.     



무슨 일     

  ‘어느 날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다.’ 나는 해당 문구로 이야기적 사건을 정의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어구는 ‘어느 날’과 ‘무슨 일’이다. ‘어느 날’과 ‘무슨 일’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사건은 도대체 ‘어느 날’에 발생해야 하며, 사건이 성립되기 위해선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져야 할까? 여기에 대해 로버트 맥기의 설명을 인용해보려 한다.     

“도발적인 사건은 주인공의 삶의 균형을 급격하게 뒤흔들어놓는 힘을 가지고 있다. … 주인공은 반드시 도발적인 사건에 대해 반응하는 행동을 보여야 한다.”     

  주인공은 일상에서 수많은 크고 작은 사건들과 마주치게 된다. 그러나 모든 사건들이 ‘이야기적 사건’으로 통용되는 건 아니다. 앞서 나는 이야기는 인물이 욕망을 갖게 될 때 시작된다고 말하였다. 즉, 이야기적 사건의 최우선적 요건은 인물에게 욕망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욕망은 일상적으로 반복되는 동일성의 욕망이 아니다. 어떤 욕망일까. 어떤 욕망이 이야기적 욕망이 될 수 있을까. 이야기 속 주인공의 삶은 균형을 이룬 채 원을 그리며 매일 반복되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무슨 일’이 발생하면서 주인공의 안정된 삶을 온통 뒤흔들어놓는 ‘균열(결핍)’이 생긴다. 이야기적 사건은 인물의 삶에 이러한 ‘균열’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강도여야 한다. 인물은 바로 이 시점에 욕망을 갖게 된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주인공은 이제 ‘균열 이전의 상태로의 회귀’를 욕망하기 시작한다. 모든 이야기적 욕망은 해당 성질을 가진다. 예컨대 <살인의 추억>의 경우, 주인공 형사들은 범인을 잡고 평온한 일상으로 되돌아가고 싶어 한다. <배드 캅>의 주인공은 도덕적 타락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가고 싶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말할 것도 없다. 우연한 계기로 비일상의 세계에 낙오하게 된 치히로는 다시 일상의 세계로 되돌아가고 싶다. 이러한 ‘균형의 복구’라는 욕망은, 불균형의 발생 경위가 표면적으론 주인공에게 긍정적인 의미를 갖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발생한다. 예컨대 주인공이 어느 날 누군가에게 사랑에 빠져 연인 관계가 되려고 노력하는 이야기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 누군가와 연인 관계로 발전하고 싶다는 욕망은, 결국 고백이라는 행위를 통해 감정적 불확실성의 국면을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다. 이렇듯 이야기적 사건은 주인공의 삶에 균열을 불러일으키고, 더 나아가 그 균열을 메우려는 욕망을 발현시킨다.     



어느 날


  이야기에서 우연은 허용되지 않는다. 이야기 내 요소들이 특정 위치에 배치되기 위해선 필연성이 충족되어야 한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이야기의 시작점인 사건에만은 우연이 허용된다. 사건은 주인공의 의지와 무관하게 ‘우연히’ 발생한다. 예컨대 교통사고로 인해 배우자나 자녀를 잃는 것으로 시작하는 이야기를 떠올려보자. 교통사고로 인해 소중한 이를 잃게 되는 사건은 주인공에게 있어선 완전한 우연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건을 마주한 주인공은 이에 대응하여 어떠한 욕망을 갖게 된다. 이야기적 사건이 성립된 것이다. 사건의 우연성은 언뜻 중심 사건이 전적으로 주인공의 의도에 의거하여 발생한 것처럼 느껴지는 이야기라고 하더라도 마찬가지로 성립된다. 대표적인 예시로, 로드 무비나 여로형 소설처럼 어딘가로 떠나는 이야기를 꼽을 수 있다. 예컨대 페터 한트케의 소설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에서 ‘어느 날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어느 날 출근하자마자 느닷없이 직장에서 해고되었다’이다. 주인공은 해고 이후 하루 종일 거리를 방황하다가 느닷없이 어떤 사람을 살해한 후 도주하기로 결심한다. 또는 잉마르 베리만의 영화 <산딸기>의 경우, 이야기의 시간적 배경이 되는 날에 우연히 학위수여식이 잡혀 있었기 때문에 주인공은 참석을 위해 해당 도시로 떠나게 된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 주인공이 길을 떠나는 이유는 ‘어느 날 상관으로부터 라이언 일병을 찾아가 그가 전역하게 되었음을 알리라고 명령받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이야기적 사건은 ‘어느 날’ 느닷없이 발생한다는 속성을 가진다. (다만 이러한 우연성에서 벗어나있는 특수한 이야기들도 있긴 하다. 이에 대해선 다른 포스팅에서 다뤄보도록 하겠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어느 날’이어야 할까. 우연히 마주한 ‘무슨 일’은 주인공의 인생에 있어서 어느 시점에 발생한 사건일까. 모든 이야기가 ‘어느 날’에 긴밀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장르적인 이야기의 경우 사건이 발생한 날이 주인공의 인생에서 어떤 특수한 시점인지 아닌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살인의 추억>에서 연쇄살인이 발생했을 때 박두만은 여느 때와 같이 평온한 일상을 보내는 중이었다. <살인의 추억>에서 전경화되는 것은 시대적 배경이다. 때문에 인물의 내면적 결핍에 대한 묘사는 상대적으로 후경화된다. 이와 반대로 인물이 전경화되는 이야기, 바꿔 말해서 한 인물의 삶을 세세하게 보여주는 플롯에서는 사건이 인물에게 있어 ‘어느 날’에 발생했는지가 중요해진다. 특히 영화와 단편소설과 같이 분량상의 제한을 받는 매체의 경우 더욱 그렇다. 이러한 매체들의 경우 보여줄 수 있는 리얼타임이 한정되며, 작가는 제약 속에서 리얼타임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느냐의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때문에 인물 중심 플롯의 경우, 해당 인물이 인생의 어떠한 ‘변곡점’에 놓여있는 시점에 사건이 발생하도록 설정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이직을 앞둔 상황, 결혼을 앞둔 상황, 은퇴를 앞둔 상황 등 삶의 조건에서의 변화를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 이야기를 진행할 경우 자연스레 해당 이야기의 변화는 대표성을 부여받게 된다. 요컨대 이야기 내에서 주인공에게 하나의 사건으로써 그려지는 변화가 실은 주인공이란 사람 자체의 변화를 상징하게 되는 것이다. 주인공은 삶의 변화를 앞두고 어떤 태도를 보이는가. 그러한 변곡점을 어떻게 통과하는가. 또한 변곡점을 통과하면서 궁극적으로 어떤 모습을 변화하는가. 앞선 언급했던 <산딸기>의 경우가 이러한 방식을 채택한 케이스다. 주인공 이삭은 78세의 노인이다. 그는 학위수여식이 열리는 날 아침에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는 꿈을 꾼다. 불길한 느낌이 들어 비행기 대신 자동차를 몰아 수여식이 열리는 도시까지 가기로 한다. 이 여정에서 그는 이런저런 사건들을 겪으며 자신의 지난 삶을 반추해보게 된다. 이렇듯 <산딸기>에서 다루고 있는 시간의 총합, 즉 스토리의 총체는 이삭의 인생 전체인 반면 영화의 리얼타임은 고작 길 위에서 보내는 하루이다. 영화는 살아있음의 상태에서 죽음의 상태로의 변곡점에 주인공을 배치시키고 그가 그것을 통과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이야기상의 변화가 곧 이삭이 자신의 삶 전체에 대해 갖게 된 시각 변화와 병치되어 보이도록 유도해내는데 성공하였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부분은 서술상의 사건 제시시점이다. 사건을 창조해내는 데 성공했다면 그것을 플롯 구성 내에서 언제 보여줘야 할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사건은 전체 분량의 4분의 1 이내에는 등장하는 게 좋다. 예컨대 A4 10매 내외의 단편소설의 경우 적어도 3페이지 이내에, 두 시간짜리 영화의 경우 적어도 30분 이내에 등장하는 것이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이라는 구조를 균형 있게 구축하는 데 유리하다. 습작 단계에서 가장 실수하는 경우 중 하나가 이야기의 세계관이나 인물 설정을 보여주는데 초반부를 너무 많이 할애하다 보니 플롯 구성 상 사건의 시작이 지연되어 구조가 무너지는 것이다. 구조가 무너진다는 것은 이야기 내 긴장감이 무너진다는 것을 뜻한다. 인물에 대한 정보나 인물이 겪었던 과거, 이야기 내 세계관 등 수용자들이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설명되어야 할 정보들은 이야기를 진행하면서 조금씩 제시해나가는 것이 효과적이다.

작가의 이전글 인물 = 욕망+결핍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